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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 차경과 자강불식 ] 리더의 조건은 ‘自强不息 厚德載物’

한국 전통가옥의 아름다움의 하나로, 담 너머 자연의 풍광을 실내로 흡수하는 차경이 꼽히고 있습니다.  

차경은  실내의 문, 창, 또는 누마루등을 통해 자연의 풍광을 프레임화하여 실내에 자연을 담는 기법입니다.  

차경은 실내에 거주하는 자에게 마음의 안식을 주기도 하며, 좌절된 자아를 위로하고 치유하는 역할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 선조들이 담 너머 자연의 풍광을 실내로 담아내고자 한 이유는  자연의 질서와 이치를 4계절 관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 누정이 주는 자연의 메시지

차경은 내부자와 외부 사이의 단절을 해소하여 자연이 품고 있는 이념을 내부자에게 전달하는 도구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연이 품고 있는 이념은 간접적으로 누정에 대한 기록인 누정기를 통해 엿볼 수 있습니다. 

(樓亭은 벽이 없이 기둥과 지붕만으로 이루어진 건축물로, 정자·정각·누대·누각등을 통칭하는 말입니다. 돌이나 흙으로 쌓아올린 대 위에 세운 것을 樓라하고 그 규모가 작은 것을 亭이라고 합니다. 누정기는 누각이나 정자등 누정을 신축하거나 개수할 때 그곳을 방문한 선비들이 누정에 대해 지은 산문을 말합니다)

누정은 인간이 자연과 상호교통하여 자연의 도를 깨닫게 하는 건축물입니다. 

이러한 누정의 의미가 집안으로 흡수된 건축 요소가 누마루입니다. 즉 누마루는 인간이 자연을 가까이 하여 자연 속에서 도를 구하기 위해 세워진 누정의 효과를 실내에서 얻고자 한 건축양식입니다.

따라서 선비들이 누정에 대해 쓴 누정기는 누마루에서 얻고자 한 자연의 원리와 질서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제공합니다. 


◆자연의 질서, 자연의 불변성 vs 자연의 가변성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다룬 누정기 중, 자연의 불변성과 무진성를 강조한 주장에 대해 이를 뒤엎고 자연의 가변성을 주장하는 관점이 주목을 끌고 있습니다. 

전자가 중국 북송시대의 시인인 蘇軾의 관점입니다. 

소식은  ‘赤壁賦’에서 “변한다는 점에서 보자면 천지도 일찍이 한 순간도 변치 않을 수 없지만 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보자면 사물과 우리 인간 모두가 다하지 않는(무진) 존재”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선조와 광해군시대 문장가이며 외교가로 이름을 떨친 ‘어우야담’의 저자 柳夢寅(1559~1623)은  「어우집」 ‘無盡亭記’에서 소식의 관점에 문제를 제기합니다.  

“지금 松巖公이 늘그막에 세 칸짜리 작은 정자를 얽어 無盡이라고 편액을 하였으니, 그 뜻은 어디에 근거한 것인가? 만물 가운데 더 없이 장구한 것이 바다와 산이지만 동해가 뽕밭이 되고 태산도 숫돌이 되어 일찍이 한 순간(一瞬)도 변치 않을 수 없다. 그런데 蘇軾은 하나의 儒者이다. 감히 하늘의 사물을 탐내어 강 위와 산 사이의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을 다함이 없는 보고로 여겼으니 또한 이상하지 않은가?”

이처럼 유몽인은 오히려 無盡에 대비되는 一瞬의 관점에 서서, 청풍명월의 불변성과 무진성을 주장한 소식의 관점을 뒤엎고 있습니다. 청풍명물도 불변 무진한 존재가 아니라는 겁니다. 


◆ 자연의 이치, 自强不息

유몽인은 쉼 없이 변화하는 자연의 이치는 自强不息의 개념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음양이 성하고 쇠하는 이치상 끊임없이 변화하고 낳아 길러서 일찍이 잠시도 멈추지 않으니 군자는 그것을 본받아 自强不息함이 마땅하다. 천리에 있어서 자강불식함이 천리를 어기지 않는 것이 되나니....”

