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쩜 이렇게 우리 아가는 예쁠까?” 우리 아기는 천사 같다며 엄마는 아기의 볼에 입을 맞춥니다. “우리 아가, 정말 잘했어요.” 엄마는 한 발 한 발 뒤뚱거리며 걷는 아기에게 힘을 북돋아 줍니다. “우리 아가, 잘 커라” 엄마는 다정한 손길로 아기를 안고 젖을 먹입니다. 이렇게 아기는 엄마의 따뜻함을 느끼며 평화롭게 성장해 갑니다. 아기와 엄마와의 공감적 관계를 통해 아기의 자기는 발달합니다. 엄마가 아기의 욕구를 채워주는 에너지원으로 기여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아기에 대한 엄마의 공감적 돌봄이 없어 아기와 엄마와의 관계가 사랑스럽게 연결되지 못한다면, 아기는 욕구를 충족시킬 길이 없습니다. 이러한 자기 결함을 지닌 아기가 성인으로 성장하게 되면, 그는 채워지지 못한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대상을 찾아 지속적으로 방황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에 접하는 중독, 성 도착등은 부모 혹은 양육자의 공감적 돌봄의 결여에서 비롯된다는 분석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이러한 ‘자기’(self)와 ‘자기대상’(selfobject)과의 관계를 통해 ‘자기 심리’를 분석한 학자는 오스트리아 출신 정신분석학자인 하인즈 코헛(Heinz Kohut)입니다. ◆자기와 자기대상 코헛
평창동계올림픽은 갈등과 불신으로 닫힌 남북 간 대화의 문을 여는 계기가 되고 있습니다. 북한 응원단, 예술단, 고위급 대표단의 방남은 남북한의 갈등을 해소하고 평화와 화합의 물꼬를 트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남쪽을 방문하여 남기고자 한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요? 이는 그들이 공통으로 강조한 표현을 통해 유추할 수 있습니다. 방남한 북한 응원단, 예술단, 고위급 대표단이 공통으로 언급한 주제어는 ‘우리는 하나’라는 문구였습니다. 북한 응원단은 10일 관동 아이스하키 센터에서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을 응원하면서 “우리는 하나다.”를 연호했습니다. 또 11일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 주재로 열린 북한 고위급 대표단 환송 만찬에서, 김여정 부부장은 “하나 되는 그날을 앞당겨 평양에서 반가운 분들 다시 만나길 바란다.”고 건배사를 했습니다. 김영남최고회의위원장은 “어제 아이스하키 경기에서 ‘우리는 하나다’는 구호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며 소회를 밝혔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라는 문구는 단순한 응원구호나 건배사 이상으로 진정성 있는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북한 예술단의 서울 공연에서도 ‘남북한이 하나’라는 메시지가 도드라졌습니다. 11일 오후 서울 국립극장
권력의 나르시시스트들은 유혹자들입니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친절하고 상냥한 척 하지만, 속으로 사람들을 자신들의 발 아래 두고자 합니다. 권력의 나르시시스트들은 착취자입니다. 이들은 사람들을 교묘히 이용하며 그들의 욕망을 추구합니다. 소모품으로 사용된 사람들의 행복을 밟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때문에 온화하고 지혜로워 보이는 가면 밑에 감추어 있는 이들의 마음은 실상 얼음처럼 차갑습니다. 꿈 하나로 견뎌 나가는 작은 사람들은 더 이상 순진한 어린아이로 머물 수 없습니다. 언제까지 권력의 나르시시스트들의 욕망의 도구로 전락한 채, 아첨하고 저자세로 살 수 없습니다. 그들이 파놓은 권력의 미사여구들을 간파하고 그들이 놓아 둔 망상의 덫에 걸려들지 않는 것은 이런 자각에서 출발합니다. 왜곡된 권력의 나르시시즘들이 활개치고 다니는 세상은 이제 바뀌어야 합니다. 힘없는 이들은 이용당하고 착취당하는 도구가 아니라 존엄한 영혼을 지닌 존재라는 개념이 널리 통용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는 지금까지 권력 밑에서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이들이 억눌린 수치심을 떨치고 일어설 때 가능합니다. ‘그래봤자 소용없어. 넌 무능한 자야.’라고 나르시시스트들이 우리들을
