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상스의 피아노 협주곡 제5번은 독특한 샌드위치를 떠올리게 합니다. 샌드위치의 맛은 양쪽 빵과 그 사이를 채우는 속재료에 의해 결정됩니다. 이 작품에서도 1악장과 3악장은 샌드위치의 두 장의 빵, 2악장은 그 사이를 채우는 이질적인 속재료에 해당합니다. 먼저 1악장은 담백하고 고전적인 빵의 맛입니다. 코랄풍의 안정감, 소나타 형식의 균형, 절제된 우아함이 서양 고전음악의 질서를 보여 줍니다. 반대로 2악장은 강렬한 향신료가 들어간 속재료입니다. 누비아의 사랑 노래, 아랍풍 선법, 자바 가멜란을 연상시키는 음향, 나일강의 밤 풍경이 한데 어우러져 서양 협주곡에서는 보기 드문 이국적인 풍미를 만들어 냅니다. 마지막 3악장은 바삭하고 역동적인 또 다른 빵입니다. 토카타풍의 빠른 리듬과 끊임없는 운동성, 피아노의 화려한 타건이 작품을 다시 서양 협주곡의 추진력과 균형 속으로 되돌려 놓습니다. 이 협주곡의 진정한 매력은 세 악장이 모두 같은 맛을 내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양쪽의 빵은 서양 고전음악의 질서와 균형을 유지하지만, 그 사이에는 완전히 다른 문화와 풍경이 담긴 이국적인 속재료가 들어 있습니다. 결국 《이집트》는 고전적인 서양 협주곡이라는 빵 사이에, 이집
◆영화 《경멸》의 줄거리 1950년대 후반, 프랑스에 태동한 누벨바그(새물결)의 기수, 장 뤽 고다르의 영화 《경멸》은 단순한 애정의 상실을 다룬 작품이 아닙니다. 이 영화는 가장 친밀해야 할 부부의 경계가 무너지고, 보호받아야 할 동반자가 나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는 순간 솟아나는 관계의 단절을 해부합니다. 경계 안에서 상대를 존중하고 지켜준다는 대전제가 깨질 때, 가장 가까웠던 배우자는 한순간에 환경으로 밀려나갑니다. 영화 도입부의 침대 장면은 이러한 부부체계의 굳건한 경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카미유가 자신의 발, 다리,가슴, 얼굴을 사랑하느냐고 부위별로 묻고 , 폴이 하나씩 긍정하는 대화는 단순한 육체적 애정 표현이 아닙니다. 이는 두 사람이 서로에게 대체 불가능한 완전한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의식입니다. 이때 두 사람은 자신들과 환경을 가르는 명확하고도 단단한 경계를 확인합니다. 이 경계안에서 두 사람은 특별한 기대를 품게 됩니다. ‘당신은 수많은 타인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닌 내가 지켜주어야 할 사람이며, 나는 당신을 외부 목적의 수단으로 이용하지 않는다’는 무언의 합의가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기대와 긍정의 소통이 영화감독 겸 각본
◆규율의 복제와 일탈: 류와 투란도트의 엇갈린 경로 왜 어떤 사람은 위기 앞에서도 끝까지 자신을 지탱해 온 규율을 반복하고, 어떤 사람은 그 규율의 문법을 깨뜨리고 새로운 질서로 나아가는가. 오페라 《투란도트》는 류와 투란도트라는 상반된 두 인물을 통해 이 질문을 던집니다. 인간은 대개 자신을 형성해 온 규율의 문법을 지키며 살아갑니다. 오랫동안 반복된 규율은 무엇을 욕망해야 하는지, 누구를 섬겨야 하는지, 어떤 감정을 억제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내면의 문법이 됩니다. 그래서 기존의 질서가 흔들릴 때 사람은 자유를 향해 나아가기보다 익숙한 문법을 복원하려 합니다. 규율에 의해 형성된 자아는 새로운 가능성보다 반복을 선택하고, 그 반복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 확인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끝까지 같은 문법을 반복하는 것은 아닙니다. 드물게 자신을 구성해 온 규율의 문법을 깨고 다른 삶의 방식으로 나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전환이 순수한 자기성찰만으로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규율은 이미 자아와 단단히 결합해 있기 때문에, 그것을 흔들기 위해서는 기존 문법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연속적인