이 문장에서 자강불식은 <역경>의 ‘天行健 君子以自强不息’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역경’은 점과 관련된 책으로 평가될 수 있는데, 점과 무관하게 유교의 정신사상으로 세계의 변화에 대한 원리를 설명한 책으로도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늘의 운행이 강건하니, 군자는 이것을 본받아서 스스로 강건하여 멈추지 않는다.”
“Heaven acts with vitality and persistence. In correspondence with this, the superior person keeps himself vital without ceasing.”

‘天行健 君子以自强不息’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우선 天行健, 즉 하늘의 운행이 강건하다는 것은 하늘의 운행이 태만하지 않고 쉬거나 그친 적이 없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즉 우주만물은  고정 불변의 절대적인 실체가 아니라, 역동적으로 변화한다는 겁니다.

또한 ‘君子以’에서, ‘以’는 ‘하늘의 강건한 운행을 따라’, ‘그에 대응하여’, 또는 ‘자연의 이치를 본받아’등으로 해석됩니다.  

‘自强不息’은 스스로 쉬지 않고 힘쓰고 노력한다라는 뜻입니다. 이 문구에서 强은 ‘스스로 강해지다’라는 뜻의 물리적인 ‘강’을 의미하지 않고,  힘쓸 ‘勉’과 같은 뜻을 가지는 말입니다.

결국 ‘군자이 자강불식’은 인간이 하늘의 운행을 본받아 스스로 노력하여 쉬지 않고 힘쓰는 것을 말합니다. 


◆ 군자의 수행의 목표

군자가 하늘의 운행처럼  고정되지 않고 변화해야 한다면  쉼 없이  배우고 힘써야 하는 목표는 무엇일까요?

우선 군자가 변화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修養한다는 의미로, 과거 고정된 자아를 깨고 새로운 자아로 거듭나도록 쉬지 않고 자아를 수양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새로운 자아는, 유교의 관점에 따르면, 仁 禮 義 智의 四德을 몸에 익힌 자아를 말합니다.

여기서 四德의 仁이란 사랑을 뜻하며, 禮의 근간입니다. 義는 사리 분별하는 기준을 말하는 것으로, 智의 기초입니다.   

결국 군자는 사덕을 자아에 담아내도록, 쉬지 않고 몸과 마음을 갈고 닦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대자연의 순환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함없이 굳건한 것처럼, 군자도 인예의지로 무장된 자아로 자신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겁니다. 


◆ 治人, 君子以厚德載物

그런데 군자가 수양에 힘쓴다 해도 修身에만 그치는 자는 군자로 평가될 수 없습니다.  수양은 실천으로 이어져야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군자는 도덕적 수양을 현실에 실현시키는 자를 의미합니다.  ‘君子以自强不息’에 조응하여, ‘君子以厚德載物’이란 말이 나오게 되는 이유입니다.

이 구절은 治人을 강조하는 것으로, “군자는  두터운 덕으로 만물을 실어준다” “the superior person enriches her virtue to sustain all beings.”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즉 군자는 수신 후 치인으로 덕성을 실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인예의지로 새롭게 거듭난 군자는 두터운 덕으로 만물을 생육성장하게 하는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는 겁니다.   


◆ 자연이 품고 있는 이념, ‘自强不息 厚德載物’



주지하다시피  ‘自强不息 厚德載物’은 중국 인재의 산실인 淸華大學의 校訓입니다. 

이 校訓은 소중한 敎訓을 품고 있습니다. 

이 교훈은  장래의 리더로 성장하게 될 학생들은 학문을 배우고 세상을 다스리기 이전에,  쉼 없는 修身을 통해 두터운 덕을 쌓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치인의 선행조건은 수신이라는 겁니다.

이 교훈을 본받는다면, 세상에서 사람의 욕구를 채워주고 지탱해주는  역할을 담당하겠다는 당찬 포부를 가진 자들은, 세상의 일을 담당하기 전에 수신하여 덕을 두텁게 쌓아올려야 합니다. 빵만 던져준다고 치인을 이룬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자연은 쉼 없이 운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연의 이치를 관찰한다면, 사람들은 어떠한 행위보다 앞서 인예의지의 덕을 우선 쌓아야 한다는 깨달음에 이르게 됩니다.  

