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빈 워시 전 이사가 제기하는 경제 진단의 핵심은 현재의 연준 시스템이 자본주의의 근간인 ‘민간 신용 창출’ 기능을 심각하게 왜곡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 신용의 고임 현상: 무위험 수익에 안주하는 은행과 마비된 신용 창출
그는 중앙은행이 양적 완화(QE)를 통해 공급한 막대한 자금이 실물 경제로 스며들지 못하고 중앙은행 주변에만 머무르는 ‘신용의 고임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고 경고합니다.
워시의 분석에 따르면, 현재 금융 시장의 문제는 은행의 대출 여력 부족이 아니라 위험을 감수하며 기업이나 개인에게 자금을 공급할 ‘유인(인센티브)’이 사라졌다는 점입니다.
과거 은행은 수익 확보를 위해 민간 대출이라는 위험을 기꺼이 감내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양적 완화 과정에서 연준이 도입한 준비금 이자(IORB, Interest on Reserve Balances) 제도는 이러한 시장의 법칙을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은행 입장에서 중앙은행에 자금을 예치해두는 것만으로도 안정적인 ‘무위험 수익’을 챙길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구조적 변화는 은행의 자산 운용 기준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었습니다. 중앙은행이 보장하는 안전한 수익률이 일종의 기준점(Benchmark) 역할을 하게 되면서, 민간 대출 심사에 적용되는 기대 수익률의 눈높이가 과거보다 훨씬 높아진 것입니다.
무위험 수익률이 매력적인 수준에서 유지되자, 은행들은 굳이 까다로운 대출 심사와 부도 위험을 감수하며 민간에 자금을 빌려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은행은 대출 문턱을 대폭 높이거나 대출 비중을 축소하고, 대신 안전한 단기 자산 운용에 치중하는 보수적인 행태를 보이게 됩니다.
워시는 이를 두고 은행이 자산 구성을 결정할 때의 기준점이 완전히 이동해버렸다고 설명합니다. 돈의 흐름이 실물 경제의 모세혈관까지 도달하지 못한 채, 중앙은행 대차대조표 근처에서 맴돌며 정체되는 현상이 발생하는 이유입니다.
결론적으로 양적 완화는 시중의 준비금을 늘렸고, 준비금 이자 제도는 그 자금에 무위험 수익을 보장했습니다. 그 결과 은행이 ‘실물 경제로 뛰는 것’보다 ‘연준 금고에 머무는 것’을 더 선호하는 기형적인 환경이 구축되었습니다.
워시는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민간의 신용 중개 기능이 이처럼 약화되면서 실물 경제의 근본적인 성장 동력이 저하될 수 있음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습니다.
◆QE가 신용중개를 약화시킨 과정
QE가 신용중개를 약화시킨 과정은 다음의 과정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1) 연준이 시장 참가자(은행, 증권사, 자산운용사 등)로부터 국채 같은 채권을 사들입니다. 이 행동 자체가 QE의 시작입니다. 즉 양적완화(QE)는 미국 연방준비제도가 시장에서 국채나 MBS 같은 채권을 사들이는 정책입니다.
2) 연준은 “대금”을 현금이 아니라 은행권 시스템에 준비금(reserves) 형태로 넣어 결제합니다. 즉 연준은 채권을 살 때 지폐를 트럭으로 실어 나르지 않습니다. 대신 은행이 연준에 갖고 있는 계좌(준비금 계정)에 숫자를 찍어 줍니다.예컨대 어떤 자산운용사가 채권을 팔았다면, 그 운용사가 쓰는 은행의 연준 계좌에 준비금이 들어오고, 운용사 계좌에는 예금이 들어옵니다. 결과적으로, 은행의 자산 쪽에는 “연준에 있는 준비금”이 늘고 민간 쪽(운용사·기업·가계)에는 “은행 예금”이 늘어난 것처럼 보입니다.
다만 여기서 핵심은, 준비금은 은행과 연준 사이에서만 움직이는 결제자산이라는 점입니다. 은행 시스템 “바깥”으로 빠져나가 지폐처럼 떠도는 돈이 아니라, 은행들이 결제를 위해 쓰는 일종의 ‘내부 결제 잔고’에 가깝습니다.
