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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처입은 치유자 ①] 상처는 누군가의 길을 비추는 별

-치유는 Fixing이 아니라 Holding

[ 상처입은 치유자 ①] 상처는 누군가의 길을 비추는 별

우리는 흔히 공동체 안에서 상처받은 이들을 보듬기 위해 냉철한 통찰이나 흔들리지 않는 단단함 같은 특별한 역량이 필요하다고 믿곤 합니다. 그러나 분석심리학의 거장 칼 융(Carl Jung)과 현대 영성의 대가 헨리 나우웬(Henri Nouwen)은 이 통념을 정면으로 반박하며, “오직 상처 입은 자만이 타인을 진정으로 치유할 수 있다”는 진리를 길어 올렸습니다. 이러한 '상처입은 치유자'의 관점에 의하면, 진정한 치유의 힘은 강함이 아니라 우리의 약함 속에 있습니다. 상처는 숨겨야 할 치부가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예민하게 감지하고 그 무게를 함께 견뎌낼 수 있게 하는 유일한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누군가를 위로한다는 것은 문제를 해결해 주는 기술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심연을 함께 건너는 동반자가 되어주는 일입니다 ◆ 헨리 나우웬이 말하는 ‘환대’로서의 치유 ‘상처 입은 치유자(The Wounded Healer)’라는 개념을 현대의 대중적인 언어로 정착시킨 인물은 네덜란드 출신의 사제이자 작가인 헨리 나우웬입니다. 1972년 출간된 그의 저서 《상처 입은 치유자》는 현대인이 겪는 근원적인 고통을 ‘단절’과 ‘외로움’으로 진단하며, 치유자의 역할을 새롭게 정의했습니다. 나우웬은 사역자나 상담자가 특별히 고통에서 면제된 존재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자신의 외로움과 상처를 솔직히 바라보고 인정할 때, 타인의 아픔을 품을 수 있는 공간이 마음속에 생긴다고 보았습니다. 이에 그는 상처를 감춘 채 누군가를 도우려는 태도를 경계하며, 그것은 “물이 없는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리려는 것과 같다”고 지적했습니다. 그에게 치유는 문제를 ‘고쳐 주는 기술’이 아닙니다. 자신의 상처를 통로로 삼아 타인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맞아들이는 ‘환대(Hospitality)’의 행위입니다. 여기서 환대란 단순히 위로의 말 몇 마디를 건네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의 고통을 서둘러 해석하거나 처방으로 덮지 않고, 그 고통이 안전하게 머물 자리를 내어주는 것을 뜻합니다. 고통받는 이는 이러한 안전한 공간 안에서야 비로소 “나는 혼자가 아니구나”라는 감각을 되찾고, 자신의 상처를 말로 옮기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치유자는 ‘정답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머무는 공간을 제공하고 그 공간에서 무너지는 시간을 함께 견뎌 주는 사람입니다. 결국 상처를 부정하지 않고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 사람만이 고통받는 이에게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라고 진심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 케이론, 고통과 불멸의 딜레마 이 심오한 개념의 뿌리는 그리스 신화 속 켄타우로스(半人半馬) 가운데 ‘현자’로 알려진 케이론(Chiron)의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케이론의 신화는 단순한 비극이 아니라, 치유자가 겪어야 할 숙명적인 역설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은유입니다. ① 풀리지 않는 역설: 최고의 의술 vs 불치의 상처 그리스 신화의 인물인 케이론은 아폴론에게 의술을, 아르테미스에게 사냥을 배운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었습니다. 아스클레피오스(의술의 신), 아킬레우스, 헤라클레스 등 수많은 영웅이 그의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비극적인 사고로 제자인 헤라클레스가 쏜 독화살을 맞게 됩니다. 그 화살에는 닿기만 해도 살이 썩어 들어가는 히드라의 맹독이 묻어 있었습니다. 문제는 케이론이 신의 혈통을 이어받은 ‘불멸의 존재’였다는 점입니다. 죽을 수조차 없었기에, 그는 영원히 살이 타들어 가는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끔찍한 고통을 덜어내기 위해 끊임없이 약초를 연구하고 의술을 연마했습니다. 여기서 위대한 역설이 탄생합니다. 자신을 치료하려는 그 처절한 노력이, 그를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의사로 만들었다는 사실입니다. ②프로메테우스와의 교환, 그리고 별이 된 상처 신화의 결말은 더욱 상징적입니다. 케이론은 제우스에게 간청하여 자신의 ‘불멸성’을 포기하고 죽음을 선택합니다. 대신 그 불멸의 권리를 제우스의 형벌을 받고 있던 프로메테우스에게 양도하여 그를 해방시킵니다. 자신의 고통을 끝내기 위한 죽음이, 인류에게 불(문명)을 가져다준 프로메테우스의 구원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제우스는 이 숭고한 희생을 기려 그를 밤하늘의 ‘궁수자리’로 올려주었습니다. 이는 치유자가 자신의 상처를 억압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그것을 타인의 구원을 위한 거름으로 삼을 때 비로소 고통에서 해방되어 별처럼 승화된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결국 나의 가장 깊은 상처를 타인을 위한 빛으로 바꿀 때, 그 희생은 단순한 상실이 아니라 서로를 살리는 거룩한 구원의 통로가 됩니다. 