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공감하는 존재”(Homo sympathicus).
아담 스미스가 『도덕감정론』에서 제시한 인간상은, 이익을 계산하는 합리적 존재인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 와 달리,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고, 감정을 동일시하며, 내면의 ‘공정한 관찰자’를 통해 자신을 성찰하는 통합적 주체였습니다.
이러한 세 가지 층위의 공감—머리의 이해(인지), 가슴의 연민(정서), 양심의 성찰(도덕)—이 조화롭게 작동하는 리더십이 구현될 때, 우리 공동체는 ‘공정한 관찰자의 침묵’을 깨고, 머리로는 합리성을, 가슴으로는 연민을, 양심으로는 공정을 구현하는 ‘호모 심파티쿠스’의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스미스가 말하고자 한 것은 시장경제를 움직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라, 사회를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사실입니다.
◆ 인지적 공감과 공감 결여
① 인지적 공감 (Cognitive Empathy)
인지적 공감은 타인의 감정을 머리로 이해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즉, 인지적 공감 능력이 있는 사람은 상황을 논리적으로 분석하기 때문에 타인의 감정과 상황에 정서적으로 동화되지 않습니다.
예컨대, 상사가 직원의 과로 상태를 파악하고 그 스트레스를 마음으로 함께 느끼지는 않더라도, “이 직원은 과로로 힘들어하고 있다”고 이해하고 근무 시간을 조정해 준다면, 이 상사는 인지적 공감 능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정치적 사례로는, 2004년 태풍 ‘매미’ 피해 당시 고건 국무총리가 피해 상황의 심각성을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체계적인 복구 계획을 지시한 것이 인지적 공감의 실천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 국가정보자원관리원의 전산실이 불타며 병원 예약, 행정 서비스 등 모든 공공 시스템이 마비된 상황에서, 9월 28일 오전 이재명 대통령이 비상대책회의를 주재하며 복구를 지시한 것은 인지적 공감의 사례로 평가될 수 있습니다.
대통령이 예능방송에 출연하여 K-푸드를 홍보한 것도 인지적 공감의 연장선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② 인지적 공감의 결여
반면, 인지적 공감의 결여는 타인의 입장·생각·정서를 이해하거나 파악하지 못하는 결함을 말합니다. 즉, 타인의 감정이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사회적 신호(표정·말투 등)를 읽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예컨대, 인지적 공감이 부족한 사람은 “왜 그렇게까지 사람들이 나에게 화가 났는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 사람 참 눈치가 없다”, “상황 파악이 안 된다”고 말합니다.
또 상사가 직원의 과도한 업무 부담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왜 제시간에 못 끝냈나?”라고 비판하며 추가 업무를 부과한다면, 그 상사는 인지적 공감 능력이 결여된 사람입니다.
③ 인지적 공감 결여형 리더
인지적 공감이 결여된 리더는 상황 이해 능력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들은 타인의 감정이 왜 발생했는지를 ‘머리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상황을 눈치채지 못하니, 의사결정이나 발언에서 부적절한 타이밍이나 맥락 부재의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예컨대, 장례 기간이나 직후에 경제 활성화를 강조하거나 성과 중심 홍보를 이어가는 것은 부적절한 타이밍에서 맥락을 인지적으로 읽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리더 개인의 잘못이라기보다, 그에게 의사결정을 위한 정보를 공급하는 참모 조직이 맥락 파악을 못한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 정서적 공감과 공감 결여
① 정서적 공감 (Affective Empathy)
정서적 공감은 타인의 감정을 자신의 감정처럼 직접 느끼고 공유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이는 흔히 감정적 공명(emotional resonance) 또는 감정이입(empathic concern) 으로 설명됩니다.
감정적 공명이란 상대의 기쁨이나 슬픔이 그대로 전이되어 함께 웃고 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타인의 감정을 마음으로 공유하고, 그들의 기쁨이나 고통을 함께 느끼는 상태입니다.
예를 들어, 친구가 가족의 상실로 깊은 슬픔에 빠져 있을 때, 함께 눈물을 흘리며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은 정서적 공감의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이는 감정적 공명을 통해 상대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는 행위입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동료가 프로젝트 실패로 좌절했을 때, 그 실망감에 공명하며 “정말 힘들었겠다.”라고 위로한다면, 이는 정서적 공감의 실천입니다.
정치적 사례로는, 2004년 태풍 ‘매미’ 피해 당시 고건 국무총리가 피해 현장을 찾아 주민들과 포옹하며 눈물을 나눈 장면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공감은 단순한 위로의 제스처가 아니라, 국민의 고통에 대한 감정적 동조로 평가됩니다.
이처럼 정서적 공감은 타인의 감정 상태에 정서적으로 연결되어 유대감·위로·지지 등의 즉각적 도움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감정에 치우쳐 객관적 판단이 흐려지거나, 특정 대상에게만 과도하게 공감하는 편파적 감정 편향을 초래할 수 있다는 한계도 존재합니다.
