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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일반

[정치 무관심① ] 야당은 박자와 음정을 맞추며 열정과 정신을 보여줄 것인가?

시민이 자신이 바라는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나? 

우선 사회문제 해결의 선결요건은 이를 바라는 사람들이 정치적 공간에 출현하는 것이다. 그 공적인 장소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어 의사를 표명해야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예로 과거 미국의 흑인들에 대한 인종차별 문제를 들 수 있다. 흑인들이 백인들로부터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게 된 이유의 하나는 그들이 그들의 운명을 감수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통념 때문이었다는 지적이 제기되었다. 따라서 흑인들의 이러한 인식은 자신들의 시민적 권리를 요구하기 위해 공적 세계, 정치적 공간으로 모습을 나타내지 못했다. 

흑인들이 공적세계에서 철저히 배제된 결과는 극도의 인종차별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런데 흑인들의 인종차별 문제가 점차 개선된 것은 그들이 공적, 정치적 장소에 출현하여 시민적 권리를 주장하면서 부터이다. 그들이 공적세계에서 정치적 행위주체가 되어 발언권을 강화하게 되자, 인종차별의 문제가 정치적 이슈로 제기되어, 이 문제는 점차 시정되어 갔다. 

이처럼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를 요구하는 이들이 정치적 행위주체로서 공적 장소에 나타날 것을 요구한다. 공적장소에 출현하지 않는 사람들은  변화의 주체로 인정받을 수 없고, 그 결과 사회적 해결은 불가능해진다.  


◆ 투표

그렇다면 시민이 현대의  시민적 권리를 실현시키기 위한 공적장소로의 출현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이는  정치적 관심의 표명으로  투표장에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투표가  자신들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가장 실질적인 방안이다.  

하지만 최근 정치적 무관심이 일반화되어, 특히 젊은층이 투표장에 나타나는 모습은 드물다. 지난 4월에 치루어진 보궐선거는 젊은 층의 무관심을 그대로 드러내었다. 관악을 선거구에 속하는 대학동은 이의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다.  

19대 총선의 경우, 대학동에서 2995표를 얻은 새누리당의 오신환 후보는,  4월 보궐선거에서 2213표을 얻었다. 반면 새정치 민주연합의 정태호 후보는 2526표를, 정동영후보는 962표를 얻어 모두 3488표를 획득했다. 이는 지난 19대 때 이 지역에서 야당후보들이 얻은 득표수인 8397표에 한참 미달된 것이다. 


◆ 정치적 무관심

이러한 정치적 무관심은 무엇으로부터 비롯된 것인가?  미국의 정치학자 H.D.라스웰은 3가지 형태를 제시하고  있다. 

△ 예술· 과학등 비정치적인 영역에 열중해서 정치적인 관심을 잃게 되는 경우등의 무정치 형태  △무정부주의자나 종교적 신비론자와 같이 자기의 신조가 정치와 충돌할 경우 나타나는 반정치적인 형태  △요구나 기대가 권력행사에 의해서 만족스럽지 못하기 때문에 정치에서 물러나는 정치이탈적이 형태등이 그것이다. 

이중 탈정치의 일반적인 형태가 위의 세번째 형태이다. 정치의 공간에 나타나 의사표시를 하여도 자신들이 기대한 만큼의 결과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정치 불신이며, 기성정치에 대한 부정적인 경향의 표출을 의미한다. 


◆ 정치와 예술

20세기 정치사상가인 한나 아렌트는 정치를 공연예술에 비유한다.(김선욱2003) 예술가는 예술 작품을 통해서 자신의 기술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동시에 보여준다. 

기술이 없다면 뛰어난 예술가가 될 수 없고, 또한 자신을 보여주지 못하는 예술가도 뛰어난 예술가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바흐의 무반주 첼로 곡을 연주하는데 있어, 기술을 추구하는 연주자가 있는 반면 열정을 강조하는 연주자가 있다. 전자는 정확한 박자와 각각 음정들의 충실한 연주를 통해 균형있는 정서를 표현한다. 후자는 악보에 충실하기보다 곡이 지니는 정신과 열정을 표현한다. 

이처럼 아렌트는 정치적 행위는 탁월한 기술과 더불어 정치 행위자의 정신과 개성이 동시에 드러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므로 정치가는 전문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하며, 동시에 그가 품고 있는 정신의 매력을 발산하여야 한다.

그렇다면, 야당은 정확한 박자와 음정에 충실한 연주자라 말 할 수 있을까? 일부에서는 야당이 중장기 미래 국가경영의 비전을 제시하고 이에 근거한 전략을 마련해야 함에도, 협소한 전략에만 집중할 뿐 국가를 경영하는 큰 그림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그 비전은 무엇인지, 단지 진보라는 추상적인 표현으로 이를 일괄해서 설명 할 수 있을지 불투명하다.  

또한 야당의 연대에 기초한 정신과 열정의 부재 또한 문제다. 보궐 선거의 후폭풍이 야당 내부에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있다. 심지어 주류와 비주류 최고위원간에 막말이 오갈 정도로, 계파간의 갈등은 잔존하고 있다.  

이러니 야당 지지자들은 야당의 비전도 정신도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 공무원연금개혁에서 보여주었던 야당의 수동적인 자세는 국민들의 비판을 받고 있다. 서민들은 야당이 더 이상 자기편이 아니라는 인식을 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니, 야당에 대한 믿음과 신뢰는 진보지지자들의 마음을 떠나게 했고, 전라도에 새로운 야당의 출현에 국민들의 표가 한 쪽으로 쏠리게 하였다. 

그러므로 왜  진보층이 정치의 장인 투표장에 나타나지 않는가라는 의문은, 이들이  기성정치에 기대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야당은 언제 이러한 박자와 음정을 맞추며 열정과 정신을 보여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