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1 (목)

  • 맑음동두천 6.6℃
  • 구름조금강릉 7.8℃
  • 맑음서울 7.6℃
  • 맑음대전 6.3℃
  • 맑음대구 7.7℃
  • 맑음울산 7.1℃
  • 맑음광주 6.9℃
  • 맑음부산 7.9℃
  • 구름조금고창 7.3℃
  • 맑음제주 10.0℃
  • 맑음강화 7.3℃
  • 맑음보은 5.4℃
  • 맑음금산 6.0℃
  • 맑음강진군 8.7℃
  • 맑음경주시 8.4℃
  • 맑음거제 7.2℃
기상청 제공

정치일반

[사회자본과 권력구조 개편]권력구조의 수평적 재편으로 정의의 조건을 세워야 -- 부정의 부정을 통한 비약의 밑거름 마련 필요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깃들 무렵에야 비로소 날개를 편다.”  (헤겔의 ‘법철학’ 서문에서) 

이 구절에서 ‘(지혜의 여신인)미네르바(가 데리고 다니는)부엉이’는 철학을, ‘황혼’은 한 시대가 마감되는 즈음을 은유한다.  

이 두 문구에 의하면,  그 시대의 가치· 정치형태의 의미등은  시대가 혼돈으로 마감되는 시점에야  비로소 해석될 수 있다.  철학자들은 현실을 예견할 수 없고, 단지  사후적으로 현실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12세기 프랑스의 자치 주민공동체였던 코뮌이 쇠퇴한 후, 마키아벨리가 시민적 덕목을 중심으로 안정된 공화제 정부의 조건에 대해 연구한 것을 들 수 있다.  

그렇다고 뒷북을 치는 현실 분석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한 시대의 해석은 한 시대를 부정하고 또 다른 시대를 위한 준비가 된다. 이는 마치 밀알이 否定되어 싹이 나와 성장하면 열매가  맺어지고,  애초의 밀알은 더 많은 밀알을 생산하는 이치와 같다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否定은 다시 否定을 낳아 열배 백배의 수확물을 거두게 된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가치를 파악하고 이를 질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내일의 또 다른 태양’을 맞이하기 위한 전제가 될 것이다. 


◆사회자본의 긍정 효과

#1. 주민들 간에 교류가 활발하고 함께 공동문제를 해결하는 한 마을이 있다.  마을 사람들이 서로 협력하여 마을 초입에 꽃길을 조성하였다. 이 꽃길은 마을 주민뿐만 아니라 그 곳을 지나가는 행인들에게도 마음의 위안을 안겨주게 된다. 공동체의 상호신뢰가  공공재를 생산하고 긍정적 외부효과를 가져온 것이다. 

#2. 가을이 되어 이 마을 사람들이 벼를 추수하게 되었다. 가장 바쁜 농번기에 마을은 두레를 조직한다. 한 집마다 한명씩 일꾼을 내어, 이들이 함께 힘을 모아 마을 전체 논들의 벼를 추수하였다. 

농번기가 아닌 때는, 마음 맞고 친한 이웃 몇몇이 서로 품을 빌려 농사일을 처리하였다. 이러한 품앗이는 내가 도움을 주면 상대가 나에게 도움을 줄 것이라는 기대에 따라 이루어졌다. 도움을 도움으로 갚는다는 신뢰가 노동력을 절감하는 자산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위의 사례들은 社會資本이 공동체에 미치는 긍정적인 효과를 언급한 것이다. 공동체의 구성원들 간에 상호이익을 기대하는 신뢰(信賴)가 쌓이게 되면, 이러한 신뢰관계의 연결망(連結網,네트워크)이 비용을 줄이거나 미래의 잠재력을 생산하는 자산(資産)을 구축하게 된다. 


◆ 사회자본의 부정적 효과 

하지만 신뢰의 네트워크가 항상 긍정적인 결과만을 가져 오는 것은 아니다.  부정적인 외부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兩價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관계 네트워크가 사회에 끼치는  대표적인 惡 영향은 네트워크 형성으로 인한 사적 신뢰가 지나치게 넘쳐난다는 점이다.  그 결과 사적신뢰 과잉은 제도와 규칙에 대한 공적 신뢰를 약화시키게 된다. 

예를 들어 사업과 거래의 성공을 위해선  ‘아는 사람’이 중요하다. 거래에서 경쟁자보다 우위에 서기 위해 혹은 사업에서 목표하는 바를 얻기 위해, 시장참여자들은 시장의 공정한 경쟁과 질서를 신뢰하기보다 공적자원과 규칙을 관리하는 힘 있는 공직자들을 먼저 찾는 경향이 있다. 

