고대 그리스 신화의 인물인 시시포스(Sisyphus)는 알베르 카뮈의 영향 탓인지 인간적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평가와 달리, 시시포스는 신의 섭리에 순종하지 않는 인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시시포스는 신들을 기만한 죄로 큰 바위를 가파른 언덕의 정상으로 밀어 올리는 형벌을 받게 됩니다. 온 힘을 다해 바위를 정상에 올려놓는 순간 바위는 아래로 굴러 떨어집니다. 그러자 그는 아래로 내려와 처음부터 다시 바위를 정상으로 올립니다. 그리고 이 노동은 영원히 반복됩니다. 카뮈가 보기엔, 그의 무한 반복의 노동은 형벌이 아닌 인간승리입니다. 이는 변화 불가능해 보이는 인간의 운명에 대한 반항이며, 절망을 뛰어넘고자 하는 인간 의지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카뮈는 외칩니다. “나는 반항한다. 고로 존재한다.” 하지만 실현 불가능해 보이는 지점을 향해 나아가는 무한의 노동은 인간의 영웅적 도전이라기보다 무의미한 저항으로 읽힌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바위를 정상에 안착시키기 위한 힘은 섭리와 순리인데, 인간의 불굴의 의지로 운명과 맞서는 것은 결국 무한의 형벌로 귀결된다는 겁니다. 이처럼 시시포스의 무한 반복의 바위 굴리기가 진보를 향한 숙명이라기
민주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대의 민주주의(representative democracy)는 대부분의 정치현장에서 활용되고 있는 정치제도입니다. 그런데 대의민주주의가 최선의 정치제도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습니다. 대의민주주의 작동을 둘러싼 문제점들이 심심찮게 정치현장에서 발견되고 있어서입니다. 이처럼 대의민주주의의 위기가 거론되고 있는 가운데, 대의제와 민주주의가 어떻게 퇴보하고, 이 문제의 해결책은 무엇인지가 정치개혁의 과제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 대의 민주주의란? 민주주의는 인간이 고안한 정치제도 중에서 정당성에 대한 수용성이 가장 높은 정치체제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민주주의와 조합되는 다양한 정치제도가 정치영역에서 활용되고 있습니다. 예컨대 직접민주주의, 자유민주주의, 사회민주주의, 정당민주주의, 참여 민주주의등이 정치현장에 실제 적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민주주의체제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직접민주주의를 제외하고, ‘대의 민주주의’를 토대로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운영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대의 민주주의는 popular sovereignty(인민주권)라는 민주주의 이념에 대의정부라는 운영방식이 합쳐진 정치제도로 요약됩니다. 즉, 주권자
우리나라가 표방하고 있는 정치체제는 이견 없이 ‘자유민주주의’체제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정치가 진정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의 답에는 의문부호가 찍힙니다. 정치영역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달성이 어려운 것은 무엇보다 자유-민주주의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대립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를 추구하면, 또 다른 하나를 소홀히 할 수 있어서입니다. ◆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 자유-민주주의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조합으로 구성됩니다. 그런데 자유민주주의의 구성인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생각보다 어울리기 어려운 개념입니다. 결혼생활에서 두 구성원이 조화보다 갈등을 보이듯이, 자유민주주의 두 구성도 그렇다는 겁니다. 자유주의는 국가의 간섭에서 벗어나 간섭의 부재를 의미하는 자유에 근거합니다. 따라서 human right(인권)의 우선성을 강조합니다. 특히 인권 중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 재산권의 보장등의 기본권도 자유주의에 기초한 영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자유주의에서의 간섭의 부재인 자유는 개인이 시장에서 공정한 경쟁을 통해 사익을 추구하고 승자가 재화와 서비스를 독점하는 시장경제체제를 승인합니다. 반면
