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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일반

[조선 자본주의 맹아론 ③ ] 조선의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 : 내재적 발전론

조선의 봉건제로부터 근대자본주의로의 이행 요인과 관련한 논쟁은 식민지 근대화론과 내재적 발전론의 다툼이다.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은 조선의 근대자본주의의 형성이 발전 외인론에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개항 전야의 조선에는 자본축적도 없고 대규모 생산을 할 만한 기계도 기술도 없어, 근대화의 조건이 구비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조선후기는 정체된 사회였다고 인식한다.

 

그러므로 조선사회가 그 자체의 힘으로는 발전할 수 없기 때문에, 일본 제국주의의 무력으로 이 사회의 공고화된 틀을 깨뜨려 조선에 자본주의의 틀이 부어지게 되고, 그 결과 한국의 근대화가 이루어 질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영훈 교수등의 식민지 근대론자들은 이처럼 한국의 경제성장이 가능했던 요인을 외적요인에서 찾는다. 일제의 강제력에 의한 조선에의 자본주의 성립을 오늘날 한국사회가 성장 할 수 있게된 계기로 이해한다. 한국의 자본주의는 내적인 역량으로 구축된 것이 아니라 일본과 미국에 의해 이식되었다는 것이다.

 

조선 근대화론과 관련하여 조선 정체론과 외인론에 대항하는 깨달음은 조선사회 내부에 낡은 봉건사회를 타파하는 내재적 관계가 갖추어져 있다고 분석하는 내재적 발전론이다.

 

개항전 한국사회가 자본주의의 침략이 없었더라도 조만간 스스로 자본주의 사회로 이행할 수 있는 역량이 축적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의 개입으로 조선의 성장 흐름이 왜곡되게 되었다고 인식한다.

 

식민지론자들은 내발론자들에게 망망대해에서 필요한 자료를 취사선택하여 부분을 일반화시키려는 부조적 논리접근을 시도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반면에 내발론자들은 정체론자들이 일부 사례를 전체로 확산하는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를테면 백일교수는 조선후기 사적소유의 확대와 자본주의 명백한 맹아를 무시하고, 사멸해가는 둔전등 국가적 토지 소유에 집착한다고 지적한다.

 

내재적발전과 조선자본주의 맹아론을 농업, 상업 그리고 수공업등의 실례에서 찾아보고, 조선의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 과정을 검토해 본다.

 

 

농업, 상업, 수공업등에서의 자본주의 맹아

 

농업

 

김용섭교수는 경영富農층을 중심으로 조선 봉건사회의 붕괴와 자본주의의 내재적 발전론을 밝혔다.

 

그는 중농층이하의 평민층이나 천민층에서 잉여생산의 축적이 가능하였으므로, 천민을 면하거나 양반층으로의 상승이 이루어졌으며, 결국 경영형부농을 창출하였다는 것이다.

 

경영형부농들은 자작농 뿐 아니라 소작농에서도 존재하였다. 이들은 자가노동의 부족을 메우기 위하여 임금노동을 고용하였다.

 

영구적인 借地, 토지사용권등이 궁방전(궁중에 소속된 토지), 역둔토(역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지급된 驛土와 지방이나 중앙 관청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지급된 둔전)에서 광범위하게 성장하였다. 이를 통해 지주계급의 농지를 借耕할 수 있었다.

 

경영형부농층은 봉건적 지주계급과 기본적인 모순 대립관계를 보이고, 이들은 머슴등의 임금노동을 통한 다수의 빈농들과 모순관계를 나타내었다.

 

이러한 생산관계는 자본·노동관계가 싹트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상업

 

화폐자본이 자본주의의 형성의 요인이 되었다는 인식도 대두되고 있다. 화폐가 상인자본으로 집적되어 이 화폐자본이 자본주의의 토대가 되었다고 파악한다.

 

금속화폐의 전국적인 유통은 지배층의 백성에 대한 수탈이 강화되어 사회적 계급적 모순관계를 심화시켰고, 상업자본이 축적되어 수공업과 광업등의 생산부문에 침투함으로써 상업자본의 생산지배가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진창수교수는 상인자본 또는 고리대자본이 확대되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발생시켰다는 주장에 반론을 제기한다. 상업자본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성립시키기는 커녕, 노예제도로의 회귀를 야기시켰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발전대신 봉건적 체제로 귀착되었다고 주장한다.

