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에는 하나님이 쓰신 지도자들로 모세, 다윗, 느헤미야등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지도력이 탁월한 지도자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성공한 지도자로 평가받게 하였을까요? ◆ 지도자와 지도력 공동체의 성장에는 지도자의 지도력, 곧 리더십이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지도자의 현명한 지도력에 의해 공동체가 설정된 목표를 향해 제대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지도자란 ‘어떤 집단의 통일을 유지하며 그 구성원이 행동함에 있어 그 들에게 방향을 제시하여 주는 구실을 하는 사람’을 의미하며, 요약하면 ‘지도력을 소유한 사람’으로 정의내려집니다. 또한 지도자의 종합적 예술인 지도력이란 ‘조직구성원들이 집단목표를 위하여 자발적으로 노력하도록 그들에게 영향을 주는 기술 또는 구성원들의 개인적 목적을 달성하는데 영향력을 미치는 기술’로 해석됩니다. 이처럼 지도자와 지도력은 공동체와 구성원들의 방향 목표와 관련된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구약성서에 나타난 지도자와 지도력 구약에는 지도자가 ‘머리’(head)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6장 14절의 “집의 어른”(heads of their families), 역대하 5장 2절의 “모든 지파의 두목들
신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할 때,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을 향해 새 생명으로 살아나게 됩니다. 그럼에도 죄는 신자들 안에 여전히 거주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죄는 단지 지배력을 잃을 뿐이지 성도의 내면에 죄의 흔적으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도는 매일매일 유혹을 부르는 죄의 세력과 싸워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싸움의 무기는 승리에 대한 확신을 보장받는 것입니다. 이 확신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죄에 죽고 부활한 그리스도의 은택을 ‘이미’ 공급‘받았다’는 결정적 성화로부터 비롯됩니다. ◆ 성화란? 성화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거룩함에 이르게 될 때까지 변화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의 변화는 마치 곡식가루 반죽에 누룩을 넣어 발효시키는 것 처럼, 성질을 좋게 변화시킨 발효적 변화와 유사합니다. 즉 거룩한 변화는 생각과 마음이 바뀌는 ‘전향’으로부터 시작하여 옛날의 자기를 죽이는 ‘변용’으로 이어지며, 최종적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는 ‘비상’에 이르게 됩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에 참여함으로써 자기를 죽입니다(mortificatio). 이어 자기를 죽인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하
질병, 실패, 주변의 폭력등이 야기하는 고통과 두려움에 시달릴 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을 경험하곤 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나의 신음에 침묵하시는가?’ ‘이 고통스런 상황에 개입하지 않으시고 수수방관하시는 하나님이 진정 사랑의 하나님이신가?’라며 하나님에 대한 불만을 품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와 상관없는 분이라는 생각이 커지면, 우리는 하나님과의 분리라는 영적인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은혜의 관계 칼빈은 그의 저서 <기독교강요>에서, 신자가 그리스도가 소유하신 충만한 은혜에 참여하기 위해선, 우선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먼저, 우리는 그리스도가 우리 밖에 머물러 계시고 우리가 그와 분리되어 있는 한, 그가 인류의 구원을 위해 받으신 모든 고난과 행하신 모든 일들이 우리에게는 여전히 무익하고 무가치하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아버지께로부터 받으신 것을 우리와 함께 나누시기 위하여 우리의 소유가 되시고 우리 속에 거하셔야 했다.” 이처럼 칼빈은 그리스도가 소유하신 은혜를 누리기 위해선 우리가 먼저 그리스도와 생명의 관계로 연합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와
◆ 바빌론 유수 사망의 압제가 비탄과 슬픔을 자아낼 때, 하나님은 구원의 계획을 세우시고 마침내 죄인들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해 내십니다. 이러한 과정은 <바빌론 유수>에서 발견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기는 악행(유다왕 여호와김이 백성들로 하여금 우상을 섬기게 함)을 범한 결과, 바빌론 幽囚(바빌론 유수, Babylonian captivity, BC 586~538)를 당합니다. 바빌론 유수란 기원전 6세기 유다 왕국이 신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2세(성경의 느부갓네살)에 멸망당하고, 유대인들이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가 노예생활을 겪은 사건을 말합니다. 바빌론에 억류된 유대인들은 조국을 그리워하며 눈물을 짓습니다. 시편 137편 1절은 이 상황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By the rivers of Babylon we sat and wept when we remembered Zion”(137:1) ◆ <나부코(Nabucco)>의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바빌론에 노예생활을 겪고 있는 유대인들의 회한은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Nabucco)&g
라틴어 격언에 ‘dum spiro, spero’(숨쉬는 한, 나는 희망한다. While I breathe, I hope.)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로마의 정치인인 키케로가 말한 것으로 알려진 이 격언은, 문장의 앞 뒤 문구를 바꾸어 표현하면, ‘희망하는 한, 우리는 숨쉬게 된다’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고통스러운 환경에 처해 있을 지라도 희망이 있다면 현재의 난관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 말은 그다지 마음의 위안을 주지 못합니다. 정직하고 바르게 살아온 사람은, 자신에게 닥쳐온 고통을 이해할 수 없다며 고통의 원인을 찾는데서 헤어나질 못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앞 뒤로 꽉 막혀 길을 찾지 못하는 상황에서, 도대체 그 희망을 어디서 어떻게 찾을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우선 떠오릅니다. ◆ 희망의 상실의 원인과 희망의 회복 희망의 회복은 무엇이 희망을 잃게 하는가에 대한 답 찾기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는 인간의 고통과 절망의 원인이 환경의 압제에서 기인한다고 느끼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 내면을 파고 들어가 보면, 절망의 뿌리는 죽음과 관련되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인간의 죽음은 육의 죽음과 영의 죽음으로 구별됩니다. 인간의 죽음은 자연적 죽
“무엇이 이 세상에서 우리의 삶의 목표인가?” 이 질문에 그리스도인의 답은 무엇일까요? 칼빈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궁극적 목적이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데 있다고 말합니다. 이유는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을 얻은 우리의 생명은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칼빈은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삶을 사는 것은 당연하다고 이해합니다. 칼빈에 의하면 죄인 된 인간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길은 그리스도인들의 성화에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의 생활 속에서 거룩한 사람으로 우리 자신이 성화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할 수 있다는 겁니다. ◆ 칼빈이 의미하는 성화 칼빈은 성화를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드리는 자기 헌신으로 파악합니다. 그는 이러한 성화의 궁극적인 목적을 거룩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거룩한 백성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유는 이렇습니다. 성화가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헌신이라면,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기 위한 전제는 자신이 오염으로부터 깨끗이 씻김을 받는 것입니다.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화란 세상을 버리고 육체의 오염에서 우리 자신을 깨끗이 하고 마치 제물처럼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