요즘 여의도 정치권의 핵심 논쟁은 권력구조 개편을 개헌의 핵심 내용으로 다루어야 하는지 여부입니다. 야당은 “권력구조 개편이 배제된 개헌은 속 빈 강정”(김동철 국민의당 원내대표), “지방분권을 말하는 것은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라며 제왕적 대통령제를 우선적으로 손 보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야당은 정부 실패의 직접적인 원인을 막강한 대통령제 시스템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개헌의 핵심내용도 정부형태의 변경에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정부형태의 개헌등은 장기적으로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반론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는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위험과 협상 난망의 ‘사악한 문제’에 대한 협력적 거버넌스의 필요성 때문입니다. ◆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위험 “오크나무에 앉아 있는 딱새를 매가 발견하고 낚아 채 붙잡았다. 딱새는 매에게 자신은 허기를 채우기에 너무 작으니 좀 더 큰 새를 찾는 게 좋을 거라고 설득하며 자신을 놓아달라고 간곡히 애원했다. 매가 말했다. ‘지금 당장 눈에 띄지도 않는 새를 잡으려고 내 손에 잡힌 먹이를 놓아준다면, 나는 아마 바보겠지.”(이솝우화) 이솝우화에 나오는 이 이야기의 매는 왜 작은 새를 놓
# 어떤 한 대학의 교수가 학생들이 제출한 기말 보고서에 성적을 매겼습니다. 그런데 점수를 부여하는 방식이 특이합니다. 보고서를 계단에 던져서 낮은 계단에 떨어진 보고서엔 낮은 점수를, 높은 계단에 떨어진 보고서엔 높은 점수를 매긴 겁니다. 학생들은 교수의 점수 산정 방식에 당연히 분노할 것입니다. 학점이 공정한 절차에 따라 주어진 것이 아니라 교수의 편의에 따라 결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앞의 가상의 사례처럼 게으른 교수는 당연히 없습니다. 이는 절차적 정의(procedural justice)의 중요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절차가 불공정할 경우 사람들은 공정성에 민감해진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임금결정에 있어 공정한 절차에 의해 임금이 결정되었다고 지각할 경우, 노동자들은 낮은 임금일지라도 그가 받는 임금수준이 공정하다고 지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절차가 불공정할 경우, 저임금의 노동자는 불공정성을 강하게 지각합니다. (황규대외) 이처럼 의사결정에 이르는 과정이 얼마나 정의로운가가 공정성을 판단하는 하나의 기준이 됩니다. ◆ 공정성 판단 기준 : 상대적 투입 대 결과 비율 또한 사람들이 공정성을 문제 삼는 경우는 투입대비 결과가 공정한지 여부입니다. 예를
우리는 꿈꾸며 살기위해 태어났다고 합니다. 꿈을 꾸며 살거나 꿈과 가까이 살기를 원합니다. 꿈꾸기의 본질은 변화, change에 있습니다. 현재의 상태인 존재와 목표인 당위간의 갭을 좁히는 변화의 과정이 꿈을 이루는 여정이 됩니다. 그렇다면 변화는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변화의 요소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미국의 하이포인트 대학의 총장이며 경영 컨설턴트인 니도 쿠베인(Nido Qubein)은 그의 저서 <석세스 로드>에서 여섯 가지의 변화 요소, 즉 c, h, a, n, g, e를 제시합니다. ① c는 creativity를 일컫습니다. 변화의 첫 번째 요소는 창의성(creativity)입니다. 불을 때는데 석탄을 필요로 하듯이 창의력을 발휘하기 위해 지식이 필요합니다. 지식은 많이 읽고 많이 볼 때 쌓여 갑니다. 그러므로 도서관, 영화관등은 창의성의 보고라 할 수 있습니다. ② h는 healthy habits를 말합니다. 변화에 잘 대처하려면 건강한 몸을 필요로 합니다. 몸이 건강하면 감성과 지성이 더욱 활발하고 예민해지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몸을 이루기 위한 필수요소로, 균형 잡힌 식습관, 규칙적인 운동, 일과 휴식의 균형, 해로운 쾌락
