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한 대학의 교수가 학생들이 제출한 기말 보고서에 성적을 매겼습니다. 그런데 점수를 부여하는 방식이 특이합니다. 보고서를 계단에 던져서 낮은 계단에 떨어진 보고서엔 낮은 점수를, 높은 계단에 떨어진 보고서엔 높은 점수를 매긴 겁니다. 학생들은 교수의 점수 산정 방식에 당연히 분노할 것입니다. 학점이 공정한 절차에 따라 주어진 것이 아니라 교수의 편의에 따라 결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앞의 가상의 사례처럼 게으른 교수는 당연히 없습니다. 이는 절차적 정의(procedural justice)의 중요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절차가 불공정할 경우 사람들은 공정성에 민감해진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임금결정에 있어 공정한 절차에 의해 임금이 결정되었다고 지각할 경우, 노동자들은 낮은 임금일지라도 그가 받는 임금수준이 공정하다고 지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절차가 불공정할 경우, 저임금의 노동자는 불공정성을 강하게 지각합니다. (황규대외) 이처럼 의사결정에 이르는 과정이 얼마나 정의로운가가 공정성을 판단하는 하나의 기준이 됩니다. ◆ 공정성 판단 기준 : 상대적 투입 대 결과 비율 또한 사람들이 공정성을 문제 삼는 경우는 투입대비 결과가 공정한지 여부입니다. 예를
우리는 꿈꾸며 살기위해 태어났다고 합니다. 꿈을 꾸며 살거나 꿈과 가까이 살기를 원합니다. 꿈꾸기의 본질은 변화, change에 있습니다. 현재의 상태인 존재와 목표인 당위간의 갭을 좁히는 변화의 과정이 꿈을 이루는 여정이 됩니다. 그렇다면 변화는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변화의 요소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미국의 하이포인트 대학의 총장이며 경영 컨설턴트인 니도 쿠베인(Nido Qubein)은 그의 저서 <석세스 로드>에서 여섯 가지의 변화 요소, 즉 c, h, a, n, g, e를 제시합니다. ① c는 creativity를 일컫습니다. 변화의 첫 번째 요소는 창의성(creativity)입니다. 불을 때는데 석탄을 필요로 하듯이 창의력을 발휘하기 위해 지식이 필요합니다. 지식은 많이 읽고 많이 볼 때 쌓여 갑니다. 그러므로 도서관, 영화관등은 창의성의 보고라 할 수 있습니다. ② h는 healthy habits를 말합니다. 변화에 잘 대처하려면 건강한 몸을 필요로 합니다. 몸이 건강하면 감성과 지성이 더욱 활발하고 예민해지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몸을 이루기 위한 필수요소로, 균형 잡힌 식습관, 규칙적인 운동, 일과 휴식의 균형, 해로운 쾌락
▶<Wherever you are> sung by Scotty McCreery Wonder are you on the West Coast Top down rodeo driving Maybe up in Colorado You always did love that Rocky Mountain High up in Manhattan Or way out in some cabin in the middle of nowhere Well baby I'll be there 서쪽 해안가를 누비고 있나요 이리저리 신나게 운전하면서 말이에요 어쩌면 콜로라도에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당신은 항상 록키 산맥을 좋아했으니까요 저 위 맨해탄이 아니라면 어느 외딴 곳의 통나무집에서 나오는 길일 수도 있구요 그곳이 어디라도 난 거기에 있을 거예요 Wherever you are, wherever it is Baby it ain't too far Just give me a call or drop me a pin Enough of this damn being apart I'll fill up a tank or buy me a ticket Whatever it takes you know I'm
1988년 서울 올림픽의 470급 요트 경기에서 캐나다의 로렌스 르뮤 선수는 1위와 큰 격차 없이 2위로 순조롭게 레이스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바람이 강하게 불면서 함께 경기에 나선 싱가포르 선수들의 요트가 전복이 되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충분히 금메달을 노려볼 수 있었던 로렌스 르뮤 선수는 전복사고를 발견한 즉시 코스를 이탈하면서 레이스를 포기하고 바다로 뛰어들어 싱가포르 선수들을 구조하고 의무보트가 오기 전까지 싱가포르 선수들을 보호했습니다. 금메달 획득도 기대되었던 로렌스 르뮤 선수의 구조 활동은 유럽 중세의 騎士道(기사도)를 떠올리게 합니다. 곤경에 빠져 있는 약자를 보호하고 승리보다 동료들 간의 우정을 먼저 중요시한 르뮤선수는 분명 중세의 기사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올림픽 경기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뚱딴지 같이 기사도 정신을 왜 말하느냐고 불만을 터트리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올림픽의 표어인 ‘Citius/ Altius/ Fortius’, 즉 ‘보다 빠르게, 보다 높게, 보다 힘차게’처럼, 선수들이 無限(무한)이라는 목표를 향해 열심히 달리는 것이 올림픽의 본질이 아닌가라고 반문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올림픽의 철학은 육체의 강인함만
