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풍요는 결핍을 누르고, 강자는 약자를 패퇴시킨다는 상식을 당연히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이러한 상관관계가 깨진 사건을 종종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니발이 이끄는 소수의 카르타고군이 로마 대군을 상대로 승리하였고, 소수의 홍군을 이끈 모택동이 압도적 다수의 백군을 이끈 장개석을 물리쳤습니다. 이처럼 역사에는 별 볼일 없는 약자가 불굴의 강자에 승리를 거두는 상식 밖의 사건이 왕왕 벌어지고 있습니다. 식민지 미국이 식민모국인 영국과 맞서 싸운 독립전쟁도 결핍이 풍요를 이긴 전쟁으로 역사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독립전쟁은 세금을 매기는 과세 권한을 둘러싼 영국과 미국 간의 갈등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식민본국 영국이 식민지 미국이 보유하고 있던 조세에 관한 권한을 영국왕실과 의회가 무시한 겁니다. 미국의 모든 법률적 서류, 신문등에 인지를 붙이게 한 인지세법, 미국으로 수입되는 일상용품에 대해 수입관세를 부과한 타운세드법, 동인도회사가 식민지 미국에 들여오는 차에 면세혜택을 부여받은 茶(차)법등은 식민지들의 동의 없이 영국의회에서 일방적으로 통과시킨 법이었습니다. 이는 식민지들의 영국에 대한 반감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하였습니다. 1774년 7월4일
만족의 쳇바퀴라는 말이 있습니다. 쳇바퀴 위에서 계속 뛰고 있지만 그 쳇바퀴가 같은 속도로 반대방향으로 돌고 있어 뛰는 사람은 그 자리에서 제자리 뛰기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는 소득의 만족도와 여가의 효용이 상쇄되기 때문입니다. 소득이 증가하여 소비의 효용이 높아져도, 노동의 증가로 인한 여가의 감소는 여가의 효용인 정서적 행복을 감소시킵니다. 이는 노동소득이 여가의 대체물 혹은 기회비용이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총 만족도는 불변입니다. 여기서 정서적 행복이란 공동체적 관계의 행복을 말합니다. 친구, 연인, 가족 간의 상호 호혜적인 교류가 가져오는 따뜻함을 일컫습니다. 이것들은 관계를 통해 사랑하고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말합니다. 이처럼 행복은 관계, 즉 사이 ‘between’에서 피어오릅니다. 우리나라의 일인당 GNI는 3만불에 육박하지만, 국민의 행복지수는 저소득 국가들에 비해 낮다고 합니다. 이는 돈을 중시한 나머지 사회적 관계를 희생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는 사회적 인정에 대한 갈망이 공동체의 구성원간의 배려와 사랑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이러한 삶은 소시민들에겐 대단하거나 화려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고만고만한 삶일
“필론이 한번은 배를 타고 여행을 했다. 배가 바다 한가운데서 큰 폭풍우를 만나자 사람들은 우왕좌왕, 배 안은 곧 수라장이 됐다. 울부짖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뗏목을 엮는 사람.....필론은 賢者(현자)인 자기가 거기서 해야 할 일을 생각해 보았다. 도무지 마땅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그 배 선창에는 돼지 한 마리가 사람들의 소동에는 아랑곳없이 편안하게 잠자고 있었다. 결국 필론이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돼지의 흉내를 내는 것 뿐이었다.”(이문열 <필론의 돼지>) 돼지의 관심은 잠자고 여물 먹는 데에 있을 뿐입니다. 필론도 그렇습니다. 폭풍우로 배가 뒤집어 지든 말든, 다른 여행자들이 죽든 말든, 그는 외적인 것에 무관심한 방관자입니다. 필론이 이와 같은 행동을 보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선 현자 필론은 상황을 차가운 이성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상황에 개입해보았자 현실은 바뀔 게 없다고 판단했을 수 있습니다. 세상의 부조리를 비판한다고 해서 세상이 고쳐질 수 있겠는가라는 회의를 품었을 수 있습니다. 또한 필론의 방관자적 행동은 공감의 부족에서 비롯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는 가치로 우정, 사랑, 동료의식등이
