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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일반

[일본의 식민지근대화론?]조선, 일본의 초기 자본 확대재생산에 결정적 기여




일본 산케이신문은 지난해 9월22일 칼럼에서 “교학사의 새 교과서가 일본의 통치시대에 대해 억압과 착취만으로 보는 암흑사관을 부정하고 일제 지배하에서도 한국사회가 발전했다고 기술하는 등 한국의 공식사관이 무엇보다도 싫어하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채택했다”며 일본의 한국근대화에 대한 기여를 강조하였다.

하지만  실제로 조선은   선진자본국가들에 비해 걸음마 단계였던 일본의 자본주의를  확장시키고 독점자본을 공고히 하는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조선이 없었다면 일본의 선도적인 자본축적은 아마도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안병직교수의 초기(1968년) 논문에 의하면, 일본금융독점자본주의 상품 및 자본투하시장으로서 한국의 중요성과, 일본독점자본주의의  식량 및 원료공급지로서 한국이 일본자본주의 발달에 혁혁한 기여를  하였다. 


일본 경제와 무역의 구분 (1868-1945)

<일본무역정람>에 의하면, 1868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경제와 무역은 5단계로 구분된다.

첫째 단계는 일본자본주의의 초창기의 무역으로서 1868-1893년까지의 기간이다. 일본은 원시자본축적을 수행하는 한편, 식민지의 약탈무역을 위하여 식민지획득전쟁을 준비하던 시기이다. 

무역상품의 구조를 보면 소비재이든 생산재이든 자본주의상품을 선진자본주의 제국으로부터 수입한다는 종속적 형태를 취하였다. 그리고 선진자본주의상품을 조선등으로 중계하였다. 

둘째단계는 자본주의 확립기의 무역으로서 1894-1904년에 이르는 시기이다. 일본의 산업혁명의 수행기이다. 

이 시기는 서구자본주의에 대한 종속적형태를 다소 탈피하면서 1894년의 청일전쟁, 1904년의 노일전쟁등 제국주의정책을 감행하였다. 선진자본주의에 대해서는 섬유제품을 중심으로 하는 소비재를 수출하고 생산재를 수입한다는 무역구조의 종속적형태와 식민지에 대해서는 자본재를 수출하고 식량 및 원료를 수입하는 제국주의적 형태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셋째단계는 독점단계로의 이행으로부터 1차 세계대전 종 까지의 무역으로서 1904년에서부터 1918년까지의 시기이다. 

세계적 불황기에 직면하여 독점체의 맹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본은 동시기에 18억圓의 외국자본을 도입한다. 

또한 식민지로의  자본수출이 본격화되었다. 1906년의 남만주철도주식회사설립칙령, 1910년의 조선병합등이 행해졌다. 

일본은 이처럼 자본주의성립 이후 채 10년도 경과하기 전에 독점단계로 이행하였다. 이러한 배경은 공업을 위한 국내시장이 좁아 일본자본가들이 초과이익을 실현 할 수가 없게 되고, 그 결과  일본독점자본가들이  외국시장을 강력히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넷째단계는 전후공황과 그 회복기의 무역이며 1919년으로부터 1936년에 이르는 시기이다. 1930~1936년은 특히 세계공황으로부터의 회복기이다. 

선진자본주의국가들은 1923년부터 서서히 회복하여 전후의 상대적 안정기에 들어섰다. 유럽의 상품이 아시아 시장에 복귀하자 전쟁 중에 구축하여 둔 일본상품시장은 급속히 붕괴되었다. 수출은 정지 상태와 다름없었으며, 1927년은 금융공황에 직면하였다. 공황타개를 위하여 금 해금을 하고, 거액의 正貨(금화)를 수출해야했다. 

 회복기에 있어서는 독점운동의 강화 및 산업통제가 강화되었다. 국내에서 대자본가들은 공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생산제한, 판매 및 가격협정, 수출협정등의 카르텔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시기의 무역은 과감한 덤핑정책을 실시하여 수출부진을 만회하려하였다. 특히 만주사변, 중일전쟁등으로 일본독점자본의 초과이익의 시장을 창출하는 시도를 하게된다. 수출에 기계, 화학제품의 비중이 크게 증대하였다. 