오페라 《투란도트》는 수수께끼에 실패한 자를 죽이는 ‘공포의 질서’가 상대의 이름을 알고도 살리는 ‘사랑의 질서’로 전환되는 과정을 그린 작품입니다. 1막에서는 칼라프가 죽음의 법에 스스로 뛰어들고, 2막에서는 투란도트가 독점했던 수수께끼의 권력이 무너지며, 3막에서는 류의 희생을 계기로 폭력의 연쇄가 중단됩니다. ◆주요 인물 투란도트는 구혼자에게 세 가지 수수께끼를 내고, 풀지 못하면 처형하는 중국 황제의 딸입니다. 칼라프는 나라를 잃고 떠도는 타타르의 왕자로, 투란도트의 법에 도전합니다. 류는 티무르를 돌보며 칼라프를 헌신적으로 사랑하는 노예 소녀입니다. 티무르는 폐위된 타타르의 왕이자 칼라프의 아버지입니다. 알툼 황제는 투란도트의 아버지이자 중국의 황제입니다. 핑·팡·퐁은 황실의 세 대신입니다. 반복되는 처형에 지친 관료의 시선을 통해 폭력적 체제가 개인의 일상까지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보여줍니다. ◆막별 서사와 핵심 아리아 (1) 1막 ― 공포의 질서와 개인의 욕망이 충돌하다 1막은 투란도트가 만든 죽음의 법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칼라프와, 그의 생명을 지키려는 류의 사랑이 충돌하는 장입니다. 고대 베이징의 황궁 앞에서 만다린(황제의 칙령을 백성
2026년 예술의전당 오페라 《투란도트》는 힘보다 유연함이 돋보이는 무대로 다가왔습니다. 이번 공연에서 투란도트 역으로 데뷔한 소프라노 서선영은 누적된 발성의 기술적 훈련과 류 역을 통해 축적해 온 성악적 감각을 바탕으로, 오케스트라를 가르는 압도적인 음압과 인물의 복합적인 내면을 함께 그려내며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류에서 투란도트로 서선영의 이번 투란도트 데뷔가 각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그녀가 과거 희생의 아이콘인 류(Liù) 역을 여러 차례 소화해 왔기 때문입니다. 오페라 《투란도트》에서 류와 투란도트는 억압적 체제 안에서 정반대편에 서 있는 인물입니다. 류는 칼라프를 향한 헌신을 끝내 자결로 완성하며, 끝까지 타인을 지키겠다는 윤리적 일관성을 증명합니다. 서선영이 류를 맡아 이 비극적 희생을 서정적이면서도 극적으로 그려낸 경험은 이후 투란도트 해석에도 깊이를 더했습니다. 희생자의 고통을 오래 체화한 성악가가 이제 억압자의 자리에 선다는 점은 단순한 배역 전환을 넘어서는 의미를 지닙니다. 투란도트가 전반부에는 냉혹한 폭군처럼 서 있다가 후반부에는 사랑과 수용의 언어를 받아들이는 인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서선영이 과거 류를 연기하며 익힌 감각은 분명
농장주 존스의 가혹한 착취에 신음하던 동물들은 늙은 수퇘지 메이저의 호소에 따라 혁명을 일으킵니다. 인간을 몰아내고 스스로 노동의 결실을 누리는 평등한 공동체를 건설하는 데 성공하며, 초기에는 그 누구도 특권을 누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복잡한 농장 운영을 위해서는 누군가 계획을 세우고 업무를 조정해야 하는 ‘대리(Delegation)’의 필요성이 대두되었습니다. 결국 글을 읽고 쓸 줄 알며 조직 능력이 뛰어난 돼지들이 지식의 우위를 바탕으로 의사결정권을 위임받게 됩니다. 여기서 정치학의 핵심 질문이 등장합니다. "권력을 쥔 대리자는 과연 끝까지 피대리자(민중)의 이익에 복무하는가?" 동물농장의 돼지들은 이 질문에 부정으로 답합니다. 이들은 점차 우유와 사과를 독점하고, 농가 주택을 차지하며, 인간의 침대에서 잠을 자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농장 전체를 위해 불가피하다"고 포장되었던 작은 예외와 특권들은 시간이 지나며 지배계급의 고착화된 생활 양식으로 변질됩니다. 결국 대리자인 돼지들은 피대리자인 일반 동물들과 완전히 다른 계급적 위치에 서게 됩니다. 표면적으로는 여전히 "모든 동물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실질적으로는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