▶<Firework> sung by Katy Perry Do you ever feel like a plastic bag Drifting through the wind wanting to start again 당신 자신이 바람 속에 떠내려가는 비닐봉지처럼 느껴진 적 있나요 다시 시작하고 싶어요? Do you ever feel so paper thin like a house of cards one blow from caving in 당신 자신이 종이처럼 얇다고 느낀적이 있나요? 한번 훅 불면 우르르 무너지는 카드로 지은 집 처럼요 Do you ever feel already buried so deep Six feets under screams but no one seems to hear a thing 혹시 땅 속 깊이 묻혀버린 듯 한 절망을 느껴본 적 있나요 6피트 밑에서 비명을 질러도 누구도 당신의 비명을 듣지 못한 것 처럼요 Do you know that there’s still a chance for you ‘Cause there’s sparkle in you 당신에겐 여전히 기회가 있다는 걸 아시나요 그건 당신 안에 반짝임이 있어서죠 You j
우리는 풍요는 결핍을 누르고, 강자는 약자를 패퇴시킨다는 상식을 당연히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이러한 상관관계가 깨진 사건을 종종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니발이 이끄는 소수의 카르타고군이 로마 대군을 상대로 승리하였고, 소수의 홍군을 이끈 모택동이 압도적 다수의 백군을 이끈 장개석을 물리쳤습니다. 이처럼 역사에는 별 볼일 없는 약자가 불굴의 강자에 승리를 거두는 상식 밖의 사건이 왕왕 벌어지고 있습니다. 식민지 미국이 식민모국인 영국과 맞서 싸운 독립전쟁도 결핍이 풍요를 이긴 전쟁으로 역사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독립전쟁은 세금을 매기는 과세 권한을 둘러싼 영국과 미국 간의 갈등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식민본국 영국이 식민지 미국이 보유하고 있던 조세에 관한 권한을 영국왕실과 의회가 무시한 겁니다. 미국의 모든 법률적 서류, 신문등에 인지를 붙이게 한 인지세법, 미국으로 수입되는 일상용품에 대해 수입관세를 부과한 타운세드법, 동인도회사가 식민지 미국에 들여오는 차에 면세혜택을 부여받은 茶(차)법등은 식민지들의 동의 없이 영국의회에서 일방적으로 통과시킨 법이었습니다. 이는 식민지들의 영국에 대한 반감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하였습니다. 1774년 7월4일
만족의 쳇바퀴라는 말이 있습니다. 쳇바퀴 위에서 계속 뛰고 있지만 그 쳇바퀴가 같은 속도로 반대방향으로 돌고 있어 뛰는 사람은 그 자리에서 제자리 뛰기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는 소득의 만족도와 여가의 효용이 상쇄되기 때문입니다. 소득이 증가하여 소비의 효용이 높아져도, 노동의 증가로 인한 여가의 감소는 여가의 효용인 정서적 행복을 감소시킵니다. 이는 노동소득이 여가의 대체물 혹은 기회비용이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총 만족도는 불변입니다. 여기서 정서적 행복이란 공동체적 관계의 행복을 말합니다. 친구, 연인, 가족 간의 상호 호혜적인 교류가 가져오는 따뜻함을 일컫습니다. 이것들은 관계를 통해 사랑하고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말합니다. 이처럼 행복은 관계, 즉 사이 ‘between’에서 피어오릅니다. 우리나라의 일인당 GNI는 3만불에 육박하지만, 국민의 행복지수는 저소득 국가들에 비해 낮다고 합니다. 이는 돈을 중시한 나머지 사회적 관계를 희생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는 사회적 인정에 대한 갈망이 공동체의 구성원간의 배려와 사랑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이러한 삶은 소시민들에겐 대단하거나 화려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고만고만한 삶일
“필론이 한번은 배를 타고 여행을 했다. 배가 바다 한가운데서 큰 폭풍우를 만나자 사람들은 우왕좌왕, 배 안은 곧 수라장이 됐다. 울부짖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뗏목을 엮는 사람.....필론은 賢者(현자)인 자기가 거기서 해야 할 일을 생각해 보았다. 도무지 마땅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그 배 선창에는 돼지 한 마리가 사람들의 소동에는 아랑곳없이 편안하게 잠자고 있었다. 결국 필론이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돼지의 흉내를 내는 것 뿐이었다.”(이문열 <필론의 돼지>) 돼지의 관심은 잠자고 여물 먹는 데에 있을 뿐입니다. 필론도 그렇습니다. 폭풍우로 배가 뒤집어 지든 말든, 다른 여행자들이 죽든 말든, 그는 외적인 것에 무관심한 방관자입니다. 필론이 이와 같은 행동을 보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선 현자 필론은 상황을 차가운 이성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상황에 개입해보았자 현실은 바뀔 게 없다고 판단했을 수 있습니다. 세상의 부조리를 비판한다고 해서 세상이 고쳐질 수 있겠는가라는 회의를 품었을 수 있습니다. 또한 필론의 방관자적 행동은 공감의 부족에서 비롯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는 가치로 우정, 사랑, 동료의식등이