다섯째 단계는 제2차세계대전과 무역의 국가통제기이며, 1937년부터 1945년까지이다. 국제수지에 있어서 선진자본주의와의 무역은 이 시기에 계속무역적자를 보였고, 식민지국가와의 무역은 흑자를 보였다. 이러한 사실은 일본은 아직도 선진자본주의국가들에는 의존관계에 있어 군수물자,전략물자를 이들 나라들로부터 수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신에 식민지국가에서는 자본수출이 활발히이루어졌다. 


▣일본의 상품, 자본시장으로서의 조선 

 
▶일본으로부터의 상품수입 

1910~1936년에 이르기까지 일본총수출의 대조선수출비율의 변동과정을 보면 1916~1918년의 그것은 일본총수출의 대조선수출비율이 4.7%에 불과하였으나1934년에는 21.5%로 상승하였다.

전기에 일본의 섬유제품의 대조선수출액은 일본총섬유제품 수출액의 10%내외를 점유하였으나, 조선총수입액의 30-40%였다. 
 

▶일본으로부터의 자본수입 

 1차 대전중 교전국의 전쟁 수요를 통하여  급진적으로 발달하였던 일본자본주의 경제는 종전 후 대외무역의 부진과 전쟁 중 과잉 투자했던 일본기업이 침체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해외진출이 절실히 요구되었다. 

이러한 일본자본가들은 한국을 대상으로 유휴자본을 투자하고 공장을 설립하여 불경기를 타개하고자 했다. 1920년 회사령의 철폐는 이와 같은 일본자본주의 요구에 의한 결과였다.  

회사령의 철폐와 1910년의 이후 관세법의 철폐로 일본과 동일한 관세법이 적용되어 1920년대에는 한국내에 근대기업회사가 다수 건설될 수 있었다. 1920년 현재 한국 내의 기업 회사는 544개사, 자본금 1억 8,283만여원이었던 것이 1929년에는 회사 수 1763사, 자본금 3억 1620만여원으로 증가하였다. 

회사령 철폐이후 한국에 건설된 공업의 대부분은  한국의 공업화를 추진하기위한 것이 아니라, 1차 대전후 경제적 불황을 타개하기 위해 일본국내의 영세잉여자본이 한국에 진출하여 판로를 개척한 것이었다.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은 일본경제에 큰 타격을 주어  도시 실업자가 증가하고 농촌경제가  붕괴되었다.  파업 소작쟁의가 빈번히 일어나 사회불안이 증대하였다.  

일본독점자본주의는 만성적 불황을  타개하고자 식민지 한국에 대한 자본수출을 구체화였다.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을 도발하고 식민지 한국을 대륙침략의 병참기지로 삼고 경제적 수탈을 강화하였다.  

결국 공황을 타개하는 방법으로 군국주의적 팽창을 택한 일본 독점자본주의는  한국에서의 통치정책을 군수산업을 중심으로 중화학공업을 육성하고, 공업원료 증산을 위한 이른바 南綿北羊의 농업정책을 펼치게된다. 

그 결과 1931년에 조선에 투하된 일본인의 총자본액이 2,128,792천원에 불과하던 것이 불과 10년간에 7,329,592천원으로 급증하였다. 그 구성에 있어서 일본인회사자본의 증가가 두드러졌으며, 1931년에 334,038천원에서 1941년에는 3,940,848천원으로 증가하여 10배 이상의 증가를 보이고 있다. 이는 후기에 생산재의 비중이 상당히 커졌으며, 이는 무역의 주도적 역할을 하였던 것은 일본의 대조선 자본수출이었다. 

일본자본투하시장으로서 조선의 기여율은 두드러진다.  일본광물 및 동제품의 수출총액 중에서 대조선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을 보면 1922~24에는 평균 25.5%에 불과하였으나, 1934-1936년간에는 42.3%까지 상승하였다. 기계류에서는 그 비중은 유사하였으나, 그 절대액은 1910년의 4,520,661원에서 1934년에는 181,310,000에 달했다. 

결국 금속, 금속제품, 기계류, 광물의 조선으로의 수출이   일본수출의 30% 내외을 차지하고 있었다. 