 

 

수공업

 

금속품 생산부문의 유기 수공업을 통해서도 조선 자본주의 맹아가 발견된다. 유기공업은 일반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넓은 수요시장을 배경으로 하여, 자기자본을 유기생산에 투입하고, 그것을 상품으로 판매하여 화폐로 전화시킨다. 재차 축적된 자본이 재생산에 투입되어, 보다 큰 이윤 획득으로 유기생산업은 성장해 갔다.

 

이방환교수는 자유계약에 의한 임금노동자에 의해서 생산이 이루어지고, 동일작업장에서 분업을 통한 협업노동이 행하여져, 자본주의 경제법칙에 따른 생산형태인 근대자본주의의 맹아 발생에 주목한다. 이는 외국자본과 무관한 태내에서 발생한 내재적 성장이라는 것이다.

 

 

 

농민층의 분화 : 상층 지주층과 하층 빈농으로의 계층분화

 

 

조선에서 봉건제로부터 자본주의로의 이행 배경의 실마리는 이 사회에 자본주의의 생산관계의 구축 여부를 파악하는 것이다. 즉 봉건제의 신분적 관계를 청산하고 지주와 농노와의 계약 관계로의 형성 여부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는 농민층의 계층분화로 자본을 집중하는 상층과 생산수단으로부터 유리된 하층이 형성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지배층이 형성되고, 농노등이 빈농으로 전락하여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판매하는 계층이 구축되어야 한다.

 

내재적 발전론은 이러한 자본주의 구조에 근거하여 이에 대한 실증을 시도한다.

 

최윤오교수는 지주나 부농층의 존재 확인과 하층 소농층의 형태를 통해 내재적발전론을 파악한다. 특히 중세 봉건의 신분관계가 자본주의 기초가 되는 계약관계의 발생을 분석한다. 신분이 아닌 계약을 매개로 한 새로운 인간관계의 창출에 주목한것이다.

 

최교수는 이 새로운 생산관계의 형성을 지주제의 발달과 소농경영의 분화로 분석한다.

 

 

 

소농경제

 

소농경제는 가족단위 중심의 소토지 소유의 자영농 뿐만 아니라, 타인의 소유지를 빌려 경영하는 전호농민까지 포함하였다.

 

조선후기에는 소농경영과 지주제경영의 공존 상황은 위기상황에 직면하였다. 양자 간의 균형이 깨지면서 지주제는 더욱 강화되었다.17세기를 경계로 소농민 경영은 해체되면서 지주제가 확산되었다. 이러한 위기 상황은 곧 새로운 생산방식의 출현과 농민층의 양극화로 나타난다.

 

농민층의 양극화와 분화의 배경으로 최교수는 우선 사적소유권의 국가의 공인을 통해 토지 국유화가 아닌 사적소유권의 존재를 실증한다.

 

중세의 사적소유권은 근대의 배타적 소유권과는 차이가 있다.

 

중세의 소유권을 제약하는 요소는 왕토사상과 收租(토지에 대한 조세 징수권)의 존재였다. 토지에 대한 조선 중세사회에서 모든 토지의 소유권은 궁극적으로는 국가에 귀속되며, 다만 관료에게는 수조권이 부여되었다. 모든 토지는 왕의 토지라는 왕토사상(王土思想)이 근간을 이루었다.

 

그런데 국가는 납세자 확정을 목적으로 庚子量田( 양전 :우리 나라 전근대사회에서 농지를 조사·측량하여 실제 작황을 파악하던 제도)을 실시한다. 이를 통해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전국차원의 토지조사사업이 시행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18세기 중엽에는 소유권자를 量案(토지대장)에 법제화하였다.

 

이러한 국가의 납세자 확정의 목적과 더불어 토지소유권자의 확인이 이루어 졌다.

 

토지 사적소유권자의 확인은 토지와 노동력의 상품화를 촉진시켰다. 소유권의 발달이 농민층의 분해를 가속화시킨 것이다. 소농층의 분화 결과 상층부에 부농층이, 하층부에 빈농이 추출되었다.

 

국가는 지주제 발달로 인한 농민층몰락을 막기 위해, 소농경제를 안정시킬 수 있는 방법론을 모색하였다. 실례로 결부제 (면적단위대신 생산량단위로 토지구분) 방식의 양전론이 도입되었다. 또한 환곡과 社倉제도가 도입되었다.

