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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새로운 삶에 대한 투쟁은 우리의 소명, 영화 <가시꽃>

 

갈증에 콜라 첫잔을 들이키면 청량감을 느낀다. 다시 또 추가 한잔을 마실 땐 시원함 대신 텁텁함이 입안을 감돈다. 콜라 소비량이 늘어 갈수록 만족도는 체감되는 것이다.

효용체감의 원칙은 영화라고 예외가 아니다. 사회의 부정적 현실을 다룬 작가주의 영화가 유사한 주제와 소재로 다시 가공 될 때, 창의적인 울림이 없다면, 관객은 금세 반복에 의해 효용이 줄어들게 됨을 느낀다.

이러한 울림과 반향은 당연 감독의 깊은 고민과 성찰의 산물이다.

이돈구감독의 <가시꽃>은  하늘 아래 새로울 것이 없듯이, 이 영화 또한 주제와 소재 면에서 관객들이 이미 경험해 본 작품들의 외피를 덧입고 있다.

‘울부짖는 자의 구원’이라는 주제 면에서, 이창동 감독의 <밀양>이 오버랩된다. 또한, <돈크라이마미>의 성폭행이라는 소재가 작품의 원재료로 투입된다. 과거 이미 밟고 지나간 길을 다시  걸어간다는 것은  부정적 변동성에 놓일 가능성이 높다. 반면에 이러한 답습은 감독의 새로운 변주에 대한 자신감과, 소재와 주제에 대한 감독의 열정과 집착을 드러낸다.


# 처벌방식과 죄의 크기

독립영화의 새로운 피로 주목받고 있는 이돈구감독은 배우를 연상케하는 깔끔하고 말쑥한 외관의 소유자이지만, 이번 그의 작품의 질감은 투박하고 거칠다.

타인의 고통에는 둔감한 채, 비수로 타인의 가슴을 찌르고 영원히 아물지 않는 상처를 남긴 약탈자들은, 버젓이 사랑하고 소시민의 저녁이 있는 삶을 즐기고 있다.   그들은 지나간 과거는 흘려보내자며, 이제 미래와 하늘만 바라보며 살자고, 태연히 그리고 당당히 미소지으며 말한다.  그러니 어찌 그들을 용서하리? 그 포학자들의 참된 구원은 하나님같은 전지자가 나타나 대신 그들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는 것이다. 그래서 감독은 “처벌의 방식을 제시하고 관객에게 묻고 싶었다.”라고 단언한다.

처벌의 방식과 정도는  곧 죄의 크기로 치환된다. 죄의 무게를  가늠 할 수 없을 때 처벌의 계량으로  비로소 죄의 깊이를 느낄 수 있다. 처벌의 정도와 죄의 무게는 정비례하기 때문이다. 타인과 정서적 공유를 절대 못하는, 아니 타인의  고통을 즐기는 자들은 자신이 저지른 공격의 무게를 느끼지 못한다. 그가 직접 처벌을 체험하기 전까지는......

로댕의 작품의 주인공인 다나이프는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는다. 채워지지않는 독에 물을 퍼넣는 무한의 형벌이다. 이를 통해 다나이프의 죄의 질량은 계량되어진다.

감독은 처벌방식과 정도를 제시함으로써 그 죄의 묵직함을 눈앞에 삼삼히 밝힌다. 이리하여 그들의 유희가 다나이프의 형벌임을 각인시킨다.


# 가시꽃

그녀의 이름은 장미, 가시꽃이다. 태생적으로 가시를 가진 꽃이 아닌, 가시를 품게 된 슬프고 처연한 가시꽃이다.

고통이 누적되면  그 분노는 좌절과 무력감의 트라우마로 변질된다. 장미가 진심을 털어놓는 자리에서 ‘그 자들은 죄에서 구원 받고 잘 살겠지!’라는 그녀의 신음과 울부짖음은 ‘어떻게 용서를 해요? 하느님이 벌써 용서하셨다는데, 내가 어떻게 용서를 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내가 용서를 해야지....’라는 <밀양>의 신애의 절규와 다름아니다.

하지만  신에게 용서받고 위로를 받아 말끔한 얼굴로 살아가는 그들을 생각할 때, 장미는 분노의 폭발을 뛰어넘어  결국 허탈이 엄습한다. 그래서 감독은 장미가 티비를 보며 웃음 짓는 엔딩장면에서 “이는 미래의 희망과 타협이 아닌, 씁쓸함이 계속되는 끝나지 않는 고통이다.”라고 내뱉었다.


# 책임

‘이제와서 어쩌라고’ ‘10년 전 얘기를 왜 지금 꺼내는거야.’ 주범 선배의 태연한 반응이다. 그들은 죄에 대한 떨림은 커녕, 이러한 행위는 그들 삶의 자연스러운 일상의 일부라고 냉정하게 책임을 던져 내팽개친다. 

 공격자의 너무나 평온하고 선한 모습에 처벌자이자 동시에 간접적인 가해자인 성공은 분노로 이글거린다.  성공은 책임짐을 포기하는 자들에게  단죄로 그들을 응징하고, 자신도  책임을 담담히 수용한다.

감독은 “이 영화는 그 책임에 대한 이야기이다.”라며 이점을 특히 강조한다. 그릇된 행위에 대한 책임지지 않는 이 사회의 잔인함에 경종을 울리기를 갈망하는 것이다. 그는 “이 영화가 소비되는 영화가 아니라, 토론되는 영화가 되기를 바란다”며 책임짐에 대한  진중함이  널리 펴져 나가기를 희망하였다.

<가시꽃>의 영어 제목은 <fatal>이다. 약자의 죽음을 가져오는(fatal) 충동적이고 유희적인 장난이 결국 강자에게도 치명적인(fatal) 그릇된 선택임을 일깨워주는 바로 ‘잔혹 美學’인 것이다.

 엔딩에서의 장미의 헛웃음의 의미는 관객이 해석해야 할 숙제다. 지속되는 아픔인지, 아님 그들에 대한 용서와 거듭남인지, 이는 철저히 관객이 도전해야 할 몫이다. 그 새로운 삶에 대한 투쟁은 하늘아래 우리에게 주어진 당연한 소명이며, 이를 게을리 함 또한 우리의 직무유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