3) QE가 반복되면, 은행 시스템 전체의 준비금 ‘총량’이 커집니다. 연준이 채권을 더 많이 살수록 결제에 쓰이는 준비금이 더 많이 찍혀 들어옵니다. 그래서 QE가 길게 지속되면, 은행 시스템 전체의 준비금이 큰 규모로 불어납니다. 이게 “QE 이후 준비금이 늘었다”는 말의 정확한 의미입니다.
4) QE로 준비금이 커진 상태에서, 연준은 은행이 연준 계정에 보유한 준비금에 대해 IORB(지급준비금 금리)를 지급합니다.
여기서 IORB는 은행의 ‘무위험 기준수익률’을 형성합니다.
준비금이 큰 규모로 존재하는 상황에서 IORB가 충분히 매력적인 수준으로 설정되면, 은행의 의사결정은 두 대안의 선택입니다.
*대출: 심사·부실 위험, 자본·유동성 규제 부담, 운영비용이 동반
*준비금/단기무위험 운용: 상대적으로 낮은 위험과 비용, 확정적 수익
워시는 여기서 “은행이 굳이 위험을 지고 대출을 늘리기보다, 연준에 두고 이자를 받는 쪽이 상대적으로 편해진다”는 점을 공격합니다. QE가 준비금을 늘렸고, IORB가 그 준비금에 ‘수익률’을 붙여 줌으로써, 은행의 행동을 대출 확대보다 무위험 운용 쪽으로 기울게 할 수 있다것이 워시의 문제제기입니다.
5) 결과적으로 금융의 맥경화현상이 발생하게 됩니다. 연준 금고에 돈을 넣어두기만 해도 ‘무위험 확정 수익’이 보장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보니 은행들은 정작 자금시장에 대출할 유인을 상실하게 됩니다. 중앙은행의 장부에는 막대한 유동성이 쌓여 ‘비만’ 상태가 되었지만, 정작 실물 경제는 돈 가뭄에 시달리게 되는 겁니다.
결론적으로 워시는 준비금과 단기 무위험 수익 기회가 구조적으로 팽창하는 환경이 민간의 생산적 투자로 향해야 할 신용의 한계 공급을 둔화시켰다고 진단합니다. 양적 완화라는 이름의 유동성 공급 정책이, 역설적으로 실물 경제로 향하는 돈줄을 막는 장벽이 되어버린 셈입니다.
◆ 양(Quantity)을 줄여 질(Flow)을 높이는 전달 경로의 재설계
케빈 워시는 비대해진 중앙은행의 대차대조표가 오히려 실물 경제의 자금 흐름을 경색시켰다고 진단하며, 그 해법으로 “통화량 감소 속의 실물 유동성 증가”라는 역설적인 전략을 제시합니다. 이는 단순히 모든 경제 주체의 자금줄을 죄는 전통적 긴축과는 궤를 달리하는 파격적인 접근입니다.
워시의 구상은 금융권에 머무는 과잉 유동성인 지급준비금을 거두어들이는 대신, 은행들이 수익 확보를 위해 민간 대출이라는 본연의 기능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있습니다. 연준이라는 거대한 댐에 갇혀 월스트리트의 장부상에서만 존재하던 '잠자는 돈'을 메인스트리트의 공장 건설과 고용 창출에 쓰이는 '움직이는 돈'으로 강제 이동시키겠다는 의도입니다.
이러한 전달 경로의 재설계가 성공한다면, 전체 통화 지표(M2)는 연준의 양적 긴축(QT) 영향으로 정체되거나 축소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장이라는 배관을 흐르는 화폐의 회전 속도(Velocity)가 비약적으로 상승하면서, 실질적으로 경제가 느끼는 유동성과 활력은 오히려 증폭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워시는 이러한 '질적 전환'이야말로 인플레이션을 자극하지 않으면서도 잠재 성장률을 끌어올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강조합니다.
결국 워시노믹스의 지향점은 돈의 '양'에 집착하던 낡은 패러다임을 버리고, 돈의 '흐름'을 회복하여 경제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개선하는 데 있습니다.