“중요한 것은 먹이보다 날기 그 자체이다. ” 갈매기 조나단은 별난 갈매기입니다. 그가 좋아한 것은 먹는 일이 아니라 나는 일이었습니다. 보통 갈매기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 낚싯배 주위에서 물고기와 빵조각을 차지하려 달려듭니다. 조나단은 저공 비행, 한계 속도 돌파등 최고의 날기를 연습했습니다. 이처럼 조나단이 나는 이유는 엉뚱했습니다. 먹기 위함이 아니라, 공중에서 무엇을 배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여느 갈매기들은 날기를 ‘고기잡이배에서 던져주는 빵 부스러기를 얻기 위한 이동 수단으로 삼는데, 조나단은 배움의 대상으로 보았습니다. 별난 조나단은 결국 갈매기부족에서 추방당합니다. ◆ 조나단이 날기를 통해 얻고자 한 것 조나단의 특이한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선, 그가 비행술을 익히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적을 찾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조나단이 먹이보다 날기를 통해서 얻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요? 부족에서 쫓겨난 조나단은 배움의 열정을 채워 줄 스승 치앙을 만납니다. 치앙을 통해서 순간이동을 배우고 나는 일이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신념을 지니게 됩니다. “난다는 것은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파닥이며 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어떤 삶이 행복한 삶일까요? 고대 그리스인들은 행복을 ‘좋은 삶’으로 정의 내렸습니다. 여기서 좋은 삶이란 주관적인 만족을 줄 뿐만 아니라 객관적인 공적가치를 담보하고 있는 삶을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개인이 특정한 삶으로 인해 행복을 느낀다고 하여도, 공적으로 가치 있는 삶을 살지 못한다면, 그 삶은 행복한 삶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극단적인 예로, 상습적인 음주가 주관적인 만족을 준다하여도, 알콜 중독의 삶은 공적으로 행복한 삶으로 평가되지 못하였습니다. 이처럼 행복은 주관적 느낌과 객관적 공적 가치를 함께 갖추어야 하는 좋은 삶을 의미하였습니다. ◆ 에우다이모니아, 잘 살기, 그리고 세 가지 종류의 삶 고대 그리스인의 행복한 좋은 삶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로 정의됩니다. 에우다이모니아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열거한 삶의 세 가지 종류의 검토로 시작됩니다. 사람들은 쾌락을 추구하는 삶, 정치적 삶, 그리고 철학적 혹은 관조적 삶을 영위합니다. 먼저 쾌락을 추구하는 삶은 감각을 추구하는 삶을 말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언급하는 감각적으로 즐기는 진정한 삶은 파괴적인 모습을 띠고 있지 않는 중용의 삶을 말하였습니다. 쾌락의 향유
일본정부와 우익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부정하는 논리의 하나로 매춘패러다임을 내걸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들은 해외에서 일하는 창기인 ‘가라유키상’의 일종으로, 자유의사에 따라 돈벌이를 하는 자들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일본군 위안부들은 성노예가 아니라는 것이다. 2007년 6월 14일 <워싱턴포스트>에 실린 ‘더 팩츠’라는 제목의 글에 이러한 주장이 펼쳐진다. “일본군에 편입된 위안부는 성노예가 아니다. 세계적으로 인가를 받은 흔하디 흔한 공창제도에서 일하던 여성들이었다. 위안부 대부분을 영관급 장교보다 훨씬 수입이 많았으며 위안부의 대우는 양호했다는 증언도 많다.” 정말 그럴까? ◆ 성노예란? 성노예란 무엇을 말하는 걸까? 노예는 상품과 다름없다. 다른 사람의 소유물로서, 소유자의 통제에 놓이게 되된다. 그러므로 노예의 노동과 행동은 자유의사와는 무관하게 소유자의 강압에 의해 결정된다. 대표적인 노예의 예가 상품노예이다. 1787년 노예를 실은 배가 항로를 이탈하여 선박의 물이 부족하게 되자, 선주는 노예들을 바다에 던져버린다. 이후 선주는 노예를 잃은 것에 대해 보험금을 청구한다. 즉 노예는 화물에 해당한다는 것이다.(오승진) 최근 노예의 정