② 정서적 공감 결여
반대로, 정서적 공감 결여는 타인의 감정을 공유하지 못하거나, 감정적 상황에 기계적·논리적으로만 반응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친구가 애완견의 죽음으로 슬퍼하며 울고 있을 때 “그냥 잊어, 시간 지나면 괜찮아.”라고 무심하게 말하는 것은 타인의 슬픔을 전혀 공유하지 못한 정서적 공감 제로의 발언입니다.
또 직장에서 동료가 업무 스트레스로 눈물을 흘리는데 상사가 “그냥 참고 일해.”라고 말한다면, 이는 동료의 고통을 느끼지 못한 정서적 결여의 전형적인 예입니다.
정치적 맥락에서도 동일한 원리가 작동합니다.
국가적 재난 상황에서 국민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고 부적절한 대응을 하는 참모들은 정서적 공감이 결여된 집단으로 평가됩니다.
이들은 타인의 고통보다 자신의 업적과 정치적 메시지 관리에 더 몰두하는 사람들로 보입니다.
예컨대, 국가전산망 화재 발생(9월 26일) 이후 복구의 골든타임(9월 26~28일) 동안 대통령실이 예능 녹화를 강행한 것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인지적 공감은 작동했으나 정서적 공명은 부재했던 사례로 비판될 수 있습니다.
국민의 불편과 공무원의 부담을 마음으로 느끼지 못한 행위, 즉 정서적 공감 결여의 상징적 장면으로 읽힌다는 것입니다.
◆ 아담 스미스의 ‘공정한 관찰자’와 동감
정서적 공감을 논할 때, 그와 유사한 개념이 바로 아담 스미스(Adam Smith)의 『도덕감정론(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 1759)』에 나오는 ‘동감(sympathy)’**입니다.
스미스가 말한 ‘동감’은 단순히 타인의 감정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감정을 상상적으로 함께 느끼는 능력’을 뜻합니다. 그는 동감을 단순한 감정적 동일시를 넘어, 인지적 이해·정서적 참여·자기반성적 판단까지 포괄하는 인간의 도덕 감정 메커니즘으로 보았습니다.
① 상상(Imagination)
스미스에게서 상상이란, 타인의 처지를 자신의 내면 속에 재현하는 정신적 행위입니다. 즉, 타인의 감정과 상황을 내 마음의 무대 위에 올려놓고, 마치 내가 그 사람인 듯이 느끼는 것입니다.
② 정서적 참여(Emotional Participation)
정서적 참여란 타인의 고통이나 기쁨을 마치 자기 일처럼 느끼는 감정적 반응을 말합니다. 이 단계에서 우리는 단순한 이해를 넘어 감정의 공명(emotional resonance) 을 경험합니다.
즉, 타인의 눈물이 내 마음을 울리고, 타인의 분노가 내 양심을 자극하는 상태입니다.
③ 자기반성적 판단(Reflective Judgment)
스미스 동감의 핵심은 바로 이 자기반성적 판단입니다.
그는 인간이 느끼는 감정의 정당성을 제3자의 시선에서 내면적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때 등장하는 개념이 바로 『도덕감정론』의 중심인 ‘공정한 관찰자(the impartial spectator)’입니다.
공정한 관찰자는 “우리 마음속의 심판자”, 즉 자기 안의 제3자(inner other)입니다. 그는 내 감정과 행동을 객관적 시선으로 바라보며, 그것이 사회적 공정성과 도덕적 책임에 부합하는지를 끊임없이 검증합니다.
④스미스에게 동감이란
이처럼 스미스에게 동감이란 단순히 ‘타인의 감정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내 행동이 타인의 시선에서 어떻게 평가될지’를 상상하며 스스로를 성찰하는 행위입니다.
즉, 정서적 공감과 인지적 공감을 모두 통합한 뒤, 그것을 내면의 도덕 법정에서 조율하는 단계가 바로 ‘공정한 관찰자의 동감’입니다.
이러한 스미스적 동감은 사회 질서의 도덕적 기반으로 작동합니다. 이는 인간의 경쟁과 이익 추구를 넘어, 공익과 책임의 균형을 가능하게 하는 윤리적 메커니즘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공정한 관찰자가 살아 있는 사회에서는, 감정이 정당하고 분노가 절제되며 정의가 복수로 변질되지 않습니다.
◆ ‘공정한 관찰자의 침묵’과 ‘편파적 동감(Partial Sympathy)
①‘공정한 관찰자의 침묵’
이러한 스미스의 동감의 맥락에서 보면, 국가전산망 복구 중 희생된 공무원이 사망한 지 사흘 만에 대통령이 출연한 예능이 방영된 사건은 ‘공정한 관찰자의 침묵’에 해당합니다.
이 경우 문제는 단순히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감정을 내면의 공정한 시선으로 검증하지 않았다는 점, 즉 도덕적 자기성찰의 부재가 본질입니다.
만약 대통령의 참모진과 리더십 내부에 ‘공정한 관찰자’가 작동하고 있었다면, 그들은 이렇게 자문했을 것입니다.
“지금 이 행위가 국민의 눈에는 어떻게 비칠까?”