1988년 서울 올림픽의 470급 요트 경기에서 캐나다의 로렌스 르뮤 선수는 1위와 큰 격차 없이 2위로 순조롭게 레이스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바람이 강하게 불면서 함께 경기에 나선 싱가포르 선수들의 요트가 전복이 되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충분히 금메달을 노려볼 수 있었던 로렌스 르뮤 선수는 전복사고를 발견한 즉시 코스를 이탈하면서 레이스를 포기하고 바다로 뛰어들어 싱가포르 선수들을 구조하고 의무보트가 오기 전까지 싱가포르 선수들을 보호했습니다. 금메달 획득도 기대되었던 로렌스 르뮤 선수의 구조 활동은 유럽 중세의 騎士道(기사도)를 떠올리게 합니다. 곤경에 빠져 있는 약자를 보호하고 승리보다 동료들 간의 우정을 먼저 중요시한 르뮤선수는 분명 중세의 기사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올림픽 경기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뚱딴지 같이 기사도 정신을 왜 말하느냐고 불만을 터트리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올림픽의 표어인 ‘Citius/ Altius/ Fortius’, 즉 ‘보다 빠르게, 보다 높게, 보다 힘차게’처럼, 선수들이 無限(무한)이라는 목표를 향해 열심히 달리는 것이 올림픽의 본질이 아닌가라고 반문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올림픽의 철학은 육체의 강인함만
우리는 풍요는 결핍을 누르고, 강자는 약자를 패퇴시킨다는 상식을 당연히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이러한 상관관계가 깨진 사건을 종종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니발이 이끄는 소수의 카르타고군이 로마 대군을 상대로 승리하였고, 소수의 홍군을 이끈 모택동이 압도적 다수의 백군을 이끈 장개석을 물리쳤습니다. 이처럼 역사에는 별 볼일 없는 약자가 불굴의 강자에 승리를 거두는 상식 밖의 사건이 왕왕 벌어지고 있습니다. 식민지 미국이 식민모국인 영국과 맞서 싸운 독립전쟁도 결핍이 풍요를 이긴 전쟁으로 역사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독립전쟁은 세금을 매기는 과세 권한을 둘러싼 영국과 미국 간의 갈등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식민본국 영국이 식민지 미국이 보유하고 있던 조세에 관한 권한을 영국왕실과 의회가 무시한 겁니다. 미국의 모든 법률적 서류, 신문등에 인지를 붙이게 한 인지세법, 미국으로 수입되는 일상용품에 대해 수입관세를 부과한 타운세드법, 동인도회사가 식민지 미국에 들여오는 차에 면세혜택을 부여받은 茶(차)법등은 식민지들의 동의 없이 영국의회에서 일방적으로 통과시킨 법이었습니다. 이는 식민지들의 영국에 대한 반감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하였습니다. 1774년 7월4일
만족의 쳇바퀴라는 말이 있습니다. 쳇바퀴 위에서 계속 뛰고 있지만 그 쳇바퀴가 같은 속도로 반대방향으로 돌고 있어 뛰는 사람은 그 자리에서 제자리 뛰기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는 소득의 만족도와 여가의 효용이 상쇄되기 때문입니다. 소득이 증가하여 소비의 효용이 높아져도, 노동의 증가로 인한 여가의 감소는 여가의 효용인 정서적 행복을 감소시킵니다. 이는 노동소득이 여가의 대체물 혹은 기회비용이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총 만족도는 불변입니다. 여기서 정서적 행복이란 공동체적 관계의 행복을 말합니다. 친구, 연인, 가족 간의 상호 호혜적인 교류가 가져오는 따뜻함을 일컫습니다. 이것들은 관계를 통해 사랑하고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말합니다. 이처럼 행복은 관계, 즉 사이 ‘between’에서 피어오릅니다. 우리나라의 일인당 GNI는 3만불에 육박하지만, 국민의 행복지수는 저소득 국가들에 비해 낮다고 합니다. 이는 돈을 중시한 나머지 사회적 관계를 희생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는 사회적 인정에 대한 갈망이 공동체의 구성원간의 배려와 사랑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이러한 삶은 소시민들에겐 대단하거나 화려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고만고만한 삶일