나를 태워 타인을 밝히는 그 순간, 영원히 낫지 않던 상처는 더 이상 저주가 아니라 세상을 비추는 빛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 칼 융과 상처 입은 치유자 분석심리학자 칼 융(C.G. Jung)은 '상처 입은 치유자(Wounded Healer)'라는 신화적 원형을 현대 심리치료의 핵심 기제로 재해석했습니다. 그는 1951년 저서 《심리치료의 실제(The Practice of Psychotherapy)》를 통해 이 개념을 구체화합니다. 그 핵심이 되는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We could say, without too much exaggeration, that a good half of every treatment that probes at all deeply consists in the doctor's examining himself, for only what he can put right in himself can he hope to put right in the patient. It is no loss, either, if he feels that the patient is hitting him, or even scoring off him: it is his own hurt that gives the measure of his power to heal. This, and nothing else, is the meaning of the Greek myth of the wounded physician." "과장 없이 말하건대, 깊이 있는 탐색이 이루어지는 모든 치료의 절반은 의사 자신의 자기 성찰로 이루어집니다. 의사는 오직 스스로의 안에서 바로잡을 수 있는 것만을 환자에게서도 바로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설령 의사가 환자에게 타격을 입거나 심지어 패배감을 느낀다 해도 그것은 결코 손해가 아닙니다. 치유의 힘을 가늠하는 척도는 다름 아닌 의사 자신의 상처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상처 입은 의사'라는 그리스 신화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이 인용문 중 다음의 두 대목은 '상처 입은 치유자'의 본질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①치유의 한계: "자신 안에서 바로잡은 것만이..." "...only what he can put right in himself can he hope to put right in the patient." "자신 안에서 바로잡을 수 있는 것만이, 환자 안에서도 바로잡을 수 있기를 희망할 수 있다." 이 문장은 치유의 한계를 명확히 규정합니다. 만약 치유자가 자신의 내면에 있는 분노, 두려움, 트라우마를 외면하고 있다면, 환자가 겪는 유사한 고통을 진심으로 이해하거나 도울 수 없습니다. 치유자가 도달해 본 내면의 깊이가, 곧 그가 환자를 이끌고 갈 수 있는 한계선이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융은 진정한 치유란 환자를 고장 난 기계처럼 수리하는 기술적 과정이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치유자 스스로 자신의 무의식과 상처, 그리고 그림자(Shadow)를 직면하고 다루지 않는다면, 그 치료는 기계적이고 표면적인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치유자에게 상처란 숨겨야 할 약점이 아니라, 탐구해야 할 자산입니다. ② 치유의 척도: "상처가 곧 힘의 척도다" "It is his own hurt that gives the measure of his power to heal." "자신의 상처가 치유의 힘을 재는 척도가 된다." 여기서 융이 사용한 'Measure'라는 단어는 매우 중요한 함의를 갖습니다. 이는 단순한 '크기'를 넘어 '기준, 척도, 측정 도구'를 뜻합니다. 즉, 치유자의 상처는 타인의 고통을 재는 '정밀한 온도계'와 같습니다. 내가 섭씨 100도의 고통으로 펄펄 끓어본 적이 있는 사람만이, 눈앞의 상대가 겪는 90도의 고통을 정확하게 감지하고 측정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내려가 보지 않은 심연으로는 결코 환자를 안내할 수 없습니다. 결국 치유자가 겪어낸 고통의 종류와 깊이, 그리고 그것을 견뎌낸 시간은 그가 타인을 이해하고 담아낼 수 있는 '공감의 용량(Capacity)'을 결정짓는 절대적인 기준값이 됩니다. ◆ 바라보는 치유자: 상처가 곧 깊이이다 이처럼 융은 진정한 치유에 대한 답을 높은 권위나 지식이 아닌,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상처’에서 찾았습니다. 자신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직면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치유의 힘, 그 역설적인 진실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 치유의 조건: 상처의 깊이 융은 치유의 능력이 학위나 자격증과 같은 외적 조건에서 비롯되지 않는다고 지적합니다. 또한 "아픈 사람이 남을 더 잘 이해할 것"이라는 막연한 도덕적 위로 역시 진정한 치유력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는 치유의 힘이 치유자의 '완벽함'이 아닌, '상처의 깊이'에서 나온다고 역설합니다. 자신의 상처를 회피하거나 피상적으로만 다룬 사람은 타인의 고통 앞에서도 피상적인 위로밖에 건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융에게 치유자의 자격이란 "자신이 얼마나 처절하게 아파보았으며, 그 고통을 얼마나 의식적으로 소화해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 능력 확장의 기회: 역전이의 활용 융은 상담 과정에서 환자가 치료자를 비난하거나 공격하는 상황조차 ‘손해’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그 순간은 치유자의 그릇을 확장할 결정적인 기회입니다. 환자의 분노와 저항이 치료자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치료자 내면의 해결되지 않은 상처가 건드려졌다는 신호이기 때문입니다. 