보완수사권 폐지는 ‘수사·기소 분리’와 ‘검찰개혁의 완성’이라는 기표로 제시됩니다. 이 기표가 공식적으로 전달하는 의미는 검찰권의 남용을 막고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기표의 밑바닥에는 다른 기의가 놓여 있습니다. 일부 86세대 급진세력과 이들의 후예인 신세대 진보좌파세력은 검찰을 단순한 형사사법기관이 아니라, 민중의 이익과 구조적으로 대립하는 기득권 권력으로 봅니다. 이런 인식에서는 보완수사권도 시민을 보호하는 제한적 기능이 아니라, 검찰에 남겨진 기득권의 잔여 권력으로 해석됩니다. 이러한 해석은 1980년대 운동권의 사회구성체 논쟁과, 그 진단에 기초한 변혁론에서 출발합니다. 이후 모순론과 통일전선 전략이 이 틀과 결합했습니다. 여기에 군사독재 시기 공안수사와 정치사건 기소 경험이 더해지면서, 검찰은 ‘민중의 적’이자 ‘기득권의 법적 무기’라는 상징으로 굳어졌습니다. 그 연결 과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회구성체론은 한국 사회의 지배구조를 진단했습니다. 변혁론은 그 지배구조를 유지하는 세력과 국가기구를 변혁의 대상으로 배치했습니다. 모순론과 통일전선 전략은 그 세력들을 주요 적대의 상대편에 놓았습니다. 공안수사와 기소의 현실
기득권 해체를 내세운 86세대 정치 엘리트의 검찰개혁 담론은 권력의 실제 이동 경로를 추적하는 순간 뼈아픈 자기모순에 빠집니다. 검찰이라는 기존 기득권을 약화했지만, 그 권력이 시민에게 돌아가지 않고 정치권력과 경찰이라는 또 다른 권력으로 이동했다면 그것은 기득권 해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는 기존 권력의 주인과 위치만 바꾼 기득권 재편입니다. 물론 검찰개혁의 명분 자체는 정당합니다. 수사권과 기소권을 함께 행사해 온 검찰의 권한을 통제하고, 폐쇄적인 조직문화를 쇄신하며, 정치적 중립성과 책임성을 높이는 일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개혁의 명분이 정당하다고 해서 개혁 주체까지 자동으로 정의롭고 오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개혁의 칼을 쥔 세력 역시 이미 강력한 기득권이라는 점입니다. 86세대 엘리트들은 정치권과 시민사회, 학계와 공공기관, 언론과 문화계를 촘촘하게 연결하는 광범위한 권력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민주화운동의 경험과 세대적 연대를 바탕으로 공천과 임명, 자문과 담론 생산의 통로를 오랫동안 점유해 왔습니다. 이러한 구조는 과거 소련의 특권 지배집단을 설명한 노멘클라투라와 닮아 있습니다. 검찰 내부의 폐쇄적 인사
◆노멘클라투라 이후: 엘리트는 사라지는가, 다른 모습으로 재편되는가 노멘클라투라는 단순한 관료 명단이 아닙니다. 본래는 공산당이 임명권을 행사하는 핵심 직위와 후보자 명단을 뜻했지만, 정치학적으로는 혁명 또는 체제 전환의 엘리트가 핵심 직위와 자원 배분권을 장악하고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굳어지는 구조를 설명하는 개념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이 체제는 세 가지 축으로 작동합니다. 첫째는 핵심 직위를 통제하는 인사 충원 체계입니다. 둘째는 여러 기관을 연결하며 사람과 정보, 자리와 자원을 배분하는 인적 네트워크입니다. 셋째는 혁명 엘리트가 자신의 역사적 정당성을 이용해 특권을 재생산하는 새로운 계급의 형성입니다. 한국에서도 이러한 구조는 일부 86세대 정치·시민사회 엘리트의 네트워크를 분석하는 틀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는 86세대 전체에 대한 규정이 아니라 민주화운동의 경력과 인적 관계를 공천·임명·정책 자문·공공기관 진입의 자산으로 전환한 일부 권력 엘리트를 대상으로 하는 분석입니다. 이제 중요한 질문은 ‘노멘클라투라 이후’입니다. 체제가 붕괴하거나 개혁될 때 기존 엘리트는 함께 사라지는가, 아니면 새로운 제도와 경제구조에 적응해 다른 지배집단으로 재편되는