즉 과거의 자아가 사랑, 사랑에 기반 한 예의, 의로움, 의로움에 근거한 지혜를 담은 자아로 새롭게 변화해 갈 때, 비로소 분별력 있는 지혜가 길러집니다. 나아가 이러한 지혜에 힘입어 만물을 싣는 행동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겁니다. 

담 너머 자연의 풍광을 차경을 통해 실내로 담아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 한국 정치의 목표,  ‘復’, 

쉼 없는 자강불식의 수신의 단계를 무시하고, 소위 ‘세상의 변화’를 위해 자신을 던진다는 교만은  편협한 사고의 일단을 드러내는 것으로, 공동체의 안녕을 해치는 원인으로 지목될 수 있습니다. 

그 실례가 영락한 한국 좌파진영의 일단의 모습입니다. 

젊은 시절 전두환 독재타도를 외치며 공동체 구성원에게 자유를 안겨주겠다는 명분을 내건 좌파 성향의 일부 리더들이 현재에 이르러 개인비리로 사법 처리되어 몰락하는 모습들은 수신 없는 치인은 오히려 공동체 구성원의 행복을 앗아간다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사실 당시의 독재타도도 순수성을 결여한 행동으로 평가됩니다.  운동의 일부 리더들이 내건 민주주의의 회복의 슬로건은  생산 수단을 국유화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목표로 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습니다. 당시 일각에서의 독재와의 싸움은  자유민주주의가 아닌 인민민주주의를 지향하기 위한 싸움의 과정으로 이해되어진 겁니다.)  

즉 인예의지를 수양하지 않은 이들이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무모한 시도는 세상에 이로움을 주는 대신 세상에 분열과 갈등을 조장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공동체의 행복을 위해 행한다는 명분도 실상  개인의 명예와 탐욕을 충족시키는 수단, 자신이 속해 있는 정파의 이익을 실현시키는 도구,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공동체 내부의 안녕만을 바라는 행위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수신이 부재한  치인은 이익의 사유화, 손실의 사회화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치인의 실패로 발생한 국가 내 분열과 정파적 이익에 충실한 정책의 추구로 인한 손실을 국민 모두가 떠안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좌파 진영의 정책들이 그랬습니다. 

좌파 진영의 헤게모니 장악을 위한 검찰개혁의 시도, 소득주도성장정책, 실험된 부동산정책등으로 인해, 국가 공동체는 분열되었고  성장의 잠재력은 고갈되었으며  국민이 감당해야 할 주거의 고통은 심화되었습니다.  

국가 공동체에 깊이 새겨진 이러한 상처들은 좌파진영의 덕을 쌓기 위한 수신의 부재에 기인합니다. 

그러함에도  현재의 좌파진영은 노조에 기반을 둔 노동자의 이익 실현에 이바지하는 전위대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한국 좌파가 진보로 거듭나기 위한 길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노조와 절연하는 겁니다.) 

그렇다보니  좌파진영의 닫힌 공동체에는 단일대오를 추구하는 명령만이 허용될 뿐, 구성원 간의 치열한 토론을 통한 공동체의 변증법적 발전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그곳이 민주주의가 사라진 숨 막히는 공간이 된 이유입니다. 

(이러한 공간으로 다시 돌아가고자 하는 전직 여성의원이 있다고 하는데, 그의 이러한 행위는 쉽게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그가 무얼 위해 정치하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진실된 治人은 폐쇄된 소규모 공동체에서 벗어나  열린 공동체를 추구하여, 소규모 공동체간의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러한 조화의 선행조건은 자아의 덕을 쌓는 것, 즉 수신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 정치의 급선무는  덕을 쌓는 수신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결국 2024 총선의 해, 정치가 추구할 슬로건은 다음의 한마디로 축약됩니다.  

‘復’,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 즉 수신으로 돌아가는 것, 인예의지의 덕성을 쌓는 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한국 정치가 2024년에 추구해야 할 목표인 것입니다.     


#차경  #누정   #자강불식 후덕재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