깨어있는 치유자는 “내 안의 상처가 반응하고 있음”을 자각하고 이 순간을 놓치지 않습니다. 즉, 환자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치유자 역시 끊임없이 치유되고 성장하는 역설적인 확장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 상처 입은 자의 소명(Calling) 융은 이 논리의 정점에서 그리스 신화 속 ‘케이론(Chiron)’을 소환합니다. "이것 말고 다른 것은 없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 신화 속 '상처 입은 의사'의 진정한 의미다." (This, and nothing else, is the meaning of the Greek myth of the wounded physician.) 죽은 자도 살리는 의술을 지녔으나 정작 자신의 상처는 영원히 낫지 않아 고통받았던 케이론에 대해, 융은 그 ‘낫지 않음(Incurability)’이 케이론을 무능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치유의 신으로 만든 유일한 원천이었다고 결론 내립니다. 그의 상처가 영원했기에 타인을 향한 연민과 치유의 힘 또한 영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융의 메시지는 상처 입은 모든 인간에게 전하는 엄중한 소명입니다. 우리가 타인을 치유할 수 있는 힘의 크기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상처를 얼마나 깊이 껴안았느냐에 따라 정확히 결정됩니다. 따라서 우리의 상처는 숨겨야 할 약점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의 아픔을 읽어내며 타인의 고통과 진정으로 연결되게 하는 유일한 통로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상처 입은 치유자가 갖는 두 가지 실존적 권능 자신의 상처를 정직하게 마주하고 이를 통합해낸 치유자는 구체적으로 어떤 힘을 얻게 될까요? 이것이 바로 융과 헨리 나우웬이 공통적으로 지목한 진정한 ‘치유의 권능’입니다. 첫째, 고통의 본질을 감지하는 능력입니다. 고통을 이론으로만 배운 사람은 환자의 말을 듣는 순간 분석하려 들거나 성급한 해결책으로 덮으려 하기 쉽습니다. "그건 잘못된 생각이에요"라며 정답으로 감정을 차단하거나, "이렇게 해보세요"라며 기술적인 조언으로 상황을 종료하려 합니다. 반면 처절한 상처를 통과해 본 치유자는 다릅니다. 그는 환자의 수많은 언어 뒤에 숨겨진, 지금 이 사람이 '진짜 아파하는 지점'이 어디인지 본능적으로 포착해냅니다. 그들에게 타인의 고통은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세포가 기억하고 있는 감각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고통의 심연을 함께 견디는 능력입니다. 상처가 없는 사람도 친절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타인의 깊은 심연과 마주할 때, 그들은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래서 그 압도적인 고통을 황급히 치우려 하거나 회피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의 내면 깊은 어둠을 직면해 본 사람은 환자의 고통이 터져 나올 때 도망가지 않습니다. "아, 지금 여기서 가장 아픈 것이 올라오고 있구나"라고 담담히 알아차리며, 그 고통의 한가운데서도 함께 머무를 수 있습니다. 융이 말하는 진정한 치유력은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합니다. 그것은 "내가 너를 낫게 해줄게(Fixing)"라는 기술적 오만이 아니라, "네가 무너지지 않게 내가 여기 버티고 서 있을게(Holding)"라고 말하는 묵직한 동행의 힘입니다. 결국 자신의 아픔을 깊이 겪어내고 소화한 사람만이, 타인의 고통에 안전하게 접속할 수 있는 '영혼의 자격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상처는 누군가의 길을 비추는 별 치유자는 ‘문제를 해결해 주는 기술자’가 아니라, ‘고통의 심연을 함께 건너는 동반자’입니다. 아파본 사람은 환자의 떨리는 목소리, 흔들리는 눈빛, 그리고 무거운 침묵 속에서 고통의 냄새를 맡습니다. 그는 섣불리 타인의 고통을 짐작하거나 재단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저 그 아픔의 곁에 가만히 서서, 그 시간들을 함께 견뎌냅니다. 이때 고통의 주파수를 맞추는 ‘공명(Resonance)’이 일어납니다. 환자가 이렇게 “내가 깊이 이해받고 있다”는 강력한 치유의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은 .-치유자가 자신의 상처를 숨기지 않고, 그 아픔을 통로 삼아 환자의 고통과 진정으로 ‘함께 진동’했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비춰주는 치유자의 눈빛 속에서, 자신이 홀로 고립된 섬이 아님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진짜 치유자란 환자만 바라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깊이 자기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는 사람입니다. 그 처절한 자기 성찰의 깊이만큼, 타인을 품을 수 있는 그릇의 크기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공동체에서 상처받은 자들의 상처를 보듬어 주는 역할을 담당할 우리는 우리의 상처를 다시 정의해야 합니다. 우리가 겪은 실패와 상실, 여전히 욱신거리는 그 아픔들은 감추어야 할 부끄러운 흉터가 아닙니다. 그것은 타인의 숨겨진 고통을 읽어내는 예민한 눈이자, 누군가의 슬픔을 진심으로 감당할 수 있는 유일한 증명입니다. 그렇기에 밤하늘의 궁수자리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빛나듯, 우리가 짊어진 상처는 훗날 누군가의 어두운 길을 비추는 별이 될 것입니다.이것이 바로 상처 입은 치유자가 우리에게 전하는 가장 깊은 위로이자 희망입니다.


