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권력자는 권력 유지를 위해 더 이상 물리적 폭력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들은 ‘침묵’을 제도화합니다.
엘리자베스 노엘-노이만이 경고했던 '침묵의 나선' 이론—소수의 작은 침묵이 가시성을 낮추고, 이것이 가시성 편향을 낳아 결국 더 큰 침묵으로 증폭되는 과정—은 오늘날 권력이 휘두르는 '전략적 봉쇄 소송(SLAPP)'이라는 무기와 결합하여 완벽한 심리적 감옥, '판옵티콘'을 완성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막겠다며 내놓은 정치권의 대책은 역설적으로 권력에게 면죄부를 쥐여주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 '나선(Spiral)'의 정체: Downward Narrowing Coil
①나선은 코일이 좁아지는 모양
①나선은 코일이 좁아지는 모양
‘침묵의 나선 이론(Spiral of Silence)’에서 ‘나선(spiral)’이라는 단어는 흔히 달팽이 껍데기나 소용돌이처럼 coil 모양으로 감겨 있는 곡선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이 이론에서 제시하는 코일의 형태는 단순한 원통형이 아닙니다. 그것은 narrowing spiral, 즉 코일이 아래로 내려가며 뾰족하게 좁아지는 형태이거나 downward narrowing coil, 즉 아래로 내려가며 코일 지름이 급격히 줄어드는 형태를 띱니다.
이 독특한 기하학적 구조는 말의 침묵이 형성되는 과정을 정교하게 설명합니다.
여기서 코일의 지름은 ‘소수 의견이 표현될 수 있는 공간’ 혹은 ‘의견의 다양성’을 상징합니다.
나선의 윗부분처럼 지름이 넓은 구간에서는 소수 의견을 가진 사람들도 비교적 자유롭게 목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내 의견이 소수라도 말해도 괜찮겠다"고 느끼는 여지가 있어, 공론장에서는 다양한 의견이 공존하고 논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나선이 아래로 내려가며 지름이 좁아질수록, 소수 의견이 설 자리는 줄어들고 공론장에서의 가시성 또한 급격히 감소하게 됩니다.
② 가시성 편향: 보이는 것만 믿는 착각
그렇다면 왜 코일은 아래로 갈수록 좁아지는 소용돌이 형태를 띠게 될까요? 이 형태를 만드는 엔진은 바로 ‘소수 의견의 가시성(visibility)’입니다. 여기서 가시성은 공론장에서 소수 의견이 얼마나 보이는지를 의미합니다.
초기 단계에는 가시성이 높습니다. 소수 의견이라도 언론이나 공론장에서 어느 정도 포착되기에, 사람들은 "이 의견을 가진 사람들도 꽤 있구나"라고 인지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이 가시성은 0에 수렴하게 됩니다. 이유는 침묵이 누적되면, 공론장에서 해당 의견은 거의 사라지고, 그러면 남아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고립돼 있다고 느끼며, 결국 스스로도 침묵하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이 바로 가시성 편향(visibility bias)입니다.
대중은 실제 의견의 통계적 분포가 아니라, 눈에 보이는 ‘인식된 의견 분포(perceived opinion climate)’를 현실로 오인합니다. 공론장에서 자주 보이는 의견은 ‘다수’로, 보이지 않는 의견은 ‘극소수’ 혹은 ‘위험한 의견’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공론장을 관찰하며 "현재 다수 의견은 무엇인가?"를 판단하고, 자신의 의견이 소수로 보이면 침묵을 선택합니다. 그 결과 실제로는 존재하던 의견마저 가시성이 줄어들고, 이는 다시 더 많은 침묵을 유발하는 악순환을 낳습니다. 이 반복 과정이 바로 downward narrowing coil, 즉 아래로 가속되는 나선형 구조를 형성합니다.
③고립의 공포가 가속화하는 침묵
이처럼 나선이 아래로 좁아지는 것은, 가시성이 낮은 의견이 사회적으로 위험한 의견으로 인식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사회적 고립을 두려워하며, “이 의견을 가진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인식은 “이 말을 하면 혼자 비난받을 수 있다”는 불안을 유발합니다. 그 결과 해당 의견을 가진 사람들마저 침묵하게 되고, 나선의 지름은 더욱 급격히 좁아집니다.