우리는 어떤 노래를 듣고 Jazzy하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재즈필은 어떤 느낌일까요? 이는 ‘흔들리다 (swing)’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흔들리다’는 이리저리 쏠려 안정감을 상실하고 있다는 것으로, 균형에서 벗어나 있는 상태입니다. 이런 일탈의 분위기는 재즈의 음계와 리듬에 묻어납니다. ◆블루노트와 스윙 재즈의 독특한 음계는 블루노트(blue note)입니다. 3음, 7음 혹은 5음을 반음 내린 블루노트는 정상 음계에서 벗어나 우울한 불협화음의 필링을 자아냅니다. 재즈 비평가 김현준은 그 예를 동요 ‘산토끼’로 설명합니다. 「산토끼 토끼야」에서 ‘솔 미 미 솔 미 도’를 ‘솔 미 미♭솔 미 도’ 혹은 ‘솔 미 미 솔 미 도♯’로 변주하면, 노래는 블루지한 느낌을 줍니다. 또 재즈만의 특성을 설명하는 리듬감은 스윙입니다. Jazzy한 리듬은 절로 어깨를 들썩이며 박수를 치게 하거나, 흥에 겨워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흔들도록 합니다. 이러한 재즈의 스윙감은 클래식과 달리 엇박자에서 비롯됩니다. 클래식은 강박이 우선입니다. 예를 들어 4분의 4박의 ‘강 약 중강 약’처럼 비트는 1박과 3박에 옵니다. 하지만 재즈는 약박이 먼저입니다. ‘치치, 츄,
You looks are laughable, un-photographable Yet, you’re my favorite work of art. 당신의 모습은 별 볼 일 없고, 사진에 멋지게 나오지 않지만 당신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예술 작품이지요 Stay little valentine, stay! Each day is Valentine’s Day. 내 곁에 있어줘요, 작은 발렌타인 매일매일이 발렌타인 데이지요 https://youtu.be/jvXywhJpOKs 사랑에 빠지면 이런 감정일까요? 당신이 비록 그리스 조각 같은 용모는 아닐지라도, 헤어스타일은 바꾸지 말라고 애원합니다. 지금 그대로의 당신이 바로 미술 작품이라고 매일 매일 고백합니다. ‘My funny valentine’은 중의적인 느낌을 줍니다. 곡의 가사는 열정적인 사랑을 노래하는데, 리듬과 선율은 느리고 우울한 단조음계입니다. 심지어 곧 헤어질 것 같은 슬픈 감정을 들게 합니다. 그래서인지 계속 만나겠다는 건지, 사랑하지만 무슨 사연이 있어떠난다는 건지 종잡을 수 없습니다. 이 곡은 1937년 초연된 뮤지컬 ‘Babes in Arms’에 나오는 노래로, 영화화된 뮤지컬 ‘사운드 오브 뮤직’을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공했을 때, 승패는 뻔한 듯이 보였다. 나폴레옹은 계속해서 러시아 안으로 밀고 들어갔고 어렵지 않게 모스크바를 점령하였다. 하지만 침략군을 맞이한 것은 불에 탄 도시였다. 러시아인들은 도시에 불을 지르고 떠난 것이다. 나폴레옹은 불에 탄 도시와 혹독한 겨울로 퇴각 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러시아 군대는 퇴각하는 나폴레옹 군대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전쟁의 승리는 결국 나폴레옹을 상대한 노련한 적장, 미하일 쿠투조프에게 돌아갔다. 쿠투조프의 勝因(승인)은 나폴레옹에겐 찾을 수 없었던 융통성 있는 전술이었다. 나폴레옹은 상황을 무시하고 통념에 근거한 고정적인 전술을 사용하였다. 그는 상대편의 움직임에 신경 쓰지 않았고, 오로지 프랑스군의 신속한 진군과 모스크바 점령만 생각했다. 반면 쿠투조프는 나폴레옹의 진군 상황에 맞춰 전략을 세웠다. 시기적으로 겨울이고 병참선에서 멀리 떨어진 상황에서 나폴레옹의 침공은 패배로 끝날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에 따라 그는 군을 일시 퇴각 시킨 후, 공격의 기회를 노린 것이다. 이처럼 쿠투조프는 상황에 맞는 관점과 전술을 구사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 손자병법 : 장수는 주어진