[ 상처입은 치유자 ②] 기사 요약과 Quiz

■ 기사 요약 1. 개요 1)제목: [상처입은 치유자] 상처는 누군가의 길을 비추는 별 2)핵심 주제: 치유의 힘은 강함·완벽함이 아니라, 상처를 직면하고 통합한 경험에서 나온다는 논지 2. 문제의식 공동체는 보통 치유자(의사·성직자·리더)에게 냉철한 통찰, 흔들리지 않는 단단함 같은 ‘강한 역량’을 요구한다. 그러나 글은 이런 통념이 실제 치유의 작동 방식과 어긋날 수 있다고 본다. 3. 핵심 주장 1)상처는 치부가 아니라 치유의 통로다. 2)상처를 통과한 사람만이 타인의 고통을 예민하게 감지하고 그 무게를 함께 견디는 방식으로 치유에 접근할 수 있다. 3)따라서 치유는 문제 해결(Fixing)보다, **고통의 시간에 함께 머무는 버팀(Holding)**에 가깝다. 4. 주요 근거와 전개 4.1 헨리 나우웬: ‘환대’로서의 치유 1)나우웬은 사역자·상담자가 고통에서 면제된 존재가 아니라고 본다. 2)자기 외로움과 상처를 인정할 때 타인의 아픔을 담을 내면의 공간이 생긴다. 3)‘환대’는 조언이나 처방이 아니라, 고통을 성급히 덮지 않고 안전하게 머물 자리를 내어주는 태도로 설명된다. 4)이 공간 속에서 고통받는 이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감각을 회복하고, 상처를 말로 옮기기 시작한다. 4.2 케이론 신화: 불치의 상처가 낳는 역설 1)케이론은 뛰어난 의술을 지녔지만, 자신은 불치의 상처를 안고 고통을 겪는다. 2)자기 고통을 덜기 위한 노력(약초 연구·의술 연마)이 결과적으로 최고의 치유자를 만든다는 역설이 제시된다. 3)불멸성을 포기해 프로메테우스를 해방시키는 결말은, 고통이 타인의 구원으로 전환될 수 있음을 상징한다. 4.3 칼 융: 치유의 척도는 ‘치유자 자신의 상처’ 1)융은 깊은 치료의 상당 부분이 치료자의 자기 성찰로 이루어진다고 본다. 2)“자기 안에서 바로잡을 수 있는 것만이 환자 안에서도 바로잡을 수 있다”는 진술로, 치유의 한계를 규정한다. 3)‘Measure(척도)’는 상처가 치유자를 약화시키는 요소가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가늠하는 기준/측정도구라는 의미로 쓰인다. 5. 결론 및 시사점 1)치유자는 ‘문제를 해결해 주는 기술자’가 아니라 고통의 심연을 함께 건너는 동반자로 규정된다. 2)상처는 제거 대상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타인의 고통을 알아보고 버틸 수 있게 하는 치유 역량의 기반이 된다. 3)최종 메시지는 “상처는 저주가 아니라, 누군가의 길을 비추는 별이 될 수 있다”는 상징으로 정리된다. ■ Quiz 1)글에서 말하는 ‘상처 입은 치유자’ 관점의 핵심은 무엇인가?① 치유는 강함과 완벽함에서 나온다② 치유는 약함과 상처를 통과한 경험에서 나온다③ 치유는 권위와 지식의 양에서 결정된다④ 치유는 상대를 설득해 변화시키는 기술이다 정답: ②해설: 글은 “치유의 힘은 강함이 아니라 약함 속에 있다”고 말합니다. 상처를 통과한 경험이 타인의 고통을 감지·견디게 하는 통로라는 주장입니다. 2)나우웬이 말한 ‘환대(Hospitality)’에 가장 가까운 설명은?① 정답을 주고 행동계획을 설계해 주는 것② 고통을 빨리 분석해 원인을 찾아주는 것③ 고통이 안전하게 머물 공간을 내어주는 것④ 문제를 대신 해결해 결과를 만들어 주는 것 정답: ③해설: 글은 환대를 “해석·처방으로 덮지 않고, 고통이 안전하게 머물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3)나우웬이 경고한 “물이 없는 우물” 비유가 겨냥하는 태도는?① 자기 상처를 숨긴 채 타인을 돕는 태도② 전문 지식 없이 성급히 조언하는 태도③ 상대의 말을 끊고 자기 얘기만 하는 태도④ 공감만 하고 해결을 미루는 태도 정답: ①해설: “상처를 감춘 채 돕는 것은 물 없는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리는 것”이라는 문장이 직접 근거입니다. 4)케이론(Chiron) 신화가 보여주는 역설로 가장 적절한 것은?① 남을 치유하는 능력은 자신도 완치할 수 있을 때 생긴다② 불멸이기에 고통이 없고, 그래서 치유자가 된다③ 자기 불치의 고통을 줄이려는 노력이 최고의 의술로 이어진다④ 치유자는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단련해야 한다 정답: ③해설: 케이론은 낫지 않는 고통을 줄이기 위해 약초·의술을 연구했고, 그 처절한 노력 자체가 “가장 뛰어난 의사”를 만든다는 역설이 핵심입니다. 5)케이론이 불멸성을 포기해 프로메테우스를 해방시키는 결말이 상징하는 바는?① 고통의 종료는 개인에게만 유익하다② 자기 고통을 끝내는 선택이 타인의 구원으로 연결될 수 있다③ 치유는 반드시 죽음으로만 완성된다④ 희생은 언제나 무의미하다 정답: ②해설: 글은 “나의 가장 깊은 상처를 타인을 위한 빛으로 바꿀 때… 구원의 통로”라고 말합니다. 개인의 고통 종결이 타인의 해방으로 이어지는 상징입니다. 6)융의 문장 “치유의 힘을 가늠하는 척도는 의사 자신의 상처”에서 ‘척도(Measure)’의 의미는?① 상처의 ‘크기’만을 의미한다② 상처가 치유자를 무능하게 만드는 원인이다③ 타인의 고통을 정밀하게 감지하는 기준/측정도구 역할이다④ 상처는 치료에서 제거해야 할 장애물이다 정답: ③해설: 글은 Measure를 “기준·척도·측정 도구”로 풀고, 상처를 “정밀한 온도계”에 비유합니다. 즉 상처가 공감의 정밀도를 만드는 기준입니다. 7)글이 대비한 ‘Fixing’과 ‘Holding’ 중 치유자의 핵심 역할로 제시된 것은?① Fixing: 문제를 고쳐주는 기술② Holding: 옆에서 버티며 무너지지 않게 돕는 동행③ Fixing: 권위로 설득해 복종시키기④ Holding: 침묵으로 회피하기 정답: ②해설: 글은 치유를 “기술적 수리(Fixing)”가 아니라 “무너지지 않게 옆에 서는 버팀(Holding)”으로 강조합니다. 주관식(문제 아래 답안·해설 형식)8) 환대(Hospitality)를 한 문장으로 정의하라. (20~40자)모범답안(예): “고통을 서둘러 처방하지 않고 안전하게 머물 자리를 내어주는 태도.”해설: 글의 정의가 그대로 근거입니다(해석·처방으로 덮지 않음 / 안전한 공간 제공). 9) 케이론 신화의 ‘치유자의 역설’을 ‘A이지만 B다’ 형태로 쓰라. (2문장 이내)모범답안(예): “자신의 상처는 낫지 않지만, 그 상처 때문에 남을 더 잘 치유한다.”해설: ‘불치의 상처’가 ‘최고의 의술’로 이어진다는 대목이 역설의 핵심입니다. 10) 리더십 상황에서 Fixing이 아니라 Holding이 필요한 장면을 쓰고 이유를 설명하라. (4~6문장)모범답안(예):“팀이 큰 실패를 겪고 한 구성원이 무너질 때, 리더가 곧장 해결책만 제시하면 그 사람은 더 고립된다. 이때는 원인 분석보다 먼저 감정이 안전하게 머물 공간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충분히 말하게 듣고, 버티는 시간을 함께 견뎌 주는 것이 Holding이다. 그 안전감이 생겨야 당사자는 ‘혼자가 아니다’는 감각을 되찾고 회복의 언어를 시작할 수 있다.”해설: 글의 결론(치유자는 기술자가 아니라 동반자)과 환대(공간 제공)가 리더십 장면으로 전이된 적용입니다.