▣ 식량, 원료 공급지로서의 조선 

고전적 식민지무역의 본질은 식민모국이 식민지로부터 식량 및 원료를 끊임없이 수탈하여 갔다는 사실이다. 이 논리는 일본과 조선과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일본식량 공급지로서의 조선 

조선米의 대일수출은  일본식량문제에 혁혁한 기여를 하였다.  조선미의 대일본수출량이 일본미곡수입량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10년에는 12.1%에 불과하였지만, 조선에 산미증산계획이 수립된 이후 1922년에는  59.8%, 1934년에는 67.6%에 달하였다. 

이와같이 조선은 일본의 창곡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이는  식민모국이 식민지의 식량을 얼마나 철저하게 수탈하였는가를 보여준다. 


▶원료공급지로서의 조선 

일본은 조선의 농산물 원자재 및 광산물을 수탈하여 갔다. 조선의 광산자원은 비교적 풍부하였다. 일본은 선진자본주의국들의 진출을 억제하기 위하여 1915년에 조선광업령을 발포하여 외국인의 신규광업취득권을 금지하고, 중요광물증산령, 조선광업령을 내려 광산물의 개발을 적극적으로 촉진하였다. 

광산물의 대일본수출이 일본의 광산물 수입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보면 1910년에는 2.3%에 불과하였으나1934년에는 11.5%까지 상승하였다. 하지만 조선광산물총액의 30-50%가 원광대로 일본에 수출된것은 조선이 일본의 원료공급지라는 것을 증명한다 


◆ 조선의 일본 자본주의 발전에의 기여 

일본의 상품 및 자본 투하시장으로서의 조선은 일본에서 창조된 초과이익을 실현시키기 위한 시장으로서 기여를 하였다. 

또한 조선은  일본의 식량 및 원료공급지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일본은  조선의 토지등의 생산수단을 독점하여 조선에서 창조된 초과이익을 일본으로 유출하였다. 

안병직교수는 “ 상품 및 투하자본으로서의 조선을 통해 일본에서 창출된 잉여가치가  실현되고, 그 잉여가치에 의해 조선의  자연자원 및 생산수단이 지배당하게 되었다.”라고 지적했다. 

또한  안교수는 “일본의 조선의 원료, 식량의 지배는 조선의 자연자원 및 생산수단의 강제적 지배에 의한 잉여가치의 착취과정이다.”라고 강조했다. 즉 일본자본가의 조선 자연자원 및 생산수단의 지배 및 초과이익의 착취과정이 조선식민지의 역사라는 것이다. 

결국  일본 자본운동의 탈출구로서 조선이 결정적 기여를 함으로서 일본 자본축적과 자본주의 확대재생산에 공헌하게 된다. 조선이 없었다면 일본 자본주의 비약적인 발전은 없었을 것이다. 

아래의 이론은 조선과 일본의 관계에서도 적절히 적용된다. 

 「선진자본주의 국내에 소수 독점재벌이 형성되어 그들은 국내시장을 완전히 독점하게 되고, 자본의 자유로운 경쟁을 회피한다. 국내에서 투자기회를 발견하지 못하는 과잉자본이 축적되며 소비자를 발견하지 못하는 잉여생산물이 존재한다. 

자본가들은 이러한 경제적 모순을 식민지적 약탈전쟁과 식민지에로의 자본수출에서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에, 고도 자본주의의 대외적 특질은 식민지에로의 자본수출에 있다. 이러한 식민지에로의 자본수출은 자본재의 수출만을 동반하는 것이 아니며, 많은 소비재의 수출을 동반하게 된다.」 

결국 일본이 주장하는 ‘식민지근대화론’의 그 본질은  ‘식민지에 있어서 자본주의 건설은 선진자본주의 문명제국이 봉건 비 문명제국에게 문화적 혜택을 부여하기 위한 물적 토대의 구축이라기보다, 선진자본주의제국 소수 독점자본가들의 물질적 요구’인 것이다. 

그리고 조선이 일본 자본가들의 초과이윤을 보장해주기 위한 물질적 토대의 건설에 기여 함으로서, 일본 독점가들의 지속적인 확대 재생산을 가능하게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