두 고슴도치가 춥고 외로워 서로를 안았습니다. 그런데 침이 상대의 상처를 날카롭게 찔렀습니다. 이들은 너무 아파서 다시 떨어졌습니다. 둘의 포옹은 외로움을 달래기보다 과거의 상처를 덧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리한 침을 가진 고슴도치들은 외롭고 힘들어도 다시 서로에게 다가가기를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날카로운 침들은 서로 상대의 상처들을 예리하게 공격합니다. 불안, 열등감, 낮아진 자존감, 두려움, 혼란등 상처들이 침에 찔려 다시 도지거나 악화됩니다. 외로움은 오히려 아픔만을 가져올 뿐입니다. 하지만 찬바람이 몸과 마음을 움츠려 들게 하면, 따뜻한 품이 다시 그립습니다. 혼자보다 둘이 있을 때 더 행복했다는 기억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각자가 우리의 삶에서 걸어 나가 버리기 전에, 다시 원래로 돌아가고 싶어합니다. (관련기사http://www.ondolnews.com/news/article.html?no=1048) 그리고 내가 돌출한 사건만으로 상대를 판단한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상대의 상처와 아픔을 헤아려 보기보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전통만을 지키려고 한 것은 아닌지 뒤늦은 반성을 하기도 합니다. 전통이 말하는 문자의 직역에만 매달려 해석의 유연
사람들은 현실에서 땅에 발을 붙이고 살지만 꿈에서 공중을 떠돕니다. 초현실주의의 대표적 화가인 르네 마그리트(1898~1967)는 이와 같은 우리의 환상을 ‘골콘다 (Golconda)’에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림에서 검정코트에 중절모를 쓴 신사들이 공중을 떠돌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신사들이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서로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엇갈리게 하고 있습니다. 마그리트는 골콘다에서 경쟁사회의 삭막함을 말하고자 했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골콘다는 원래 다이아몬드 광산이 있었던 인도의 부유한 도시를 말하는데요, ‘富’의 은유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림에서처럼 사람들은 땅에 발을 붙이지 않고 부와 신분상승을 쫓아 허공을 헤매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세상의 희소한 부와 지위를 쟁취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고 있습니다. 이는 서로 돕고 살아가는 연대의 고리가 끊어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경쟁사회에서 사람들 간에 시선이 엇갈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생존의 욕구와 땅 위를 날고자 하는 환상이 공동체의 유대를 단지 환상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마그리트의 골콘다를 떠
1905년 미국에 니켈로디언 (Nickelodeon)이라는 영화 전용극장이 등장하였습니다. 니켈로디언은 5센트를 뜻하는 니켈(Nickel)과 극장을 뜻하는 그리스어 ‘오디엄’의 합성어입니다. 극장의 이름이 뜻하듯이, 니켈로디언에서 상영되는 영화들을 약 5센트라는 저렴한 비용만 들이면 누구든지 볼 수 있었습니다. 니켈로디언은 이처럼 경제적 여유가 있는 중산층이상만이 접하는 제한된 공간이 아니라, 누구나 다가갈 수 있는 열린 문화 공간이었습니다. ◆ 니켈로디언의 확산 배경 – 저렴한 관람료, 빠른 프로그램의 교체 니켈로디언은 미국 전역으로 퍼져갑니다. 1907년~1908년에 약 8,000여개의 니켈로디언이 세워졌고, 1908년 ~1909년에 이르면 시골의 작은 지역을 제외하고 미국의 대부분 지역에 니켈로디언이 존재하였습니다. 뉴욕시엔 1906년 4월 니켈로디언이 처음 등장하였는데, 1909년에 약 45만명의 인구에 300~400여개의 극장이 있었습니다. 1910년에 이르면 미국 전역의 도시들에 약 1만여개의 니켈로디언이 성업하였습니다. 일주일에 매주 미국 인구의 약 30%인 2천 6백만명이 극장을 찾을 정도였습니다. 당시 미국에서 니켈로디언이 이렇게 번성한 배경