[빅터 프랭클의 내적 자유와 결단 ① ] '마지막 빵'을 내어줄 수 있는 방법: Yes to Supra-meaning

[빅터 프랭클의 내적 자유와 결단 ① ] '마지막 빵'을 내어줄 수 있는 방법: Yes to Supra-meaning

외부 조건과 환경이 인간의 행위를 완전히 결정할 수 있을까요? 나치 강제수용소의 수감자였던 빅터 프랭클은 그 지옥 같은 현실 한가운데서,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관찰했습니다. 누군가는 생존을 위해 잔혹한 약탈자가 되었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자신의 마지막 빵을 건네며 타인을 위로하는 성자의 길을 택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동일한 악조건 속에서도 인간의 반응은 정반대로 갈라졌습니다. 어떤 이는 상황에 함몰되지만, 어떤 이는 인간다운 품위를 끝내 지켜낸 것입니다. 프랭클이 수용소에서 관찰한 내용의 핵심은 ‘내적 자유’의 방향입니다. 태도를 선택하는 능력인 내적 자유가 결핍을 채우려 외부를 공격하거나 내면을 황폐화하는 약탈적 자유로 흐를 수도 있지만, 반대로 고통 속에서 궁극적 의미에 응답하며 존엄을 지키는 자유에 도달하기도 합니다. 결국 인간은 주어진 조건 속에서도 내적 자유를 궁극적 의미를 향해 행사할 때, 상황을 초월할 수 있는 존재라는 점을 프랭클은 확인한 것입니다. ◆ 프랭클의 '내적 자유' 개념 정리 빅터 프랭클은 나치 강제수용소라는 극한의 환경에서 인간의 자유에 대한 깊은 통찰을 얻었습니다. 그는 외적 자유와 내적 자유를 구분하며, 진정한 인간다움은 후자에 뿌리를 둔다고 강조합니다. 외적 자유는 상황과 조건을 바꾸거나 통제하는 자유입니다. 이는 수용소, 독재, 질병, 사고 등 외부 요인에 의해 언제든지 빼앗길 수 있습니다. 인간은 이러한 외부 환경을 완전히 장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적 자유는 조건을 초월하는 '태도 선택의 자유'를 말합니다. 프랭클은 어떤 상황에서도 박탈되지 않는 '최소한의 자유'가 존재한다고 봅니다. 그것은 바로 "주어진 상황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를 선택하는 자유"입니다. 앞선 수용소 사례에서 보이듯이 수용소라는 동일한 극한 조건에서 프랭클은 극명한 차이를 목격합니다. 어떤 사람은 굶주림과 폭력 속에서 잔혹해져 약자를 짓밟고 생존을 위해 타인을 희생합니다. 반면 어떤 사람은 마지막 빵을 나누고, 동료를 위로하며,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끝까지 지키려 노력합니다. 이 관찰에서 프랭클은 중요한 결론을 도출합니다. 외부 조건이 인간을 자동적으로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같은 지옥 속에서도 한 사람은 ‘상황의 장난감’이 되기를 선택하고, 다른 사람은 상황 속에서도 인간다움을 지키는 길을 선택합니다. 이 선택의 여지가 바로 내적 자유입니다. ◆ 내적 자유와 결정 ① 내적 자유에 대한 프랭클의 설명 프랭클은 <Man's Search For Ultimate Meaning>에서 내적 자유를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자유’로 이해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The last of the human freedoms: to choose one's attitude in any given set of circumstances, to choose one's own way. And there were always choices to make. Every day, every hour, offered the opportunity to make a decision, a decision which determined whether you would or would not submit to those powers which threatened to rob you of your very self, your inner freedom; which determined whether or not you become the plaything to circumstance, renouncing freedom and dignity...” “인간에게서 빼앗을 수 없는 마지막 자유는, 어떤 상황에 놓이든 간에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자유’, 그리고 자신의 길을 선택할 자유입니다. 그리고 선택의 여지는 언제나 존재했습니다. 날마다, 매 시간마다, 하나의 결정을 내릴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 결정이란, 여러분의 ‘자기 자신’, 곧 내적 자유를 빼앗으려 위협하는 힘들에 굴복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정은 또한, 여러분이 상황의 장난감이 되어 자유와 존엄을 포기할 것인지, 그렇지 않을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② 내적 자유와 결정(결단) 그의 주장은 내적 자유와 결정의 두 축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 내적 자유 우선 내적 자유(inner freedom)란 어떤 상황에서도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능력, 곧 자신의 태도와 길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프랭클이 말한 “인간에게 남아 있는 마지막 자유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태도를 선택하고 자신의 길을 선택할 자유”라는 구절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이 자유는 상황에 따라 존엄을 지킬 수도, 반대로 스스로 포기할 수도 있는 자유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강제수용소처럼 외적 조건을 전혀 바꿀 수 없는 상황에서 외적 자유는 사실상 박탈되어 있지만, 그 조건에 대해 어떤 태도로 응답할지 여전히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 프랭클의 주장입니다. 