정리하면, downward narrowing coil은 ‘작은 침묵 (소수로 보이는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먼저 입을 다무는 현상) → 가시성 감소 → 가시성 편향으로 인한 더 큰 침묵 → 침묵이 나선형으로 증폭’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결국 침묵의 나선은 단순한 개인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공론장에서 ‘보이는 것’을 인식된 의견으로 착각하는 인식의 편견의 결과입니다.
◆ 다이어그램으로 보는 침묵의 과정

이 이론을 시각화한 다이어그램은 이러한 과정을 매우 직관적으로 보여줍니다. 중앙에는 녹색의 나선형 코일이 위에서 아래로 좁아지는 형태로 그려져 있으며, 이는 소수(비인기) 의견을 가진 사람들의 침묵 과정을 상징합니다.
•인기 있는 의견(Popular Opinion) :상단에 위치한 긴 청록색 막대는 공론장에서 항상 강하게 존재하는 다수 의견을 나타냅니다.
•말하려는 의지(Willingness to speak out): 코일이 넓은 초기 단계에서는 소수 의견을 가진 사람도 발언할 의지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비인기 의견을 가진 사람: 나선 중간의 파란 점으로 표시된 이들은 나선을 따라 아래로 끌려 내려가는 주체입니다.
•고립의 두려움(Fear of isolation): 아래 방향 화살표는 고립에 대한 공포가 사람들을 나선 아래쪽, 즉 더 깊은 침묵으로 끌어내리는 압력입니다.
•침묵 상태(Remaining silent): 결국 코일이 거의 사라지는 나선의 끝부분에 도달하면 완전한 침묵에 이르게 됩니다.
결국 이 이미지는 비인기 의견을 가진 개인이 사회적 고립의 두려움에 의해 점점 말하지 않게 되고, 그 침묵이 다시 공론장의 인식 구조를 왜곡하면서 더 깊은 침묵을 낳는 과정을 한눈에 보여주는 다이어그램입니다.
◆ 침묵의 나선과 SLAPP
앞서 살펴본 사회적 고립을 두려워해 소수 의견이 침묵하게 된다는 '침묵의 나선(Spiral of Silence)' 이론은 권력자가 휘두르는 전략적 봉쇄 소송(SLAPP, Strategic Lawsuit Against Public Participation)과 결합하여 그 공포를 극대화합니다.
SLAPP은 승소보다 괴롭힘 자체가 목적인 소송입니다. 권력은 위험을 감수하고 비판하는 '최초 발화자'를 타격하여 막대한 소송 비용과 심리적 압박을 가합니다.
이 과정을 지켜본 대중과 언론은 '말하면 다친다'는 기대손실을 학습하게 되고, 결국 공론장은 생존을 위한 침묵으로 좁아집니다(Downward Narrowing Coil).
◆ 보이지 않는 감옥: 판옵티콘(Panopticon)의 핵심-영혼의 감금
SLAPP이 초래하는 침묵의 나선은 미셸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분석한 제레미 벤담의 '판옵티콘(Panopticon, 원형감옥)' 구조와 유사합니다. 이 감시 체계의 핵심은 '물리적 구속'이 아니라 '시선의 비대칭성'을 통한 '규율의 내면화'에 있습니다.
①시선의 비대칭성 (The Asymmetry of Gaze)
판옵티콘의 중앙 감시탑은 어둡게 처리되어 있고, 죄수들의 수감실은 밝게 비춰집니다. 죄수는 교도관이 자신을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교도관은 언제든 죄수를 볼 수 있습니다. SLAPP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권력자(기업, 정치인)는 언제든 소송이라는 감시의 칼날을 휘두를 준비가 되어 있지만, 시민은 언제 자신이 타겟이 될지 모르는 불확실성 속에 놓입니다.
