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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박수근 탄생 100주년] 박수근의 영혼의 언어 : 진실과 선 그리고 관계의 회복

 

지난달 탄생 100주년을 맞이한 박수근처럼  대중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화가도 드물다. 그는  이중섭과 더불어 한국 근현대 회화의 상징이며, ‘국민의 화가’라는 애칭을 얻고 있다.

 

그의 작품 중 <빨래터>는 2007년  우리나라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 45억2천만원에 낙찰되는 기록을 남겼다. 

 

이처럼 壽根의 이름을 모르면 한국인이 아닐 정도로 그는 국민으로부터 최고의  애정을 선사받는 화가인 것이다. 

 

특이하게도 그의 작품에 대한 평가는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  과거의 곡해와 오해에서 벗어나 제대로의 진가를 인정받게 된 결과이다.

 

박수근의 작품 속에 대중들이 빠져 들어가는  그 매력은 무엇일까? 그를 국민화가로 칭송하게 된  힘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수근이 그의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작가의 작품은 영혼의 언어

 

빈센트 반 고흐는 “회화는 고유한 생명을 지니고 있는데, 그 생명은 온전히 화가의 영혼에서 나오는 것이다.”라며 회화의 정수를 이렇게 응축한다.

 

회화가 인간 본성의 표현이며, 작가의 영혼의 언어라는 설명이다. “회화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라는 설명이나, “회화란 그것을 그린 사람의 감추어진 이미지”라는 언급도 작가의 영혼과  작품과의 불가분의 관계를 강조한 것이다.

 

서영희평론가는 이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오직 선과 색조로서만 그 매력을 발하고 시각적 즐거움, 개념적 유희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작품이란 생각은 모더니즘 이후 오늘의 미술계에서는 별로 설득력이 없다. 오히려 작가의 심리나 예술과 영혼의 문제, 영혼을 표현하는 언어의 문제가 제기되어야 하는 시점이다.」

 

 

이중섭과 박수근

 

박수근의 내적 영혼의 이해의 출발은  박수근의 작품세계와 근현대회화의 쌍벽인 이중섭의 그것을  대비함으로써 시작된다. 이들의 생애와 재능이 상반되게 인식되기 때문이다.

 

우선 이들의 삶에 대한 태도가 선명히 비교된다.  중섭이 시대의 저항이라면 수근은 그가 짊어진  역경의 순응이었다.

 

중섭은 일본에서 정식으로 미술교육을 받은 엘리트로서, 화가의  천재성을 품고 있었다. 그는 그림을 팔아 생계를 꾸려나가는 것은 세상과의 타협으로 느꼈다. 그래서 ‘세상이 주는 음식’을 거부하며, 자신의 예술의 순수성을 지키고자하였다.

 

반면에 수근은 미술학교 출신이 아니라, 독학으로 미술을 터득하였다. 그는 가족의 삶을 위해 그림을 기꺼이 팔았고, 미군 PX에서 초상화를 그려 돈을 벌기도 했다. 그는 예술도 소중하지만 그의 가족에 대한 애정도 뜨거웠기 때문이다.

 

수근은 원래 집안 대대로 물려오던 농업과 상업으로 인해 어느 정도의 물질적 부를 이루며 살아갔다. 그러나  1921년 부친이 광산사업에 손을 댔다가 큰 손해를 보게 되면서 형편이 어려워졌다. 게다가 그 해 여름의 홍수로 전답이 떠내려가고 집이 무너지는 재해를 당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평생에 걸친 가난과의 싸움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수근은 이와 같은 몰락과 환경의 변화에 인간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의 힘을 느꼈으나,  운명에 순응하며 묵묵히 견뎌나간다.

 

중섭과 수근을 오광수평론가는 이렇게 대비한다.

 

「예술의 이상주의적인 태도에 있어서는 이중섭이 더욱 돋보이지만 삶을 사랑한 박수근에게서는 오히려 진한 인간의 체취를 느끼게 된다. 소처럼 묵묵히 자신의 운명에 순종한 박수근에게서는 청교도적인 삶과 예술의 우직하고도 견고한 일치를 보게 된다.」

 

중섭은  예술가의 순수성을  견지하는 외곬을 드러낸 반면,  수근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인내의 삶을 수용하였다.


 

수근의 인물들, 36.5도 

 

수근은 가난 속에서도  그의 애정과 온기를  자신의 가족이라는  혈연의 울타리를  넘어 그의 주변의 사람들에 드러낸다.  특히 세상의 중심에 서 있는  주인공들이 아닌,  제대로 배우지도 못하고 배불리 먹어보지도 못하는 소외와 보호의  존재들, 하지만 가슴은 따뜻함을 지닌 자들에  대한 사랑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회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가난과 역경 속에서도 그의 삶을 꿋꿋이 견뎌 나가는 동네의 아낙들, 노인, 그리고 어린이들이었다. 그들에게는 욕심보다  진실과 순수가 앞선다.

