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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노블레스 오블리주 ] 고위층은 있으나 상류사회가 없다




서양미술사상 최고의 조각가 로댕의 작품 중에 ‘칼레의 시민’ 동상이 있다. 이 작품은 프랑스 칼레시의 청사 앞에 지금도 서 있다. 

이 작품은 14세기 발발한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에서 기인한다. 프랑스의 칼레시는 기근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에드워드 3세에 맞서 11개월간 버티다, 결국 항복한다.  시민 대표 6명을 교수형으로 처형한다는 항복 조건도 붙었다. 

그렇다면 누가 여섯 명에 포함되어야 하는가? 제비를 뽑는다든지 희생자를 지명하여야 하는가?  

죽음의 공포가 시민들을 엄습하고 있는 가운데, 한 시민이 죽기를 자청하고 나섰다. 그는 에스타슈라는 이 도시의 가장 부유한 시민이었다. 그를 뒤이어, 시장, 의사, 법률가,  교수등이 당당하게  자발적으로 죽고자 하였다. 

죽음을 자원한 6명 영웅들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왕비의 탄원과  그들의 희생정신에 감탄하여, 영국왕 에드워드 3세는 이들을 모두 사면해주었다. 

자신을 희생하고자 했던 지도층 시민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시민들의 목숨을 구하고 도시의 정신과 혼을 지킨 것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사회지도층(noblesse)이 지녀야 할 도덕적 의무(oblige)를 의미한다. 부, 권력, 명성에는 응당 책임이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귀속적 지위 뿐만 아니라 획득적 지위를 지니고 있는 사회지도층의 책임을 의미한다. 

귀속적 지위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본래 의미인 ‘귀족은 의무를 가진다’라는 말과 연관되어 있다. 여기서 귀족은  개인의 노력의 결과나 업적이 아닌  계승된 신분에 따라 주어지는 귀속적 지위이다.   부모가 귀족이면 자식도 대물림으로 귀족의 지위를 얻게 되는 것이다. 예컨대 영국의 처칠수상은 말보로 공작의 9대손이었다. 

획득적 지위는 자신의 노력과 업적으로  얻어지는 지위를 말한다. 

따라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상은 경제적 측면에서  재벌들과 대기업가, 고위직 측면에서 고위정치인, 고위관료, 학자 교수등 전문 지식인, 판검사등의 전문직업인, 저명인사를 말한다. 

이에 더 범위를 넓혀 자신의 노력으로 사회지도층이 되고자 한다면, 국민 모두가 잠재적인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게 된다. 


◆ 리세스 오블리주(Richess oblige)

노블레스 오블리주에서  구체적인 실천의 범위를 좁힌다면 부자들의 사회적 책임이라 불리는 리세스 오블리주가 단연 주목된다. 

우리나라에도 부자들이 사회적 의무를 다하여 그들의 나눔과 봉사의 정신을 실천한 이들이 적지 않다. 

부자의 의무를 성실히 이행한 조선시대의 양반가문으로는 전남 구례의 雲鳥樓의 유씨 집안을 들 수 있다. 운조루는 영조 때 삼수부사를 지낸 유이주가 세운 99칸 집이다. 

이 운조루에는 특별난 쌀뒤주가 있었다.  통나무 속을 파내어 만든 커다란 뒤주는 가족용 뒤주보다 몇 배로 큰 규모였다. 

이 큰 뒤주의 밑 부분에는 他人能解 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이 말은 다른 사람도 뒤주를 열수 있다는 의미로, 누구든지 필요하다면 주인의 허락 없이도 쌀을 퍼가라는 뜻이다. 이 덕분에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과 지리산 일대의 민초들이 끼니를 해결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경주 최씨 가문은 12대 만석꾼이었다. 이 집안은 “재산은 만석을 넘게 모으지 말라. 흉년에는 다른 사람의 전답을 사들이지 말라,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는 등의 원칙을 지켰다. 최씨 집안은 보릿고개가 닥치면 집안 식구들에게 쌀밥을 먹지 못하게 했고, 은수저도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재산이 한해 만석을 넘으면 소작료를 낮추어 주었다. 

이항복의 후손들인 이회영 6형제도 일제강점기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대표적 인물이다.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역임한 이시영의 형인 이회영은 작위를 내리겠다는 일제의 회유를 물리치고 전 재산을 팔아 만주로 향한다. 

만주에서 이회영 일가는 독립군 양성소인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10년 동안 3000명의 독립군을 길러냈다. 여기서 배출된 독립군들이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맹활약을 하였다. 


△ 미국의 기부문화 

현대의 리세스 오블리주의 형태는 기부이다. 

‘부자인 채로 죽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사회의 도움 없이 돈을 벌 수 없었기에 재산을 사회에 돌려주는 것은 당연하다.’ 이는 미국 철강왕 카네기의 말이다. 

워렌 버핏은 ‘축구에서 아버지가 유명한 센터포드라고 해서 그 자리를 자식에게 물려줄 수 없다’면서 자기 재산의 85%를 자선재단에 기부하였다. 

이처럼 미국은 기부의 토양과 정신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다. 미국의 대재산가들은  평소에 일반 시민처럼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대학과 의료, 미술관, 도서관, 후진국 지원 사업을 위해 자신들의 재산을 기부하고 있다.  


◆ 대제국 로마의 붕괴 원인은?

로마인의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에 의하면, 지성은 그리스인, 체력은 켈트인과 게르만인, 기술력은 에트루리아인, 경제력은 카르타고이보다 뒤떨어진 로마인이 제국을 건설한 힘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였다. 

로마의 귀족, 노블레스는 전쟁이 일어나면 수레에 돈을 싣고 경쟁적으로 국가에 갖다 바쳤다. 또한 고향에 도서관을 짓고, 공중 목용탕을 세우고, 다리를 놓았다. 

이런 로마가 망한 이유는 그들이 성공한 원인이 쇠퇴하였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로마 대제국은 사치스런 목욕탕으로 망하기 시작했다.’고 지적된다. 망하기 직전 당시 귀족들은 사회에 대한  책임 대신, 연일 연회로 흥청댔다. 

귀족들이 과거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미덕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탐욕에 빠져들면서 쇠망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송복교수는 한국에  “고위층은 있으나 상류사회가 없다.”고 지적하며, 亢龍有悔를 강조한다. 이 말은  부귀영달이 극도에 달한 사람은 쇠퇴할 염려가 있으므로 행동을 삼가하여야 한다는 뜻이다. 

국민들과 고락을 함께하지 않는 사회지도층은 단지 고위층일 뿐, 그들은 진정한 ‘귀족’이 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