카페에 마주 앉아 각자의 스마트폰 화면만을 부유하는 연인들, 끊임없이 대화하지만 정작 누구의 마음에도 가닿지 못하는 텅 빈 소음들.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철저히 혼자인 이 기이한 고립은 단지 우리의 감정이 메말라서만 생기는 문제가 아닙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가 '함께 있음'의 의미, 나아가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잃어버렸다는 데 있습니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의 첫 장면은 바로 이 문제를 날카롭게 건드립니다. 많은 사람이 이 영화를 운명적인 사랑의 시작으로 기억하지만, 사실 영화는 사랑이 아니라 '관계의 균열'에서 시작됩니다. 기차 안, 독일인 중년 부부가 격렬하게 다투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같은 객실에 앉아 있고, 같은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의 말은 더 이상 상대에게 닿지 않습니다. 그들의 언어는 대화가 아니라 엇갈리는 독백이고, 함께 있음은 관계가 아니라 건조한 물리적 공존에 그치고 맙니다. 이 짧은 장면은 영화 전체가 던질 묵직한 질문을 미리 제시합니다. "과연 함께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충족되어야 진정한 사랑인가." 같은 공간에 있으면 함께 있는 것일까요. 같은 시간을 보내면 관계가 존재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 이 글은 영화의 내용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 규율의 위험과 참혹함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영화 《피아니스트》는 전체주의적 규율이 어떻게 한 인간의 몸과 욕망을 조직하고, 그 규율이 실패하는 순간 폭력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냉혹하게 추적합니다. 40대 음악원 교수 에리카는 가정과 음악원에서 배운 규율의 문법이 무너지는 순간, 자유의 가능성 대신 자기 자신을 찌르는 자해를 통해 그 문법을 다시 작동시키는 주체가 됩니다. 외모가 준수하고 능력 있는 청년 발터는, 에리카에게서 사회가 승인한 ‘정상적인 사랑’의 문법이 좌절되자 그녀를 성폭력으로 처벌하는 주체가 됩니다. 이처럼 《피아니스트》가 보여주는 가장 잔혹한 진실은 여기에 있습니다. 규율은 단지 인간을 복종시키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규율은 인간을 규율의 집행자로 만들고, 그 집행이 좌절되는 순간 폭력은 반드시 어느 쪽으로든 향합니다. 그리고 그 폭력이 다시 그 규율을 지탱하는 힘이 됩니다. 규율의 주체가 된 그들에게는 다른 삶의 문법, 자유의 가능성은 좀처럼 허락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전체주의적 규율의 공포입니다. 결국 이 영화는 전체주의적 규율이 인간을 주체화하고 병들게 하며, 그 사고가 국가적 전
◆수사 공백과 국민 피해의 현실 검찰 보완수사권 폐지가 국민 피해를 가중시킬 수 있다는 우려는 단순한 정치적 수사가 아닙니다. 수사 공백이 생기면 그 피해는 권력자가 아니라 피해자와 시민에게 돌아갑니다. 특히 복잡한 경제범죄, 권력형 범죄, 성범죄, 보이스피싱처럼 초동수사와 보완수사가 중요한 사건에서 국가의 수사 역량이 약화되면, 가장 유리해지는 쪽은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입니다. ◆제도개혁을 넘어선 권력의 주체화 그런데도 정부여당이 검찰의 기능적 조정이 아니라 사실상의 폐지나 무력화를 밀어붙인다면, 이러한 행태는 단순한 제도개혁을 넘어 권력의 주체화라는 관점에서 분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푸코가 말한 주체화는, 권력이 인간을 밖에서 억압하는 데 그치지 않고 특정한 사고방식과 판단 기준을 내면화시켜, 스스로 그 권력을 수행하는 주체로 만드는 과정을 뜻합니다. 어느 순간 개인은 명령을 받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권력의 문법을 재생산합니다. ◆ ‘개혁’이 아닌 적대의 구성 이 관점에서 보면 문제는 ‘검찰개혁’이라는 명분 자체가 아닙니다. 문제는 검찰을 견제와 조정의 대상이 아니라, 제거해야 할 순수한 적으로 구성하는 사고방식입니다.