◆ 워시의 역설: ‘댐’의 물을 빼서 ‘들판’을 적시는 법
케빈 워시 전 연준 이사가 구상하는 “통화량 감소 속 실물 유동성 증대” 전략은 단순히 통화량(M)을 줄이는 기술적 처방에 그치지 않습니다.
이는 금융 시스템 내부에서 자금이 정체되는 구조적 결함을 치유하여, 결과적으로 화폐 유통 속도(V)가 회복될 수 있는 토양을 만드는 ‘유인 구조 중심’의 재설계에 가깝습니다.
이 관점은 고전적 화폐수량설(MV=PY)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기존의 방식과는 궤를 달리합니다. 통화의 총량만을 조절하기보다, 현대 금융 구조와 중앙은행 대차대조표가 만들어내는 유인 체계를 근본적으로 바꿔 M과 V의 상호작용이 실물 경제에 유리하게 작용하도록 설계하겠다는 문제의식입니다.
① ‘총량 조절’보다 ‘흐름의 경로’를 바꾸는 설계
전통적인 긴축이 시장 전반의 금융 여건을 일괄적으로 조이는 방식이었다면, 워시의 접근은 명확한 차별점을 가집니다. 중앙은행 대차대조표 주변에 머무르는 단기 유동성의 비중을 낮추되, 남은 유동성이 민간의 대출과 투자, 지출로 더 원활히 연결되도록 자금의 흐름 경로를 조정하는 데 초점을 둡니다.
워시는 특히 초과지급준비금이 막대한 규모로 존재하고, 그 보유에 무위험 이자(IORB)가 부여되는 현재의 '플로어(Floor) 체제'를 경계합니다. 이러한 환경이 지속될수록 은행의 의사결정에서 민간 신용 공급의 상대적 매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대출은 심사와 관리 비용, 신용 위험은 물론 각종 규제 부담을 동반하는 반면, 준비금 보유는 위험과 비용이 극히 낮은 안정적인 운용 수단으로 평가받기 때문입니다.
② 죽은 돈의 부활: 지급준비금에서 민간 대출로
전략의 첫 단계는 대차대조표 축소(QT)를 통한 과잉 유동성 회수입니다.
다만 여기서 핵심은 “준비금을 줄이면 대출이 늘어난다”는 식의 산술적 인과관계가 아닙니다. 워시가 겨냥하는 지점은 은행이 수익성과 제약 조건을 따져볼 때, 무위험 단기 운용에 머무르는 것보다 민간 대출을 확대하는 선택지가 상대적으로 더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유인 구조를 재배치하는 것입니다.
현재 연준의 체제 아래 시중 은행들은 막대한 자금을 연준에 맡겨두고 이자(IORB)를 챙기는 ‘무위험 수익’에 안주해 왔습니다. 워시는 이 지급준비금을 경제의 혈관을 막고 있는 ‘거대한 혈전’으로 규정합니다.
연준이 자산 매각(QT)을 통해 이 과잉 준비금을 강제로 회수하면, 이는 은행이 수익성을 유지하기 위해 기업과 가계에 대출을 실행하는 본연의 역할로 돌아가는 여건을 마련하게 됩니다. 그 결과 중앙은행 장부상에만 존재하던 ‘죽은 돈’이 실물 경제를 활성화하는 ‘산 돈’으로 치환될 수 있습니다.
③ 규제의 지렛대: SLR 완화라는 ‘해방 신호’
단순히 지급준비금을 회수하는 것만으로는 대출 확대를 온전히 이끌어낼 수 없습니다.여기서 케빈 워시는 ‘보완적 레버리지 비율’(SLR) 규제 완화라는 강력한 카드를 꺼내 듭니다.
SLR은 은행이 보유한 자산의 위험도와 상관없이 일정 비율의 자기자본을 유지하도록 하는 규제입니다. 위험 가중치가 아닌 총 익스포저(총자산)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이 규제가 엄격할수록 은행은 자산 구성과 관계없이 대차대조표를 확장하는 것 자체에 상당한 제약을 받게 됩니다.