이런 점에서 타인을 짓밟는 선택이든, 마지막 빵을 나누는 선택이든 둘 다 “어떤 태도를 취할지 결정할 수 있는 내적 자유”의 행사라는 점에서는 구조가 같습니다. 다만, 한쪽은 그 자유를 자기보존과 굴복을 향해 사용하고, 다른 한쪽은 자기초월과 인간다운 품위를 향해 사용한 결과입니다. ⒝ 결정 이때 결정적인 것은 그 자유를 사용해 내리는 ‘결정(a decision)’입니다. 프랭클은 이 결정을 두 갈래로 설명합니다. 하나는 “자신과 내적 자유를 빼앗으려 위협하는 힘들에 굴복할 것인가 아닌가”를 가르는 결정이며, 다른 하나는 “환경의 장난감이 되어 자유와 존엄을 포기할 것인가 아닌가”를 가르는 결정입니다. 다시 말해, 같은 내적 자유를 가지고도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가 이후의 자신을 나누는 기준이 됩니다. 따라서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인간다움을 지키고 의미를 발견할 것인지, 아니면 상황의 장난감이 될 것인지를 가르는 근원은 내적 자유에 근거한 결단입니다. 같은 막사, 같은 굶주림이라는 동일한 조건 속에서 어떤 수감자는 살아남기 위해 타인을 짓밟는 선택을 하고, 다른 수감자는 자신의 마지막 빵을 나누며 동료를 위로하는 선택을 하는 사례는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프랭클은 이 차이를 “외적 조건의 차이”가 아니라, 내적 자유를 어떻게 행사했는가의 문제, 곧 결정의 문제로 이해합니다. 결국 매 순간의 태도 선택이 존엄 유지 여부의 기준이 됩니다. 날마다, 매 시간 주어지는 작은 선택들이 자신의 내적 자유를 지켜내는 결정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상황의 장난감이 되어 스스로 자유와 존엄을 포기하는 결정이 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모욕과 폭력 앞에서 “나는 어쩔 수 없는 피해자” 자리에 머무를 것인지, 아니면 “이 조건 속에서도 어떻게 인간답게 행동할 것인가”를 스스로 묻고 선택할 것인지는 결국 각자의 결단에 달려 있으며, 프랭클은 바로 이 결단들의 연속을 내적 자유의 실질적 내용으로 이해합니다. ② 내적 자유의 함의 정리하면, 프랭클의 내적 자유는 다음과 같은 함의를 지닙니다. ⒜ 나는 조건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나는 수용소, 가난, 실패, 모욕 그 자체가 아닙니다. 나는 그러한 조건 속에서도 태도를 선택하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독립된 주체입니다. ⒝ 매 순간의 태도 선택이 품위를 결정합니다. 날마다, 매 시간 이루어지는 작은 선택들이 쌓여 내가 외적 조건에 완전히 무너진 존재인지, 아니면 여전히 스스로를 인간으로 대우하는 존재인지가 드러납니다. ⒞ 내적 자유는 결단의 자유입니다. 이는 기분을 마음대로 바꾸는 '기분 자유'가 아닙니다. 기분이 최악이어도 어떤 말과 행동을 할지, 어떤 가치와 기준을 따를지를 결정하는 '결단의 자유'입니다. 결국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을 수는 있어도, 마지막 인간의 자유──주어진 상황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선택하는 자유──만큼은 빼앗을 수 없습니다. 프랭클은 이 내적 자유야말로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인간다움을 지키고 의미를 발견하게 하는 근원이 됩니다. ◆ 의미와 자기초월 내적 자유를 가지고 있는 우리는 타인을 짓밟을 수도 있고, 타인과 마지막 빵을 나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어떤 태도로의 선택은 내적 자유에 의한 결단의 산물입니다. 그런데 빵을 나눌 수 있는 인간다운 선택으로 이끄는 힘은 어디서 나올 수 있을까요?프랭클은 자기초월(self‑transcendence)의 능력의 축과 의미를 향한 의지(will to meaning)의 축으로 설명합니다. ① 의미를 향한 의지 의미를 향한 의지란 인간은 단순히 쾌락·권력만을 좇는 존재가 아니라, “어떤 삶이 의미 있는 삶인가”를 묻고 그 방향으로 살고자 하는 욕구를 갖고 있다는 전제를 말합니다. 같은 굶주림 속에서도 “어떻게든 살아만 남으면 된다”에 머무를 수도 있고, “이 상황 속에서도 어떤 사람으로 남고 싶은가”를 묻고 거기에 맞는 행동을 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프랭클은 후자를 의미지향적 선택으로 봅니다. ‘악독한 상황에서도 지켜야 할 의미가 있다’는 인식은, 때로 자기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인간다운 선택을 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의미지향성의 뿌리는 무엇일까요? 프랭클은 인간 안에 양심(conscience)이 있다고 봅니다. 양심이란 “이 상황에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직관적으로 알려주는 안테나”로서, 단순 도덕 규범이 아니라, “지금 이 구체적 상황에서 내가 책임져야 할 고유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감지하는 능력입니다. 