②권력의 자동화 (Automatization of Power)
실제 감시탑에 교도관이 없더라도, 죄수는 '감시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에 스스로 규율을 지킵니다. 이것이 바로 SLAPP의 진정한 효과입니다. 실제로 승소할 필요도, 모든 비판자를 고소할 필요도 없습니다. 본보기로 몇몇 '최초 발화자'를 처벌하는 것만으로도, 대중은 스스로 입을 다물고 자기 검열을 수행합니다. 권력자가 힘을 쓰지 않아도 통제가 저절로 이루어지는 '권력의 자동화'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③영혼의 감금
푸코는 이를 두고 "육체를 가두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감시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SLAPP의 목적은 배상금을 받아내는 것이 아니라, 비판자의 '의지'를 꺾고 공론장의 '영혼(비판 정신)'을 가두는 데 있습니다.
◆ 더불어민주당 법안(한국형 Anti-SLAPP)의 치명적 한계
이러한 판옵티콘적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발의된 더불어민주당의 '전략적 봉쇄소송 방지법(정보통신망법 개정안 등)'은 역설적으로 그 의도와 달리 권력자에게 '합법적 괴롭힘'의 면죄부를 줄 수 있는 구조적 결함을 안고 있습니다.
첫째, 입증 책임의 전도가 문제입니다.
개정안은 소송이 '괴롭힘 목적'임을 피고인 시민이 직접 소명해야 조기 각하가 가능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자금과 정보력이 부족한 개인이 거대 로펌을 앞세운 권력자의 내심을 입증하기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이는 판옵티콘의 죄수에게 "감시탑이 비어 있음을 증명하라"고 요구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입증 책임을 원고에게 지우지 않는 한, 이 법안은 사실상 무용지물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둘째, 법안이 제시한 '60일 이내 결정' 또한 '시간의 형벌'로 작용할 공산이 큽니다.
얼핏 신속한 구제책처럼 보이지만, 소장이 송달되는 순간부터 발생하는 심리적 공황과 변호사 비용을 고려하면 피해자에게 60일은 지옥과 같은 시간입니다. 오히려 가해자에게는 두 달간 합법적으로 상대를 괴롭힐 수 있는 면죄부를 주는 셈입니다. 소송 요건 미비 시 절차를 즉시 멈추는 강력한 '자동 중지(Automatic Stay)' 장치가 절실한 이유입니다.
마지막으로 한국형 Anti-SLAPP는 SLAPP을 일종의 ‘저위험 고수익 투자’로 전락시킬 위험을 지니고 있습니다.
미국의 강력한 Anti-SLAPP 법제와 달리, 민주당 안은 기각 시 소송 비용을 부담시키는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권력자에게 수천만 원의 비용은 비판을 잠재우기 위해 기꺼이 지불할 수 있는 '저렴한 비용'에 불과합니다. 페널티가 실질적인 위협이 되지 못할 때, 법은 권력의 도구로 전락하게 됩니다.
◆법의 형태를 빌린 판옵티콘, 그리고 영혼의 구출
권력이 공론장을 지배하는 방식은 바뀌었습니다. 더 이상 곤봉이 아니라 절차가, 물리적 구금이 아니라 기대손실이, 검열관이 아니라 자기검열이 사람들을 통제합니다. 이때 SLAPP은 법의 형태를 빌린 ‘판옵티콘’입니다.
판옵티콘은 죄수를 때리기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죄수가 스스로 움직이지 않게 만들기 위해 존재합니다. 지금의 ‘한국형 Anti-SLAPP’은 다름아닌 합법적 판옵티콘입니다. 공포를 “합법적 절차”로 포장해주면, 권력은 굳이 폭력적 검열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법정이라는 감시탑만 세워두면, 나머지는 사회가 알아서 침묵합니다.
진정한 해법은 ‘영혼의 감금’을 합법화하는 것이 아니라, 감시탑을 부수어, 자기검열에 갇힌 영혼을 자기검열의 감옥 밖으로 구출해내는 데 있습니다.
본질은 발화가 비용이 되는 구조, 침묵이 합리적 선택이 되는 구조를 먼저 끊어내야 합니다. 그래야만 공론장은 다시, 말할 수 있는 공간으로 복원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