“필론이 한번은 배를 타고 여행을 했다. 배가 바다 한가운데서 큰 폭풍우를 만나자 사람들은 우왕좌왕, 배 안은 곧 수라장이 됐다. 울부짖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뗏목을 엮는 사람.....필론은 賢者(현자)인 자기가 거기서 해야 할 일을 생각해 보았다. 도무지 마땅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그 배 선창에는 돼지 한 마리가 사람들의 소동에는 아랑곳없이 편안하게 잠자고 있었다. 결국 필론이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돼지의 흉내를 내는 것 뿐이었다.”(이문열 <필론의 돼지>) 돼지의 관심은 잠자고 여물 먹는 데에 있을 뿐입니다. 필론도 그렇습니다. 폭풍우로 배가 뒤집어 지든 말든, 다른 여행자들이 죽든 말든, 그는 외적인 것에 무관심한 방관자입니다. 필론이 이와 같은 행동을 보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선 현자 필론은 상황을 차가운 이성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상황에 개입해보았자 현실은 바뀔 게 없다고 판단했을 수 있습니다. 세상의 부조리를 비판한다고 해서 세상이 고쳐질 수 있겠는가라는 회의를 품었을 수 있습니다. 또한 필론의 방관자적 행동은 공감의 부족에서 비롯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는 가치로 우정, 사랑, 동료의식등이
“중요한 것은 먹이보다 날기 그 자체이다. ” 갈매기 조나단은 별난 갈매기입니다. 그가 좋아한 것은 먹는 일이 아니라 나는 일이었습니다. 보통 갈매기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 낚싯배 주위에서 물고기와 빵조각을 차지하려 달려듭니다. 조나단은 저공 비행, 한계 속도 돌파등 최고의 날기를 연습했습니다. 이처럼 조나단이 나는 이유는 엉뚱했습니다. 먹기 위함이 아니라, 공중에서 무엇을 배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여느 갈매기들은 날기를 ‘고기잡이배에서 던져주는 빵 부스러기를 얻기 위한 이동 수단으로 삼는데, 조나단은 배움의 대상으로 보았습니다. 별난 조나단은 결국 갈매기부족에서 추방당합니다. ◆ 조나단이 날기를 통해 얻고자 한 것 조나단의 특이한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선, 그가 비행술을 익히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적을 찾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조나단이 먹이보다 날기를 통해서 얻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요? 부족에서 쫓겨난 조나단은 배움의 열정을 채워 줄 스승 치앙을 만납니다. 치앙을 통해서 순간이동을 배우고 나는 일이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신념을 지니게 됩니다. “난다는 것은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파닥이며 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어떤 삶이 행복한 삶일까요? 고대 그리스인들은 행복을 ‘좋은 삶’으로 정의 내렸습니다. 여기서 좋은 삶이란 주관적인 만족을 줄 뿐만 아니라 객관적인 공적가치를 담보하고 있는 삶을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개인이 특정한 삶으로 인해 행복을 느낀다고 하여도, 공적으로 가치 있는 삶을 살지 못한다면, 그 삶은 행복한 삶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극단적인 예로, 상습적인 음주가 주관적인 만족을 준다하여도, 알콜 중독의 삶은 공적으로 행복한 삶으로 평가되지 못하였습니다. 이처럼 행복은 주관적 느낌과 객관적 공적 가치를 함께 갖추어야 하는 좋은 삶을 의미하였습니다. ◆ 에우다이모니아, 잘 살기, 그리고 세 가지 종류의 삶 고대 그리스인의 행복한 좋은 삶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로 정의됩니다. 에우다이모니아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열거한 삶의 세 가지 종류의 검토로 시작됩니다. 사람들은 쾌락을 추구하는 삶, 정치적 삶, 그리고 철학적 혹은 관조적 삶을 영위합니다. 먼저 쾌락을 추구하는 삶은 감각을 추구하는 삶을 말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언급하는 감각적으로 즐기는 진정한 삶은 파괴적인 모습을 띠고 있지 않는 중용의 삶을 말하였습니다. 쾌락의 향유