“애도의 시간에 대통령의 미소는 국민 정서에 온당한가?”
그러나 그들은 ‘K-푸드 홍보’라는 논리적 명분에 갇힌 채, 그 논리의 울타리 밖으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곧 도덕 감정의 결여, 즉 스미스가 말한 ‘공정한 관찰자의 침묵’입니다.
② 선택적 감정과 ‘편파적 동감(Partial Sympathy)’
더 나아가 정부·여당이 한편으로는 ‘내란 프레임’을 동원하며 ‘국민의 자유’에 깊이 공감하는 듯한 제스처를 보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희생 공무원에 대한 공적 애도 없이 대통령 예능을 방영한 행위는 명백한 모순입니다. 더불어민주당의 내란프레임이 국민의 기본권 보장보다 이들이 느끼는 위협(예:노상원 수첩)에 대한 복수로 읽혀지는 이유입니다.
이러한 행위는 스미스가 경계한 ‘편파적 동감(partial sympathy)’, 즉 정치적 필요에 따라 도덕 감정을 선택적으로 적용하는 행태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이 사건은 도덕 감정의 선택이 정의의 붕괴를 낳는다는 교훈을 줍니다. 리더와 참모들이 감정을 정치적 의도에 따라 선택적으로 투사하기 시작하면, 정의는 더 이상 공정성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겁니다.
결국 리더와 참모가 도덕적 성찰을 하지 않고, 선택적으로 정의를 투사할 때, 공정한 관찰자는 침묵하고, 사회의 도덕 감정은 붕괴됩니다.
◆ 스미스적 동감의 메커니즘
스미스적 동감의 메커니즘은 다음과 같습니다.
•타인의 고통 인식 (인지적 공감)
↓
감정적 동일시 (정서적 공감)
↓
내면의 공정한 관찰자의 판단 (도덕 감정)
↓
행동적 반응 (정치적 선택과 책임)
결국 스미스의 공감 언어로 보았을 때, 공감의 완성은 감정이 아니라 위 세층의 결합입니다. 이것이 도덕 감정(moral sentiment)입니다.
즉 인지적 공감은 ‘이해의 공감’이고, 정서적 공감은 ‘감정의 공감’이며, 공정한 관찰자의 동감은 ‘도덕의 공감’입니다.
결국 리더십은 이 세 가지가 통합될 때 비로소 완성됩니다. 머리로 국민을 이해하고, 가슴으로 국민을 느끼며, 양심으로 국민을 바라보는 능력, 이것이 아담 스미스가 말한 도덕 감정의 핵심이며, 오늘날의 정치가 잃어버린 ‘공정한 공감의 기술’입니다.
◆ 한국 정치의 공감 실패와 도덕적 공감
이 세 층위의 상호작용은 오늘날 한국 정치가 왜 ‘공정한 공감’에 도달하지 못하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리더와 그 부하들은 상대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상황을 오독합니다. 이로 인해 대화가 단절되고, 논리적 공통점이 사라집니다. (이해의 부재)
또 타인의 감정을 마음으로 느끼지 못하니, 피해 감정과 분노가 정치적 에너지로 동원됩니다. (정서적 결여)
마침내 감정의 정당성을 제3자의 시선으로 판단하는 능력이 사라졌습니다. 그 결과, ‘우리 편의 감정은 무조건 정당하고 상대의 감정은 불순하다’는 편파적 동감이 지배하게 됩니다. 정치 담론은 공정성보다 충성도, 윤리보다 진영 감정에 민감해집니다. (도덕 감정의 부재, 공정한 관찰자의 침묵)
이렇게 감정이 이성을 압도하고, 감정의 정당성을 검증할 공정한 관찰자가 부재한 상황에서, 정치는 필연적으로 선동 중심의 ‘감정 정치’로 기울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공정한 관찰자의 눈으로 본 동감’이 한국 정치에서 작동할 수 없는 구조적 이유입니다.
따라서 한국 정치가 회복해야 할 것은 감정 자체가 아니라, 감정을 다스리는 아담 스미스의 동감의 원리입니다.
국민의 고통을 이해하고 정서적으로 공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감정의 정당성을 내면의 관찰자, 즉 공정한 심판자의 시선으로 성찰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이해가 감정을 압도하고, 도덕이 감정을 다스리며, 리더십이 감정 위에 세워집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공동체는 이해와 분노의 대립을 넘어, 공감과 성찰의 조화를 이루는 ‘보이지 않는 마음의 공동체’로 복원될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의 한국 정치가 추구해야 할 도덕적 공감입니다.
◇베토벤, '비창' 2악장은 숭고하고 따뜻한 위로를 건네는 듯합니다. 타인의 슬픔에 대한 이해(인지), 함께 아파하는 마음(정서),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끌어안는 숭고한 위로(도덕)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곡입니다.타인의 고통을 마주하며 "나라면 어땠을까?"라고 상상하고, "무엇이 진정으로 올바른 행동일까?"를 고민하는 '공정한 관찰자'의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사유의 과정을 음악으로 체험하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