최근까지 사회정책에서 가장 논란이 되어 왔던 주제는 기본소득이었습니다. 기본소득은 무엇보다 비정규직, 파견직, 실업자등 불안정한 고용 노동 상황에 놓여 있는 프레카리아트들의 삶을 개선해 보겠다는 노력의 일환으로 고려되어왔습니다. 그런데 사회보장제도의 하나로 논의되어 온 (좌파)기본소득의 관심은 사람들이 좀 더 안정된 삶을 영위하기 위해 국가는 어떠한 복지정책을 도입해야 하는가에 있기보다 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근본적인 모순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기본소득은 노동이 자기결정권에서 벗어난 소외된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본소득은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의 분배등 핵심적 문제를 외면하고 있습니다. ◆ 노동과 인간 소외 맑스의 관점에서 보면, 노동은 인간의 소외를 초래합니다. 인간의 소외란 ‘통제력의 상실’을 뜻하는 것으로, 인간이 외부세력에 의해 관계가 종속되어 자기결정권을 보장받지 못하게 된 상태를 말합니다. 노동의 소외에 대한 대표적인 예가 2016년 5월 발생한 구의역 스크린 도어 사망사고입니다. 노동과정으로부터의 소외를 의미하는 이 사례는 노동자가 기계의 방식과 속도에 종속되어, 노동과정을 통제
우리나라 경제에 ‘쌍둥이 적자’가 나타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최근 재정수지 적자와 함께 에너지 가격 급등에 따른 무역수지의 일시적 적자 전환이 쌍둥이 적자의 전조가 아니냐는 것이다. 통합재정수지의 적자폭은 커지고 있다. 2019년 -12.0조원(GDP대비 –0.6%)에서, 2020년 –71.2조원(-3.7%), 2021년 –75.4조원(-3.7%)으로 확대되고 있다. <2021~2025년 국가재정운용계획>에 따르면, 2022~2025년 통합재정수지와 관리재정수지는 각각 연 평균 65.5조원, 104.3조원 적자를 보일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경상수지 흑자폭도 축소되고 있다. 무역수지 흑자가 2015년 이후 등락을 보이면서 감소하고 있어서다. 특히 2022년 1월엔 무역수지가 적자를 기록하였다. 수출액이 1월 553.2억 달러로 전년 동월대비 15.2%증가한 반면, 수입액은 602억 달러로 35.5%증가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재정수지 적자와 경상수지 적자가 동시에 나타나는 쌍둥이적자는 국민소득의 감소와 대외신인도의 축소등을 초래한다. 자칫하면 중산층의 몰락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쌍둥이 적자의 가능성에 대한 사전적 대처가 요구되는 이
동아리 방에서 2학년 여자선배와 1학년 남자 후배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구조가 바뀌면 세상이 좋아질까? “누나, 그게 무슨 뜻인가요?” “M(맑스)선생 말처럼,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고 나도 믿는데 정말 그럴까라는 거지?” 후배는 그 명제가 듣기에 참 멋있는 말인 것 같았지만, 선배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선뜻 이해하지 못했다. 대충 말뜻을 넘겨짚고 이렇게 말했다. “왜 그렇게 유약한 말씀을 하시나요?” “솔직히 말해보자. 돌 던진다고 그 짱돌이 어떻게 존재를 깰 수 있단 말이야? 우리는 존재를 바꿀 '그 무엇'이 없다는 거지. 또한 사회적 구조가 변화된다고 세상이 바뀔까?” “누나 말씀은 구조가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말로 들리는데요. 일전에 구조결정론에 대한 예를 어떤 책에서 읽은 적 있어요. ‘부르주아의 경제적 기반을 갖춘 자가 보수적인 의식을 가지게 된다.’면서 그 실례가 늑대소년이었어요. 소설 '정글북'의 모글리 같은 인간 소년이 늑대 무리의 일원으로 길러지면, 그 소년은 인간이 아닌 늑대의 습성과 의식을 지니게 된다고 말이죠. 늑대의 의식은 늑대라는 존재에 의해 결정된다는 겁니다. 결국 누나 말씀은 구조결