 

 

 

경영형 부농층의 실증

 

새로이 등장한 부농층은 상업적 노동을 통해 경영형부농층으로 나타난다.

 

최교수는 면단위를 넘어 군현단위, 또는 도 단위의 부재지주 경영을 행할 경우 지주층이 확대된다고 지적한다. 그러므로 주변 면을 동시에 분석하여야 토지소유와 농민층 분화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소농층이 거대지주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경영상의 양극화 형태가 정확히 분석된다. 부농층이 확인되면서 상향분화의 가능성이 확인된다.

 

최교수는 768명의 起主 가운데 1결이상의 부농이 면단위로 98(12.7%)이던 것이, 주변 3개면의 토지까지 포함하여 계산하면 부농이 151(19.6%)으로 증가했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양상을 고려하면 경영형부농층의 존재는 명백하며, 궁방전 단위의 경영만을 분석하여 상층몰락과 영세균등화를 주장하는 것은 농민층 분화를 부정하는 그릇된 인식이라고 이해한다.

 

 

 

지주제의 발달

 

지주제는 거주지중심의 경영과 병작경영으로 나뉘어 진다.

 

우선 거주지 중심으로 토지를 집중시키면서 임노동을 고용하여 지주경영의 생산성을 제고하려는 지주경영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또한 전국을 대상으로 토지집적을 확산시키면서 중간관리인을 두어 병작경영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이 두 가지 지주경영은 신분제가 해체되는 상황에서 경영합리화나 조직적인 관리를 통해 생산성 제고를 꾀했다.

 

특히 병작의 경우는 이 시기의 유통경제를 적극 활용하였다. 강변이나 해안에 위치한 부재지주의 경우는 원격지 유통망을 이용하여 지주경영을 확대하고 있었다. 전국적인 시장을 대상으로 하는 시장에 참여하여 상업적 농업을 행한 것이다.

 

 

 

 

신분제해체와 계약관계로의 이행

 

중세말기 토지소유를 둘러싼 사회모순은 토지문제를 넘어 사회전반으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생산관계의 모순은 신분제를 붕괴시키는 가운데 계약관계로의 이행을 촉진시켰다.

 

고용노동은 급격하게 발달하였고 이는 계절적이며 일시적인 고용관계였다. 하나의 지주에 예속되는 신분상의 관계가 아니라, 여러 지주에 고용되는 계약관계가 확산되었다. 빈농은 자신의 생계를 위해 노동력을 판매해야 했다.

 

어사 박문수는 김매기 3, 추수와 타작에 각 10명씩, 50명 정도의 고용노동이 필요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雇價(고용의 대가)가 지불되어야 하는 농촌관행을 말한 것이다.

 

고용노동의 양적, 질적 발전은 조선후기에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가운데 새로운 인간관계로 확산되었다.

 

하층몰락농의 탈출구는 농업에 한정되지 않고 상공업이나 수공업, 광업등 사회 전분야로 확산된다. 몰락 양반도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해야 하는 사회가 되었다.

 

이처럼 생산수단을 가지는 경영형부농의 부상과 생계를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팔아야하는 빈농층의 양산은 조선의 새로운 생산양식의 등장을 가져왔다. 또한 신분 관계를 대체하여 자본주의적 계약관계가 성립되어, 근대자본주의가 싹트기 시작했다.

 

결국 일본제국주의가 조선의 고착화된 정체성을 부수고 은혜롭게 자본주의를

이식한 결과 한국이 성장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는 외인론이야말로 결과론에 입각한 강압적 일반론인 것이다.

 

또한 내재적 발전론이 민족주의에 입각한 감정적 호소라는 억지는 철회되어야한다. 내발론은 민족주의에 의한 부조적 접근이 아니라, 엄연히 존재하는 사실의 귀납적 결과물이다.

 

만약 조선이 내재적 역량에 근거한 자본주의 생산관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면, 해방후 민족자본의 물적자본과 한국인의 교육론에 기인한 인적자본의 결합으로 성장과 적절한 분배가 이루어지는 왜곡되지 않은 경제 시스템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덧붙여 해방 후 일제의 잔재가 만들어낸 뒤틀린 민주주의로 인한 사회갈등과 모순으로 비롯된 막대한 사회적 비용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은 정체된 사회가 아닌, 생산력의 발전에 근거하여 봉건적 불평등의 신분관계가 허물어지고 계약관계에 근거한 새로운 생산관계가 창조되는 역동적인 사회임을 자부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