“중요한 것은 먹이보다 날기 그 자체이다. ” 갈매기 조나단은 별난 갈매기입니다. 그가 좋아한 것은 먹는 일이 아니라 나는 일이었습니다. 보통 갈매기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 낚싯배 주위에서 물고기와 빵조각을 차지하려 달려듭니다. 조나단은 저공 비행, 한계 속도 돌파등 최고의 날기를 연습했습니다. 이처럼 조나단이 나는 이유는 엉뚱했습니다. 먹기 위함이 아니라, 공중에서 무엇을 배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여느 갈매기들은 날기를 ‘고기잡이배에서 던져주는 빵 부스러기를 얻기 위한 이동 수단으로 삼는데, 조나단은 배움의 대상으로 보았습니다. 별난 조나단은 결국 갈매기부족에서 추방당합니다. ◆ 조나단이 날기를 통해 얻고자 한 것 조나단의 특이한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선, 그가 비행술을 익히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적을 찾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조나단이 먹이보다 날기를 통해서 얻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요? 부족에서 쫓겨난 조나단은 배움의 열정을 채워 줄 스승 치앙을 만납니다. 치앙을 통해서 순간이동을 배우고 나는 일이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신념을 지니게 됩니다. “난다는 것은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파닥이며 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Dream> sung by Priscilla Ahn I was a little girl alone in my little world who dreamed of a little home for me I played pretend between the trees and fed my house guests bark and leaves, and laughed in my pretty bed of green 어릴 적 나는 나만의 작은 세계에 홀로 사는 작은 소녀였어요 그 소녀는 자기만의 작은 집을 꿈꾸었죠. 마치 나무들 사이에 있는 것처럼 놀기도 하고 손님들을 나무껍질과 나뭇잎으로 대접하기도 했죠 예쁜 녹색 침대에서 크게 웃기도 했어요 I had a dream that I could fly from the highest swing I had a dream 나는 꿈을 꿨어요. 가장 높이 날 수 있을 거라는 꿈이요 나는 꿈을 꿨어요. Long walk in the dark through woods grown behind the park I ask God who I’m supposed to be The stars smile down on me God answe
어떤 삶이 행복한 삶일까요? 고대 그리스인들은 행복을 ‘좋은 삶’으로 정의 내렸습니다. 여기서 좋은 삶이란 주관적인 만족을 줄 뿐만 아니라 객관적인 공적가치를 담보하고 있는 삶을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개인이 특정한 삶으로 인해 행복을 느낀다고 하여도, 공적으로 가치 있는 삶을 살지 못한다면, 그 삶은 행복한 삶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극단적인 예로, 상습적인 음주가 주관적인 만족을 준다하여도, 알콜 중독의 삶은 공적으로 행복한 삶으로 평가되지 못하였습니다. 이처럼 행복은 주관적 느낌과 객관적 공적 가치를 함께 갖추어야 하는 좋은 삶을 의미하였습니다. ◆ 에우다이모니아, 잘 살기, 그리고 세 가지 종류의 삶 고대 그리스인의 행복한 좋은 삶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로 정의됩니다. 에우다이모니아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열거한 삶의 세 가지 종류의 검토로 시작됩니다. 사람들은 쾌락을 추구하는 삶, 정치적 삶, 그리고 철학적 혹은 관조적 삶을 영위합니다. 먼저 쾌락을 추구하는 삶은 감각을 추구하는 삶을 말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언급하는 감각적으로 즐기는 진정한 삶은 파괴적인 모습을 띠고 있지 않는 중용의 삶을 말하였습니다. 쾌락의 향유
일본정부와 우익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부정하는 논리의 하나로 매춘패러다임을 내걸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들은 해외에서 일하는 창기인 ‘가라유키상’의 일종으로, 자유의사에 따라 돈벌이를 하는 자들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일본군 위안부들은 성노예가 아니라는 것이다. 2007년 6월 14일 <워싱턴포스트>에 실린 ‘더 팩츠’라는 제목의 글에 이러한 주장이 펼쳐진다. “일본군에 편입된 위안부는 성노예가 아니다. 세계적으로 인가를 받은 흔하디 흔한 공창제도에서 일하던 여성들이었다. 위안부 대부분을 영관급 장교보다 훨씬 수입이 많았으며 위안부의 대우는 양호했다는 증언도 많다.” 정말 그럴까? ◆ 성노예란? 성노예란 무엇을 말하는 걸까? 노예는 상품과 다름없다. 다른 사람의 소유물로서, 소유자의 통제에 놓이게 되된다. 그러므로 노예의 노동과 행동은 자유의사와는 무관하게 소유자의 강압에 의해 결정된다. 대표적인 노예의 예가 상품노예이다. 1787년 노예를 실은 배가 항로를 이탈하여 선박의 물이 부족하게 되자, 선주는 노예들을 바다에 던져버린다. 이후 선주는 노예를 잃은 것에 대해 보험금을 청구한다. 즉 노예는 화물에 해당한다는 것이다.(오승진) 최근 노예의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