우리는 더 나은 패러다임의 등장을 바라고 있습니다. 패러다임의 전환은 세상의 변화에 대한 전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패러다임은 어떻게 생성될까요? 미국의 과학 사학자인 토마스 쿤(Thomas Kuhn)에 의하면, 독점적 위치를 차지하던 정상과학 패러다임이 이상현상(extraordinary science)의 축적으로 인해 소멸될 때,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새로운 패러다임의 등장을 가로막는 주요한 장애물은 의사결정과정에서 이상현상, 곧 반증을 용납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반증의 거부가 새로운 패러다임의 등장을 막는 대표적인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반증을 거부하는 사례로 ad hoc 가설 그리고 연역적 접근등이 꼽히고 있습니다. ◆ ad hoc 가설 (이찬우) ad hoc 가설이란 특정 이론에 부합하지 않는 관찰이 이루어질 경우, 그 이론에 부합하도록 도입되는 보조 가설(auxiliary hypothesis)을 말합니다. 이는 ‘T&A → E’ 로 기호화 될 수 있습니다. 즉 이론 T와 관찰 E에 관하여 ‘T → E’가 합리적으로 타당하지 않다고 할 때, 이 이론을 주장하고 옹호하는 이들은 보조가설 A를 도입하여
# 바다가 보이는 아름다운 리조트 앞에 푸른 바다와 멋진 백사장이 펼쳐져 있다. 당신 옆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누워 있다. 그리고 그와 한 잔의 커피를 마신다. 그런데 그 커피는 싸구려 커피에 쓴 맛이 진하고 설탕이 듬뿍 들어있는 로부스타 커피이다. 그 커피는 어떤 맛이 날까? 커피 맛은 무엇에 좌우되는 걸까? 상식적으로 커피 성분이 좋으면 커피 맛도 좋을 것으로 판단 할 수 있다. 즉 고급원두인 아라비카로 로스팅 된 커피가 로부스타 커피보다 더 맛있다고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인식에는 커피 맛은 성분 때문에 느껴진다는 상식이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심리적 상태가 커피 맛을 좌우한다는 연구 (「김수진 정승호 (2018) “심리적 상태에 따른 커피 맛의 변화에 관한 연구”」)는 상식을 전복시킴으로 흥미롭다. 정말 로부스타 커피를 마시고 있어도 심리 예컨대 행복감을 느끼고 있을 때, 로부스타 커피의 맛은 아라비카 커피 맛처럼 느껴질까? ( ▷ 이 글은 <김수진 정승호 (2018) >논문의 요약입니다. ) ◆ 취향과 커피 선호 사람들은 취향에 따라 커피 선호를 달리한다. 자신의 취향에 맞는 커피 성분을 택하거나, 성분에 첨가되는 우유와 물등을 조절하여 커
◆ 미인의 역설 “정말 아름답군요.”“스미스의 모순이지”“그렇소. 여자야말로 사용가치와 교환가치가 전혀 비례하지 않는 예가 될 것이오. 즉 물, 공기등은 그것 없으면 인간이 당장 살 수 없지만 값은 거의 없거나 없는 것과 비슷하게 싼 대신, 여자는 보석 따위와 마찬가지로 별 쓸모도 없이 값만 비싸단 말이오. 그걸 위해 돈과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고, 이름을 더럽히고 몸을 망치고 심지어는 생명까지 바치는 것들이 숱한 걸 보면....” (이문열, 「젊은 날의 초상」 중에서 ) 이 소설은 아담 스미스가 고민한 ‘물과 다이아몬드의 역설’ 혹은 ‘가치의 역설’(paradox of value)을 인용하면서, 겉으로 보기에 눈부신 외적 가치에 대한 무분별한 갈증을 비판합니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개인의 만족의 합인 사용가치와 이를 얻기 위해 지불되는 교환가치가 실제로 비례하지 않는다는 점을 들고 있습니다. 이 논거는 논리적입니다. 대체로 아무리 탐나는 것일지라도 그것에 익숙해져 갈수록 신비함과 황홀함이 점점 사라져 가는 게 일반적입니다. 소비를 늘릴수록 단계별 만족이 감소하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재화와 용역의 경우 단계별 만족들의 합이 이를 얻기 위해 희생한 대가보다