일본정부와 우익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부정하는 논리의 하나로 매춘패러다임을 내걸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들은 해외에서 일하는 창기인 ‘가라유키상’의 일종으로, 자유의사에 따라 돈벌이를 하는 자들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일본군 위안부들은 성노예가 아니라는 것이다. 2007년 6월 14일 <워싱턴포스트>에 실린 ‘더 팩츠’라는 제목의 글에 이러한 주장이 펼쳐진다. “일본군에 편입된 위안부는 성노예가 아니다. 세계적으로 인가를 받은 흔하디 흔한 공창제도에서 일하던 여성들이었다. 위안부 대부분을 영관급 장교보다 훨씬 수입이 많았으며 위안부의 대우는 양호했다는 증언도 많다.” 정말 그럴까? ◆ 성노예란? 성노예란 무엇을 말하는 걸까? 노예는 상품과 다름없다. 다른 사람의 소유물로서, 소유자의 통제에 놓이게 되된다. 그러므로 노예의 노동과 행동은 자유의사와는 무관하게 소유자의 강압에 의해 결정된다. 대표적인 노예의 예가 상품노예이다. 1787년 노예를 실은 배가 항로를 이탈하여 선박의 물이 부족하게 되자, 선주는 노예들을 바다에 던져버린다. 이후 선주는 노예를 잃은 것에 대해 보험금을 청구한다. 즉 노예는 화물에 해당한다는 것이다.(오승진) 최근 노예의 정
우리는 어떤 노래를 듣고 Jazzy하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재즈필은 어떤 느낌일까요? 이는 ‘흔들리다 (swing)’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흔들리다’는 이리저리 쏠려 안정감을 상실하고 있다는 것으로, 균형에서 벗어나 있는 상태입니다. 이런 일탈의 분위기는 재즈의 음계와 리듬에 묻어납니다. ◆블루노트와 스윙 재즈의 독특한 음계는 블루노트(blue note)입니다. 3음, 7음 혹은 5음을 반음 내린 블루노트는 정상 음계에서 벗어나 우울한 불협화음의 필링을 자아냅니다. 재즈 비평가 김현준은 그 예를 동요 ‘산토끼’로 설명합니다. 「산토끼 토끼야」에서 ‘솔 미 미 솔 미 도’를 ‘솔 미 미♭솔 미 도’ 혹은 ‘솔 미 미 솔 미 도♯’로 변주하면, 노래는 블루지한 느낌을 줍니다. 또 재즈만의 특성을 설명하는 리듬감은 스윙입니다. Jazzy한 리듬은 절로 어깨를 들썩이며 박수를 치게 하거나, 흥에 겨워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흔들도록 합니다. 이러한 재즈의 스윙감은 클래식과 달리 엇박자에서 비롯됩니다. 클래식은 강박이 우선입니다. 예를 들어 4분의 4박의 ‘강 약 중강 약’처럼 비트는 1박과 3박에 옵니다. 하지만 재즈는 약박이 먼저입니다. ‘치치, 츄,
You looks are laughable, un-photographable Yet, you’re my favorite work of art. 당신의 모습은 별 볼 일 없고, 사진에 멋지게 나오지 않지만 당신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예술 작품이지요 Stay little valentine, stay! Each day is Valentine’s Day. 내 곁에 있어줘요, 작은 발렌타인 매일매일이 발렌타인 데이지요 https://youtu.be/jvXywhJpOKs 사랑에 빠지면 이런 감정일까요? 당신이 비록 그리스 조각 같은 용모는 아닐지라도, 헤어스타일은 바꾸지 말라고 애원합니다. 지금 그대로의 당신이 바로 미술 작품이라고 매일 매일 고백합니다. ‘My funny valentine’은 중의적인 느낌을 줍니다. 곡의 가사는 열정적인 사랑을 노래하는데, 리듬과 선율은 느리고 우울한 단조음계입니다. 심지어 곧 헤어질 것 같은 슬픈 감정을 들게 합니다. 그래서인지 계속 만나겠다는 건지, 사랑하지만 무슨 사연이 있어떠난다는 건지 종잡을 수 없습니다. 이 곡은 1937년 초연된 뮤지컬 ‘Babes in Arms’에 나오는 노래로, 영화화된 뮤지컬 ‘사운드 오브 뮤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