따라서 같은 자유를 가지고도 어떤 사람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뭐든 한다”는 쪽으로, 어떤 사람은 “이 지옥 속에서도 인간다움을 지키겠다”는 쪽으로 양심·의미 감각을 따르는 선택을 합니다. 결국 프랭클은 인간다운 선택을 할 수 있는 힘은 ‘내적 자유 + 양심’에서 나옵니다. ② 자기초월(self‑transcendence)의 능력 프랭클은 인간의 핵심 능력을 자기초월이라고 부릅니다. 자기 초월이란 자기 자신, 자기 이익, 자기 안전만을 기준으로 움직이는 차원을 넘어, 가치, 사명, 궁극적 의미 등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능력입니다. 수용소에서도 어떤 사람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뭐든 한다”는 자기보존에 갇혔고, 어떤 사람은 “이 지옥 속에서도 인간다움을 증언하겠다”는 쪽으로 자신을 초월했습니다. 프랭클에게서 “마지막 빵을 나누는 선택”은 자기 보호 본능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자기 밖 (궁극적 의미, 사랑, 가치)를 향해 나가는 자기초월의 표현이었습니다. 결국 프랭클에게 “인간다운 선택”은, 자기보존보다 궁극적 의미·가치 쪽으로 자신을 넘어가려는 자기초월의 선택의 결과입니다. ◆ 내적 자유는 무엇을 기준으로 행사되는가? “궁극적 의미” 그렇다면 우리의 내적 자유가 의미를 추구할 때, 무엇을 기준으로 행사되는 것일까요? 프랭클은 그 최종적 근거를 ‘궁극적 의미(Supra-meaning)’, 즉 하나님으로 이해했습니다. 우리는 구체적 상황에서는 양심이 포착하는 “지금 이 순간의 의미”를 따라 행동하는데, 그 배후에는 “삶 전체가 무언가 더 큰 질서/하나님 안에서 의미를 가진다”는 궁극적 의미에 대한 신뢰가 흐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내적 자유는 무엇을 기준으로 행사되는가에 대한 답은 “무엇을 향해 자기초월을 하느냐”의 문제이며, 이는 곧 궁극적 의미로 귀결됩니다. 정리하면, 프랭클의 관점에서 말하면, 내적 자유 행사의 기준은 가까운 층위에서는 양심이 가리키는 구체적 의미와 가치이며, 더 깊은 층위에서는 그 모든 의미를 가능하게 하는 궁극적 의미, 곧 하나님에 대한 열림입니다. ◆ Yes to Supra-meaning 내적 자유를 지닌 존재인 우리는 수용소와 같은 극한의 결핍 속에서, '상황의 장난감'이 되어 타인을 짓밟을 수도, '자기초월의 주체'가 되어 인간의 품격을 증명할 수도 있습니다.이때 약탈의 본능을 이기고 존엄을 선택하게 하는 원동력은, 양심이 가리키는 시대적 사명과 궁극적 의미(하나님) 앞에 자신을 세우는 순종의 태도입니다. 즉 내적 자유가 자아의 폐쇄적 욕구만을 향할 때 그것은 타인을 수단화하는 약탈로 전락하기 쉽지만, 양심을 통해 나를 초월한 ‘궁극적 의미’를 지향할 때 비로소 환경과 본능을 압도하는 실존적 힘을 얻습니다. 수용소의 지옥 속에서도 존엄을 지켜낸 이들은 단순히 의지가 강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통을 ‘궁극적 의미’라는 거대한 질서 속에 편입시켰던 것입니다. 이처럼 궁극적 의미를 향해 “예”라고 응답(Yes to Supra-meaning)하는 순종이야말로, 인간의 고귀한 자유를 진정한 인간다움으로 완성하는 최후의 원동력이 됩니다. 결국, 자기 이익이나 안전, 보존만을 기준으로 움직이는 차원을 넘어, 나를 넘어선 가치, 사명, 공동체, 혹은 궁극적 의미를 향해 자기초월의 능력을 발휘할 때, 우리는 자기보호 본능에 갇히지 않고 더 큰 가치를 위해 '마지막 빵'을 내어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사회가 한 단계 더 성숙한 연대의 공동체로 도약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될 것입니다.







[ 물적분할과 인적분할의 성격 ] 물적 분할 문제의 보완 필요 ◆ 물적분할 ① 물적분할의 성격 = 현물출자 물적분할은 기존기업의 자산 부채를 신설기업에게 포괄 이전하고 신설기업은 주식을 발행하여 주식100%를 기존기업에게 이전하는 분할을 말합니다. 물적분할의 성격은 현물출자와 같습니다. 예를 들어 A사는 전자 사업부와 건설 사업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A사는 물적분할하여 건설사업부의 순자산을 신설기업인 B사에 이전하고, B는 A에게 신주100%를 발행하였습니다. 이러한 물적분할로 인해, A기업의 사업구성은 분할이전의 ‘전자사업부 + 건설 사업부’에서 분할 이후의 ‘전자사업부 + B의 주식’으로 변경됩니다. 이를 분할회계처리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지배주주 A사: (차) 종속기업 주식 ×× (대) 건설사업부 순자산 ××, 처분익×× 종속회사 B사: (차) 건설 순자산(공정가액) ×× (대) 자본×× 위의 회계처리처럼, A사는 신설기업B에게 건설사업부의 순자산을 이전하고 그 대가로 B주식을 인수하였습니다. B는 A로부터 건설자산을 이전받고 A에게 B주식을 발행하였습니다. 이처럼 물적분할은 현물출자와 다르지 않습니다. ② 물적분할 성격 = 매각거래 물적분할의 경우, 분할회사는 분할을 매각거래로, 신설회사는 분할회사로부터