미국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 외교정책은 궁극적 가치와 실용적 접근의 병존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21일 문재인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정상회담 이후 발표된 공동성명은 “문재인 대통령은 한국과 미국의 안보를 향상시키는 실질적 진전을 위해 북한과의 외교에 열려 있고 이를 모색한다는, 정교하고 실용적인 접근법을 취하는 미국의 대북정책 검토가 완료된 것을 환영했다”라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이처럼 바이든 행정부는 한반도 비핵화라는 궁극적인 가치와 실용적 접근방식을 동시에 지향하고 있습니다. 즉 한반도 비핵화라는 최선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지금시점에서 실용적인 접근방식을 추구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실용적인 접근이란 이론상 그리고 실제상 어떠한 의미를 가질까요? ◆실용주의란? (실용주의는 practical 또는 pragmatic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practical이란 말은 단기적 유용성을 강조하는 일상적인 태도를 뜻하고, pragmatic은 퍼스(C.S. Peirce), 제임스(W. James), 듀이(J. Dewey), 로티(R. Rorty)등이 발전시킨 미국 철학사조의 개념으로 이해되어집니다. 하지만 양자의 본질적 성격은 다르지
기업은 일정기간동안 기업의 경영성과를 정리한 정보인 손익계산서(포괄손익계산서)를 기업 이해관계자들에게 제공한다. 손익계산서는 어떠한 정보를 표시하는 걸까? 손익계산서의 명칭은 무엇을 함의하는 걸까? ◆ 손익계산서는 수익성 정보를 표시 손익계산서는 인위적으로 구분한 기간의 성과를 측정한다. 즉 6개월 또는 1년 등으로 구분한 보고기간(reporting period) 또는 회계기간(accounting period)의 경영성과를 표시한다. 기업을 계속기업으로 가정하고 있어, 인위적 기간의 경영성과를 측정하는 것이다. 손익계산서가 나타내는 기업의 경영성과는 기업의 수익성에 관한 내용을 말한다. 수익성 정보란 수익과 비용을 종합한 것이다. 수익(revenue, income)은 기업이 영업 활동을 통해 번 돈과 유사한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수익은 자산의 증가·부채의 감소에 따라 자본의 증가를 초래하는 경제적 효익의 증가금액이다. 상품을 외상판매하면 자산인 매출채권이 발생한다. 자산은 현금을 창출하는 미래 경제적 효익을 가진다. 따라서 매출채권과 수익인 매출은 동시에 기록된다.) 수익에는 고객에게 상품을 판매한 대가인 매출, 용역을 제공하고 받은 용역수수료, 은행에
현재 정의의 패러다임은 응보적 정의관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패러다임은 국가질서에 대한 존엄에 관심을 두는 과거 회귀적 관점이며, 피해자가 원하는 것을 채워주어 피해자의 존엄을 지켜주는 미래지향적 정의관에는 무관심하다는 비판이 일고 있습니다. ◆ 응보적 정의관 정의를 이야기 할 때, 곧 잘 눈을 가린 채 저울의 균형을 유지하는 여신의 이미지가 언급됩니다. 예컨대 정당하지 못한 일을 범한 자가 사법시스템의 처벌 절차를 밟게 될 때,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게 취급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법 위반이라는 한 쪽 저울의 무게가 처벌이라는 반대쪽 저울의 무게와 균형을 이루게 된다면, 모든 사람에게 정의는 달성되는 겁니다. 이러한 정의관은 응보적 정의관이라 불립니다. 범인의 범죄의 정도는 범인에게 부과하는 고통의 정도, 예컨대 징역형의 시간에 비례될 때, 정의의 저울은 항상 균형을 유지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패러다임의 정의관은 과거를 정리하는 회귀적 정의에 머물 뿐, 공동체의 미래에 희망을 줄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품게 합니다. 현행의 사법 시스템은 피해자의 회복보다 가해자에 대한 제재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고통의 부과만이 정의의 저울의 균형을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