 

공주형평론가는 박수근의 인물들을 36.5도라 표현한다. 그래서 수근은 ‘참 착한 그림’을 그린다.

 

「박수근 그림에는 선한 사람들이 가득합니다. 화가가 눈으로 본 사람들이 아니고, 마음으로 품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을 바라보는 화가의 시선에 온기가 담깁니다. 36.5도의 온기입니다. 화가의 이웃들은 바르고 어질게 사는  삶의 가치를 누구보다 믿고 행했던 이들입니다. 더벅머리소년, 하얀 저고리에 검정치마를 입은 아낙네, 할 일 없이 거리를 떠돌던 남정네, 더 이상 잃을 것 없는 노인네,」


 

수근의 영혼의 언어 : 진실과 선 그리고 관계의 회복 

 

혹자는 박수근의 작품을 아마추어처럼 세련되지 못하고 서툴다고 평가한다. 미술에 대한 전문교육을 받지 못하여 투박하고 기교의 부재를 지적한다.

 

최형순평론가는 허세와 기교만 가득 찬 표현은 ‘기관 없는 신체’라 지적하며 아카데미즘을 극복하고 작가의 정념을  강조한다.

 

「과거의 궁정예술이나 아카데믹한 엘리트예술은 이 시대를 더 이상 리드하지 못한다. 대신 우리시대의 예술성은 우선 정서적 울림이 있는 감동, 즉 감응에서 찾게 된다. 박수근의 작품처럼 삶과 민중정서 깊숙한 곳으로부터 우러나는 예술의 진정성에 새롭게 눈뜨게 된 시대인 것이다. 」

 

수근의 작품이 주는 울림은 무엇일까? 박수근의 작품의 매력은  아카데미즘에 천착한  장인의 기교가  아니라, 고난 속에서 단련된 인내와 꾸준함의 미덕이 풍겨나는 향기이다. 그리고 그것은 선함과 진실의 향기이다.

 

수근은 자신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그의 고백은 그의 영혼의 묘사이다.

 

“나는 인간의 착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하며 그들의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물론 어린아이들의 이미지를 가장 즐겨 그린다.”

 

수근이 그의 착한 인물들을 통해서 그리고자 했고,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선함과 진실의 승리였다.  이러한 위선과 거짓이 거세된 선함과 진실이 투영된 그의 영혼이  그의 작품을 매력적으로 돋보이게 한 것이다.

 

수근의 선함은  무엇일까? 즉 수근의 영혼의 정수는 무엇일까? 공주형은 이를 진실한 관계라 정의한다.  선함이란 진실의 관계가 맺어지는 조화와 갈등의 치유를 뜻한다.

 

「박수근 회화에서 충만함의 공간 아래에는 남루한 초가지붕들이 곳곳에 자리한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 아래에는 선량한 사람들이 있고, 그 사이에는 진실한 관계들이 있고, 그 옆에는 자연과의 조화로움이 있다......이곳은 자본주의적 삶의 원리가 농경적 생의 기본을 흔들어 버리기 이전, 공동체의 친밀함이 보장되고, 개인과 공동체가 선함과 진실함 아래 조화롭게 합일하고 그래서 화가 자신 뿐 아니라 그 누구도 소외되지 않았던 바로 치유의 공간이었다.」

 

수근은 작품을 가슴으로 그렸고 善을 묘사하고자 하였다. 선은 그의 영혼의 언어이다. 그리고 선은  상처를 싸매주는 치유의 관계의 회복을 뜻한다.  그 회복은  ‘모두가 자아의 통속에 스스로를 가둬놓은 세상’에서 상대에 대한 관심과 배려의 세상으로의 복귀인 것이다. 그래서  그 복귀는 선의 성취이며 관계의 회복을 의미한다.

 

수근의 영혼이 맑은 것은 그가 관계의 회복을 추구하는 선이라는 가치를 가슴에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근의  선의 기원, 인내 그리고 관계의 회복  

 

회화란 그것을 그린 사람의 감추어진 이미지이며, 화가의 영혼의 고백이다. 그의 선함은 그의 맑은 영혼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 깨끗한 영혼은 연단속의 인내의 산물이다.

 

수근은 경제적 고통과 사회적 좌절, 그리고 육체적 고통으로 인한 무기력함이 아니라, 그 고통에 순응하고 이를 수용한다. 그래서 그의 영혼은  절망과 허무대신 훈훈함이 감돈다.