이 과정에  브로커가 위력을 발휘한다. 힘 있는 공직자와 거래자를 매개하는 브로커의 확보는 사업의 사활이 걸린 문제이다.  거래자는 규칙의 집행자와 끈끈한 연결망을 맺고 있는 연고자를 찾아, 그와 사회적 자본을 형성한다. 이 네트워크는 상호 기대와 의무의 신뢰관계를 구축하여, 경쟁자를 앞지르거나 목표하는 바를 쉽게 이루게 된다. 

공적자원의 배분에는 이처럼 크로니즘(cronyism 정실주의 측근주의)이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다.  규칙의 관리자와 신뢰의 연결망을 맺고 있는 측근들이 공공영역을 사유화하는 관행은 낯설지가 않다. 

(크로니즘은 원론적으로 인사권자가 자신이 신뢰하는 측근을 자격과 무관하게  낙하산식으로 공적 지위에 투하하는 관행을 말한다. 인사권자와 지위의 수혜자는 일반적으로 기대와 의무의 신뢰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

아담 스미스는 이러한 부정의 네트워크를 ‘대중에 대한 음모’(conspiracies against the public)라 비판하였다.  그는 “같은 직종의 종사자들의 모임은 여흥이나 즐거움만을 위해 만나는 일이 없다. 단지 대중에 대한 음모, 가격 담합을 위해 만날 따름이다.”라고 말하였다.  사적신뢰가 사회적 파당으로 전환되어 사회적 통합을 저해한다는 것이다. (이재열)

결국 공직자와 그의 측근간의 사적신뢰는 시장참여자들과 측근간의 사회자본의 부적절한 연줄을 맺어주는 매개가 되어, 부정의 네트워크를 통한 공적영역을 잠식해가는 공유지의 비극이 나타나게 된다. 이로 인해 제도와 규칙으로 인한 시장거래는 실종하고, 부정의 연줄이 거래를 성립시키는 비시장의 거래가 작동하게 된 것이다.   




◆신뢰가 모두 사라지면 공동체의 발전은 힘들어 

사적신뢰의 과잉을 낮추고 제도의 신뢰를 높이는 것은 우리사회에 만연한 비시장 거래를 시장의 규칙에 근거한 거래로 전환시키는 당면한 개혁과제이다. 

이는 법적 공정성과 관련된 문제이다.  노력에 상응한 결과라는 공정성이 훼손된다면, 힘이 정의라는 정글의 법칙만이 지배하는 사회가 된다. 이 사회에서 공적 신뢰는커녕 공동체의 사적 신뢰조차 사라지고, 가족만이 유일한 신뢰의 대상이 된다. 

신뢰가 사라진 사회엔 더 이상 정치적 경제적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로버트 퍼트남은 이러한 신뢰와 발전의 상관관계를 연구한 미국 정치학자이다. 그는  이탈리아 남부 지방의 자치 실패와 북부지방의 성공에 대한 이유를 분석하면서, 두 지방의 실패와 성공의 차이는 불신(distrust)과 신뢰의 차이라는 점을 실증하였다. 

남부지방의 주민들은 이웃과 남을 믿지 못하였다. 지역의 문제등 공적인 일들은 자신의 일과 무관하다 여기고 지역의 공동문제에 무관심하였다. 

그들은 단지 가족만을 신뢰의 대상으로 인정하였다.  가족의 물질적 이익만을 생각하였고, 남들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았다. 

반면 북부지방의 시민들은 공공의 문제로 서로 연계되어있었다. 성가대· 문학서클· 라이온스 클럽등에서 이웃들과 함께 활동하였고, 선거에서도 적극 참여하였다. 이들은 공적인 일들은 자신의 일의 일부로 여겼다. (퍼트넘)

이처럼 신뢰가 가족이나 친족에만 존재하고 가족의 울타리를 넘지 못하는  ‘비도덕적 가족주의’(amoral familism)는 공동체의 발전을 막는다고 퍼트넘은 분석하였다. 


◆ 수직적 네트워크의 공동체와 권력구조의 수평적 재편

그렇다면 사적신뢰를 낮추고 공적신뢰를 높이는 방법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 공적인 제도화가 없다면 사적신뢰는 폐쇄적인 파당으로 파편화된다는 지적이 그 답일 것이다.  (이재열)

제도의 우선성이 강조 된다면, 어떤 제도를 채택할 것인가는  공동체의 성격에 달려 있다.   