[ 감세와 고율관세정책 간의 모순 ] ‘트럼프 2기에 고율 관세가 정책의 핵심’이 되는 이유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경제정책은 감세와 고관세의 조합으로 요약됩니다. 트럼프 2기 행정부는 트럼프 1기 행정부 시절 2018년에 발효된 일몰법인 TCJA(감세와 일자리 법 :Tax Cuts and Jobs Act)를 연장 또는 영구화 할 것으로 보입니다. 게다가 기존의 TCJA에 더하여, 추가 세금 인하를 고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감세로 인해 촉발되는 재정적자는 고율관세로 메울것으로 예상되는데, 이러한 고율관세는 미국경제에 적지 않은 부담을 안겨 줄것으로 예상됩니다. ◆ 거침 없는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입법 감세를 정책 노선으로 삼은 트럼프 2기 행정부는 장애물 없이 원하는 모든 법안을 뚝딱 만들어 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트럼프 당선인이 속해있는 공화당이 대선과 함께 치러진 의회 선거에서 입법권을 장악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미국 의회에서 법안이 입법화되기 위해선, 동일한 법안이 상원 및 하원에서 각각 통과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하원에서 발의된 법안은 관련 위원회(소위원회의 심사와 청문회, 상임위에서 수정과 표결)를 거쳐 본회의에 회부된 후 과반수 찬성으로 통과됩니다. 하원에서 통과된 법안은 상원으로 전달됩니다. 상원의 관련 위원회를 거친 후 본

[ 기업 다각화의 장단점 ] 산업다각화와 국제다각화의 장단점은? 기업다각화는 산업다각화와 국제적 다각화로 구분됩니다. 이러한 다각화는 각각의 장단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산업다각화 산업다각화는 기업가치에 긍정적인 효과와 부정적인 효과를 낳습니다. ①긍정효과다각화로 인해 현금흐름 상관성이 낮을 경우, 다각화는 현금흐름의 안정화 효과를 가져 옵니다. 이러한 현금흐름안정은 기업의 위험을 감소시켜 자본조달비용을 낮추고 부채조달능력을 증대시킵니다. 한 기업이 경기변동에 대해 민감하게 변화하는 경우, 그 기업의 수익은 시장전체의 경기변동과 높은 상관관계를 보입니다. 기업의 수익률 변동이 시장전체의 수익률 변동과 동조되어 나타나는 겁니다. 이처럼 그 기업의 수익률의 변동성과 시장전체기업들의 평균수익률의 변동성이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면, 이는 그 기업의 체계적 위험인 베타가 높다는 의미입니다. 기업의 베타가 높다면, 그 기업의 자기자본비용은 높아집니다. 또한 자기자본비용과 타인자본비용의 가중평균인 가중평균자본비용도 높아지게 됩니다. 결국 높은 자본비용은 기업 가치를 낮추게 됩니다. 기업 가치는 영업현금흐름에서 자본적 지출을 차감한 금액을 위험(재무위험과 영업위험)과 자본조달활동을 반영한 가중평균자본비용으로 할인한 금액인데, 분자인 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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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된 믿음 > [ 말씀 QT ] 하나님의 성품에 근거한 자발적 위험노출 "나는 너를 믿어(I trust you).“ 이 말을 들을 때, 우리는 과연 상대방의 무엇을 믿는 것일까요? 이는 신뢰의 본질에 대한 질문과 직결됩니다. 여기서 신뢰의 근거는 일반적인 통념과 사회심리학적 관점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입니다. 중고차 거래가 그 예입니다. 우리가 오랜 친구에게 차를 살 때 느끼는 '일반적 신뢰'는 친구라는 관계에 기반하여 "설마 친구인 나에게 결함이 있는 차(레몬차)를 팔아 역선택의 위험에 빠뜨리겠어?"라는 기대입니다. 반면, 사회심리학적 관점 (Mayer et al. 모델)의 신뢰는 다릅니다. 이러한 신뢰는 단순히 친구의 선의만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가 제공하는 차량 점검 데이터와 정비 이력을 통해 객관적인 상태를 확인하고, 그 정보의 투명성과 전문성에 기반하여 상대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일반적 신뢰는 상대방의 도덕성(선의)만 있어도 형성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회심리학적 신뢰는 상대방의 도덕성(선의)에 더해 실력(능력)과 정직성이 모두 충족될 때 비로소 성립합니다. ◆클라이머와 빌레이어의 사례 ① 상황 이러한 차이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극한의 상황입니다. 로프 하나에 생명을 맡겨야 하는 클라이머와 빌레이


[Music & Mind] 라흐마니노프의 <보칼리제>: 부족함을 안고도 흐르는 존엄 라흐마니노프의 <보칼리제>의 선율은 애잔하지만 비탄으로 무너지지 않습니다. 상승과 하강이 반복되며, 어느 한 지점에서 “끝났다”라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라흐마니노프의 〈보칼리제〉는 이렇게 ‘부족함을 포함한 채 유지되는 존엄’을 소리로 보여줍니다. 이는 마치 <여우와 포도>우화의 내용과 달리 합리화의 틀에서 탈출한 현명한 여우가 “단지 점프력이 부족할 뿐, 나의 존재가 무능한 것은 아니다”라고 냉철하게 선을 긋는 순간과 같습니다. 그것이 특정 기능의 약함이 존재 전체의 무능으로 번지지 않게 막아서는 지혜입니다. 결핍을 안고도 품위를 지키는 이 단단한 마음가짐이야말로, 비탄에 빠지지 않고 끝없이 이어지는 이 노래처럼 우리 삶을 지속하게 하는 힘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곡에 파국적인 클라이맥스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반드시 도달해서 깃발을 꽂아야 할 정점(Must)이 없고, 그저 지속 가능한 흐름만이 존재합니다. 이는 우리 마음속에서 “오늘·여기·반드시”라는 절대 규칙을 내려놓는 과정과 닮아 있습니다. “되면 좋지만, 안 돼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는 ‘선호(Preference)’의 영역으로 넘어갈 때, 비로소 삶은 강박을 벗고 흐르기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