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영화<피아니스트 > 전반에 반복적으로 흐르는 상징적인 곡인 슈베르트의 《피아노 삼중주 2번 E플랫장조, D.929》 2악장 Andante con moto는 그저 슬픔을 돋우는 배경음악이 아닙니다. (관련기사 : 하네케감독의 영화 < 피아니스트 > 리뷰 : 규율, 복제, 그리고 폭력 [ 푸코의 주체화와 미시파시즘 ] https://www.ondolnews.com/news/article.html?no=1637 ) 미카엘 하네케 감독은 이 곡의 구조를 빌려 영화의 핵심 주제인 규율의 반복과 자기복제를 청각적으로 형상화합니다. 음악은 도입부부터 장송행진곡을 연상시키는 무겁고 규칙적인 피아노 반주로 시작됩니다. 반주가 끊임없이 같은 걸음걸이를 반복하는 위로, 바이올린과 첼로가 애절한 선율을 노래하며 비상하려 합니다. 그러나 선율은 끝내 완전한 해방에 도달하지 못한 채, 반복되는 처음의 리듬으로 다시 끌려 내려옵니다. 자유를 꿈꾸는 인간의 의지와, 그를 다시 규율의 감옥으로 끌어당기는 보이지 않는 힘이 동시에 연주되는 셈입니다. 이 반복 구조는 에리카의 궤적, 나아가 주체화의 비극과 겹칩니다. 에리카 역시 규율 밖으로 나가려는
◆ 수리 센터에 찾아온 작은 생명 기계 소리가 끊이지 않는 오토바이 수리 센터. 이곳에는 최근 새끼 강아지들을 출산한 반려견 ‘해피’가 살고 있습니다. 어느 날, 어미에게 버림받은 듯한 손바닥만 한 아기 길고양이 한 마리가 비틀거리며 수리 센터 안으로 들어옵니다. 직원들은 긴장했습니다. 갓 출산한 어미 개는 본능적으로 예민해지는 시기입니다. 낯선 동물이 가까이 다가오면 경계하거나 공격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곧 모두의 예상을 깨는 장면이 펼쳐졌습니다. 해피는 이빨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대신 커다란 앞발을 내밀어 아기 고양이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안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새끼 강아지들과 함께 젖을 물렸습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종마저 다른 생명을 자신의 새끼처럼 받아들인 것입니다. ◆ 종을 넘어선 모성 해피의 돌봄은 단순한 수유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아기 고양이를 위해 배를 핥아주며 배변까지 유도했습니다. 이는 진짜 어미 고양이가 보여주는 육아 본능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흐르며 아기 고양이는 ‘치즈’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치즈는 해피의 품을 파고들며 젖을 찾고, 강아지 형제들과 함께 뒹굴며 자랐습니다. 길 위
한국의 반도체 논쟁이 입지 문제로 뜨겁습니다. 호남이냐 수도권이냐를 둘러싼 공방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논쟁은 두 가지 오류를 동시에 안고 있습니다. 하나는 문제의 핵심을 입지로 잘못 설정한 문제의 오설정(misframing)이고, 다른 하나는 투자 의사결정의 순서를 거꾸로 뒤집은 시퀀싱 오류(sequencing error)입니다. 반도체는 독립적인 수요를 가진 산업이 아닙니다. 특히 AI 반도체와 서버용 메모리 수요는 하이퍼스케일러의 데이터센터 투자에서 파생됩니다. 그렇다면 먼저 따져야 할 것은 "어디에 지을 것인가"가 아닙니다. 하이퍼스케일러의 투자 사이클이 얼마나 지속될 것인지, 그 수요를 전제로 한 신규 반도체 투자가 NPV·IRR·투자회수기간 등 기업 재무의 기준에서 경제성을 갖는지가 먼저 검증되어야 합니다. 투자 타당성이 입증된 뒤에야 입지 논쟁은 비로소 의미를 갖습니다. 순서는 분명합니다. 수요 분석, 투자 타당성 검증, 투자 결정, 그리고 그다음이 입지 선정입니다. 이 순서를 건너뛴 채 호남이냐 수도권이냐를 먼저 묻는 것은, 집을 지을지 말지도 결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주소부터 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 반도체 수요의 실체 —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