우리사회는  폐쇄적인 수직적 네트워크로 설명할 수 있다.  개인 간의 사적 신뢰는 깊지만 공적제도에 신뢰가 낮으며, 동시에 수직적으로 위계구조가 성립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재열)

이러한 네트워크의 정점에 위치한 조직이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에 본거지를 둔 마피아이다. 이 공동체는  힘과 권력이 있는 인물을  중심으로 구성원간의 유대가 가족처럼 맺어진 구조를 지니고 있다.  내부 응집력은  사회의 규칙과 제도의 질서보다 공동체의 사적 질서를 우선시하도록 한다.  이러한 연결망을 지니는 사회를 마피아사회라 부르기도 한다.(이재열)  

(영화<대부>에서  미국 마피아의 두목, 돈 코를레오네는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 출신이다. 프랜시스 코폴라감독은 이 영화에서 영화의 리얼리티를 위해 시칠리아계 미국인들을  대거 출연시켰다. 시칠리아가  마피아의 본거지였기 때문이다.)   

수직적 네트워크가 특징인 공동체에서 민주화는  권력구조를 수평적으로 재편하고 상호 견제하는 것이다.(이재열) 연결망의 연고자와 시장참여자의 고리를 끊겠다는 시도보다, 원천적으로 연결을 허용하는 권력자의  힘을 제도적으로 약화시키는 것이  민주화의 첩경이 된다.   


◆정의를 세우는 우리의 의무와 정의의 조건을 세우는 사명

후쿠야마는 혈연을 넘어서는 신뢰가 형성되지 않는다면 한국경제의 미래는 암울하다고 지적한다. 사적신뢰가 과잉되어 있는 닫힌 연줄망(bonding) 사회에선 공식적인 규칙과 제도가 자리 잡기 힘들다. 

또한  제도에 대한 공적 신뢰가 붕괴된다면, 구성원들은 사적신뢰를 다시 강화시키는 퇴행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장수찬)

그 결과, 구성원간의 신뢰는 약화되고, 상호간의 경쟁과 다툼만이 횡행하는 제로섬게임, 공공자원을 획득하기 위해 다툼을 벌이는 공유지의 비극, 상호불신의 죄수의 딜레마가 득세하게 된다.  

이는 사회의 지배적 시스템이 공동체 구성원들의 이해만을 추구하는 마피아사회, 더 나아가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구조로 퇴화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폐쇄된 연줄망 사회에서 열린 연계망(linking) 사회로의 전환, 그리고 수직적 체계에서 수평적 체계로의 이전은 사적신뢰와 공적신뢰간의 균형을 이루도록 한다.  

이러한 균형을 위한 수평적 체계는 제도적 개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정의를 세우는 우리의 의무와 정의의 조건을 세우는 사명은 선택적인 것이 아닐 수 있다.

정의를 확립하는 것은  법적 정신이 사회에 스며들도록 하여, 법에 의한 지배(rule by law)가 행동 결정의 판단기준으로 자리 잡도록 하는 것이다. 

정의의 조건을 세우는 일은 앞으로 펼쳐질 개연성이 있는 불의를 예방하기 위한 것이다. 아무리 운전 솜씨가 뛰어나다 한들, 도로가 나쁘면 운전 솜씨를 충분히 발휘할 수 없다는 사르토리의 운전론도 정의의 조건을 마련하는 사명과 연결되는 논리이다. 

그러므로 정의를 세우는 일, 그리고 정의의 조건을 수립하는 일이 함께 진행되어야 정의를 둘러싼 소모적인 싸움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내일의 또 다른 태양’을 위해 지난 시대의 가치를 부정하고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고통은 부정의 부정을 통한 비약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깃들 무렵에야 비로소 날개를 편다.” 


<참고자료> 
이재열(1998), “민주주의, 사회적 신뢰, 사회적 자본”, 계간사상 1998 여름호
유석춘 장미혜 (2002), “사회자본과 한국사회”, 「사회자본」
로버트 퍼트남, “번영하는 공동체”, 「사회자본」 
장수찬(2007), “한국사회의 신뢰수준의 하락과 그 원인”, 세계지역연구논총 vol25 no.3
최종렬(2004), “신뢰와 호혜성의 통합의 관점에서 바라본 사회자본”, 한국사회학 제38집 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