 

서성록교수는 박수근의 작품은 절망과 허무를 표현하지 않고, 소망과 생명을 겹겹이 에워싼다고 지적한다.

 

서교수는 <할아버지와 손자>라는 수근의 작품에서 그림의 주제는 기다림이자 인내라고 평가한다. 그리고 할아버지 품속의 아이가 인내하며 기다림에 주목한다. 

 

손자를 할아버지가 돌보고 있다. 손자는 누군가의 보호와 사랑이 필요하다. 그 당시 박수근은 질병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고통 중에 있었던 수근은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했다. 서교수는 아이를 고통 받는 수근으로, 할아버지를 수근의 머리카락의 한올 까지 세는 절대자로 인식했다.

 

아이는 그 품안의 관계를 통해 인내의 힘을 공급받는다. 할아버지의 보호 안에 있는 연단 속에 있는 아이는  기다림과 인내를 감내하고 있는 것이다.

 

「할아버지와 손자는 고통이 누그러질 기미가 없을 때도 절망하지 않았음을 입증한다. ... 그들은 어떤 시련과 고난도 파괴 할 수 없는 기질을 배양시키는 중이다.」

 

하지만 수근은 그 기다림 속에서 자신만을 사랑하는 원리를 뛰어넘어,  이웃의 고난에 주목하고 관심으로 그의 애정을 확장한다. 이것은 그들에 대한 우월감이 아닌 강렬한 애정이요 열정이었다. 서교수는 이를 ‘스플랑크나’로 표현한다.

 

「라틴어 스플랑크나는 자궁이나 장과 관련된 용어로 연민에서 우러나오는 내적인 감정 혹은 뱃속의 반응을 지칭한다.  ....스플랑크나는 동료인간의 고통과 애환을 가슴 아프게 받아들임으로써 이러한 사랑을 나타냈다. ....스플랑크나는 자기만의 사랑을 초월한 사랑의 형태이다. 자기중심적인 사랑과 대극 점에 위치한다」


 

인내와 관계회복의 열매


서교수는  인내를 포기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한다.

 

「사실 그들은 손을 벌리지 않을 뿐이지 구제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문이 닫혀 있을 때 새로운 문을 찾아 두드리는 것이 인내고 기다림이다. 그들에게 비관과 체념은 패망의 지름길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인내는 용기이다.....아무런 희망도 없는 순간에 처할 때 인내는 뭔가 놀라운 은혜를 발견해내고야 만다. 인내를 포기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이처럼 고난 속에  인내하고 기다린  수근의 진실과 진가는 善으로 표출되고, 이 善을 세상이   마침내 깨닫고 수용한다.  인내 속의  기다림과  관계의 회복과  연민의 관계의  진실이 그의 영혼의 모습으로 투사되어 그의 작품의 울림으로 세상에 전파된다. 그 결과  그를 선과 진실을 품고 있는 ‘국민의 화가’로 칭송하게 된다. 

 

이는  무기력한 운명론자가 아닌 할아버지의 품안에 있는 어린아이처럼 ‘할아버지의 품안’에서 삶의 고단함을 수긍하고, 인내하고 기다린 보람이다.


 

수근은 ‘우리의 화가’

 

수근의 울림은 선이며 진실이다. 그리고 그 선은 관계의 회복이며 조화이다. 또한  선은  ‘남’의 아픔이 ‘나’의 아픔으로 전이되는 진실이다. 이를 위해 수근은 삶의 고단함을 부여잡고 있는 아낙을 그렸고, 보호가 절실한 아이를 묘사하였고, 위로가 필요한 촌로를 중심에 두었다. 그것이 수근에게는 소명이었고 동시에 우리에게 전하고자하는 알림이었다.

 

그래서 그의 영혼의 언어인 작품에서  아카데미즘의 현학을 초월한 삶의 감동과 울림이 우러나온다.

 

이처럼 수근은 그의 작품을 통해 우리들의 소명을 지시한다. 삶의 형벌처럼 느껴지는 누그러지지 않는 고통 속에서, 인내하라고....그리고 그 인내를  선이라는  관계의 회복을 통해 이루라고 명한다.  이것은 아이는 할아버지 품안의 존재라는 관계의 회복과 공동체 속의 동료와의 관심이라는 소명이다.

 

이럴 때 결국 우리는 소명의 긍정적 수용으로 우리의 어깨를 짓누르는  감당하기 불가능하다고 느껴지는  무게의 짐을 견뎌내고,   마침내 그 짐을  번쩍 들어 올릴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수근의 영혼의 언어를  노래할  때,  수근은 이제  ‘우리의 화가’가 된다. 그리고 우리는 관계의 복구 속에 비록 여전히 삶은 고단 할지라도, 함께 어깨 걸고 당당히 나아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