워시의 문제의식은 바로 이 지점에 닿아 있습니다. 규제 구조가 은행의 대차대조표 용량을 과도하게 옥죄는 방식으로 작동할 경우, 은행이 실물 경제로 신용을 공급할 물리적인 '공간' 자체가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워시는 이러한 규제의 족쇄를 손질함으로써 은행이 민간 대출과 같은 위험 자산을 보유할 때 느끼는 자본 부담을 덜어주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규제 완화가 시행되면 은행 입장에서 혁신 기업에 대출을 실행하는 것은 이전보다 훨씬 매력적인 선택지가 됩니다. 이는 단순히 기술적인 조정을 넘어, 자금의 이동 방향을 정부 부채(국채 보유)에서 민간 생산성 향상으로 급선회시키는 결정적인 장치가 됩니다. 즉, 규제의 문턱을 낮추어 '돈의 물길'이 실물 경제의 심장부로 흐르도록 유도하는 셈입니다.
사실 SLR 조정은 전혀 새로운 수단이라기보다 연준이 필요할 때마다 활용해 온 기존의 정책 레버입니다.
하지만 워시는 이를 '연준 대차대조표 축소'와 '무위험 운용 유인의 약화'라는 거대한 거시 전략의 틀 안에 전략적으로 배치했습니다.
결국 워시의 구상 속에서 SLR 완화는 민간 신용 중개 기능을 복원하고 실물 경제의 엔진을 다시 돌리기 위한 필수적인 보완 장치로 기능하게 됩니다.
◆ 통화량(M)의 정체와 회전 속도(V)의 폭발
이 과정이 성공하면 흥미로운 통계적 현상이 발생합니다. 연준이 QT를 통해 시중의 돈을 빨아들이기 때문에 전체 통화 지표(M2)는 늘지 않거나 오히려 줄어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경제 주체들이 느끼는 ‘체감 유동성’은 오히려 풍부해집니다.
비결은 화폐의 유통 속도(Velocity)에 있습니다. 중앙은행 금고에 잠자던 1달러는 회전 속도가 0에 가깝지만, 시장으로 나와 대출과 투자를 반복하는 1달러는 수차례의 승수 효과를 만들어냅니다. 워시의 구상은 전체 통화량(M)이라는 ‘덩치’는 줄이되, 회전 속도(V)라는 ‘활력’을 비약적으로 높여 실물 경제의 총생산(PY)을 지지하겠다는 전략입니다.
◆ ‘연준 의존증’에서 ‘시장 자생력’으로의 대전환
이러한 정책 설계가 유기적으로 맞물리면 광의통화(M2)와 같은 총량 지표는 정체되거나 둔화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민간의 대출과 투자, 소비가 선순환되는 국면에서는 동일한 단위의 통화가 더 자주 거래에 사용됩니다.
결과적으로 화폐 유통 속도(V)가 회복되면서, 통화의 규모 자체보다 연결성과 순환성을 개선해 성장과 물가 안정 사이의 긴장을 완화하는 효과를 거두게 됩니다.
물론 이 전략의 성공 여부는 민간의 실제 대출 수요와 신용 비용, 예대마진의 적정성, 그리고 규제 설계의 정교함 등 복합적인 변수에 달려 있습니다. 경기 국면에 따른 시장의 반응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요소입니다.
결국 워시가 제기하는 역설의 종착지는 미국 경제를 연준의 수액에 의존하는 환자 상태에서, 민간 은행의 신용 창출 기능이 살아있는 건강한 자생적 상태로 되돌리는 데 있습니다.
연준의 비대한 몸집을 줄여 정부의 부채 조달 창구 역할을 종식시키고, 그 유동성이 민간의 창의적인 영역으로 흘러 들어가게 함으로써 ‘긴축 속의 성장’이라는 난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입니다.
이는 통화 정책이 더 이상 단순한 숫자의 유희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금융 시스템의 배관을 새롭게 설계하여 경제의 효율성을 근본적으로 개선하는 ‘구조 조정’이야말로 워시가 그리는 차기 연준의 핵심 과업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