이 남자, 참 둔해 보입니다. 여자 친구의 속 마음 하나 읽어내지 못하고 그녀가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입니다. ‘난 괜찮아요’라고 하면 ‘그래 그런가 보다’합니다. (관련기사 : < Fine> sung byTayler Buono http://www.ondolnews.com/news/article.html?no=1044) 이 여자도 문제입니다. 괜찮지 않으면서 그냥 괜찮다고 합니다. 대신 ‘부디 행간을 읽어주세요. Please read between the lines.’라는 글자를 얼굴과 이마에 붙이고, 남자가 이 신호를 눈치 채어주길 끝까지 기다립니다. 하지만 이 남자는 결국 무응답. 제풀에 꺾인 여자는 마음의 문을 걸어두려고 합니다. ◆ 방어기제- 부정 그런데 그 남자가 정말 미련한 곰일까요? 사람들은 ‘사실을 왜곡되게 생각하려는 타고난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이런 삐딱한 생각을 하는 이유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장치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외부 공격을 보호하기 위해 다양한 방어기제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 남자는 ‘부정’이라는 방어기제를 사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여자 친구의 욕구와 현실을 자신의 의식에서
2017년 11월에 개봉한 영화 <러빙 빈센트>가 우리 사회에 잔잔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100명의 화가들이 직접 그린 유화애니메이션은 고흐의 외로움을 진정성있게 그리고 있습니다. 영화는 그가 왜 죽었는지를 추적하는 형식으로, 빈센트의 광기와 상처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영화 말미에 그가 그의 편지에서 천재인 자신을 nobody라 자학하는 장면은 아픔과 동시에 분노를 일게 합니다. 그의 죽음 이면에 세상의 오만과 편견이 드리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somebody'들은 자신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nobody'들에게 비정상의 낙인을 찍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울타리를 높이 치고 '불청객'들의 진입을 저지합니다. 빈센트 반 고흐도 세상의 지배적 패러다임의 희생자였습니다. 세상이 정한 범주를 벗어난 이들은 쓸모없는 존재, 냄새나는 존재로 천대받습니다. 규범의 일탈자는 광기로 재단되기 십상입니다. 고흐도 이와 같은 비정상으로 인해 조롱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는 심지어 아이들에게 돌팔매를 당할만큼세상으로부터 소외되었습니다. 고흐의 걸작 <별이 빛나는 밤>에서 싸이프러스가 고고히 별을 향해 힘차게 솟구치고 있습니다. 비록 nobo
‘현실은 꿈이 두려워서 깨어나는 곳’이라고 프로이트는 주장합니다. [1] 슬라베니아 출신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이를 “우리는 꿈으로부터 도피하여 다시 현실로 돌아간다.”로 해석합니다. 교착상태에 빠진 현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꿈 속으로 도피하지만, 환상의 끔찍함에 다시 현실로 돌아간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지젝은 “꿈은 현실을 충분히 견딜 만큼 강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현실은 그들이 마주치는 꿈을 충분히 다시 견딜 만큼 강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 된다.”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프로이트의 언명의 충실한 수행자는 데이비드 린치 감독입니다. 린치는 그의 영화 속에서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며 현대인들의 혼돈과 불안을 기발한 상상력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카프카의 <변신>, 현실과 환상의 세계는 관계 이데올로기를 폭로 ‘영화계의 카프카’라는 수식어를 얻고 있는 린치의 철학은 카프카의 <변신>을 통해 잘 드러나 있습니다. [2] “어느 날 아침의 일이었다. 뒤숭숭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레고르 잠자’는 잠자리 안에서 한 마리의 큼직한 독벌레로 변한 자신을 깨달았다.” 변신의 시작은 그레고르 잠자라는 인간이 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