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25 (목)

  • 구름조금동두천 25.3℃
  • 흐림강릉 29.3℃
  • 구름많음서울 26.8℃
  • 맑음대전 24.8℃
  • 구름조금대구 25.4℃
  • 맑음울산 25.4℃
  • 맑음광주 26.1℃
  • 박무부산 25.0℃
  • 맑음고창 26.9℃
  • 맑음제주 28.4℃
  • 구름많음강화 25.5℃
  • 맑음보은 23.7℃
  • 맑음금산 23.7℃
  • 맑음강진군 26.8℃
  • 맑음경주시 24.7℃
  • 맑음거제 26.3℃
기상청 제공

경제

[ 아담 스미스의 자본주의 번영의 메커니즘 ] 자기사랑, 동감, 신중과 정의

◆ 자본주의 번영의 메커니즘

“It is not from the benevolence of the butcher, the brewer, or the baker we expect our dinner, but from their regard to their own interest. We address ourselves, not to their humanity but to their self-love, and never talk to the them of our own necessities but of their advantages.” (국부론)

“우리가 우리의 저녁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 양조업자, 제빵업자의 자비심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이익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의 인류애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자기애에 호소하며, 우리의 필요가 아니라 그들의 이익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아담 스미스(Adam Smith)의 저서 <국부론>에서 너무나 잘 알려진 이 구절은 개인의 자기사랑(self-love)의 추구가 생활필수품의 적절한 배분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의 자기애(self-love)는 생활개선의 욕망, 자기보존의 본능등의 중립적 욕구(자기이익,self-interest)와 허영심등의 부정적인 욕구(이기심,selfishness)등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입니다. 한국어 번역에선 자기애와 이기심은 혼용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위의 <국부론>의 구절에 등장하는 제빵업자들의 이익추구는 중립적 욕구(self-interest)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반면 <도덕감정론>에, 지주들의 허영심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생활필수품을 배분한다는 언급이 있는데, 여기서의 지주들의 욕구는 부정적인 인간의 욕망(selfishness)을 의미합니다. 

서두에서 언급된 구절에서, 자기사랑은 필수품의 배분을 촉진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배후의 힘은 분업과 교환본능입니다. 각자가 필요한 생활필수품을 모두 생산하지 않고 분업으로 생산하게 되면, 비교우위가 작동하여 생산성이 증가하고, 이러한 잉여생산물이 교환되어 모든 사람들에게 배분된다는 겁니다. 

또한 이 구절은 ‘내가 원하는 것을 당신이 준다면 당신이 원하는 것을 내가 줄 수 있다’는 교환의 속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원하는 것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대가가 지불될 때 주어질 수 있다는 자본주의의 속성을 스미스는 지적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도덕 감정론과 연결하여 해석하면, 자유로운 이기심등 인간의 본능의 추구가 공익 증대를 낳는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예컨대 고급 대형 승용차를 구입하여 이른바 ‘하차감’을 누리고자 하는 개인의 인정욕구가 개인으로 하여금 고급차를 구입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게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마침내 노동의 대가로 벌어들인 수입으로 구입된 고급 자동차의 판매대가는 승용차를 생산한 노동자들의 임금이 되며, 동시에 자동차를 판매한 딜러의 수입이 됩니다. 또한 자동차 딜러의 자동차 판매 수입은 농부들이 판매한 농작물을 구입하는데 사용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개인의 이기심이 보이지 않는 감성체계의 일부분이 되어, 의도하지 않은 공적 부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결국 생활을 개선하기를 갈망하는 인간의 자기애와 또는 사치품등을 소비하여 남으로부터 인정을 받고자 하는 이기심등,  인간의 본능이 자신의 의도와 무관하게 공익증진의 원동력이 되어 국가발전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 스미스의 통찰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기심이 국가발전으로 이어지는  감성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기심은 공적 발전의 동력이 되지만, 그 본능이 제어되지 않고 파괴적인 양상을 보인다면, 공적 부의 증대를 낳을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 탐욕은 사회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상태로 전락시킬 수 있습니다. 아담스미스가 이기심을 제어하는 원리를 모색하게 된 이유입니다. 

예컨대 제빵업자는 자기애에 과도하게 집착하여 탐욕을 부릴 수 있습니다. 소비기한을 속여 빵을 판매하거나, 싼 가격의 재료로 빵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자기애는 공적이익을 낮추어 사회의 부를 줄이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최근 사회적 파장을 몰고 온 LH아파트 단지들의 철근 누락사태도 행위자들의 과도한 자기사랑이 탐욕을 낳고, 그것이 사회전체의 안녕에 위협을 가한 사건입니다.  

결국 ‘아름다운 정원은 수시로 잡목과 잡초를 제거해 줄 때 유지될 수 있다’는 지적처럼, 자본주의 발전의 메커니즘을 방해하는 행위자의 과도한 자기애와 탐욕이 제어될 때, 자본주의도 번성할 수 있게 됩니다. 


◆ 파괴적 자기사랑을 제어하는 원리, 동감

아담스미스는, 자본주의의 발전과 관련하여,  이기심 뿐만 아니라 <도덕감정론>을 통해서 파괴적인 이기심을 통제하는 원리에 천착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제어되지 않는 자기애와 야심을 뿌리 뽑는 원리는 무엇일까요? 

아담스미스는 사익 극대화를 추구하는 개인의 자기애와 자유를 적절한 수준으로 통제하는 메커니즘으로 동감(sympathy)의 원리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대체로 동감은 연민(pity), 공감(compassion)등과 어울려, 다른 사람의 희로애락을 보고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인간의 본성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스미스가 의미하는 동감은 개인의 행위가 도덕적으로 용인되는지 여부를 평가하는 기준을 의미합니다. 

타인의 기쁨, 슬픔, 이기심, 자비심등 모든 감정들을 자신의 마음속으로 옮긴 후(역지사지),  자신을 타인의 입장에 놓고 공평한 관찰자(사회집단의 보편적 사고)의 시각에서 이 감정들을 용인 할 수 있는지 여부를 검토한 후 느끼는 감정을 말합니다. 

타인(자신)의 감정이 용인된다면 자신(타인)은 타인(자신)의 감정에 동감하게 되고, 용인되지 않는다면 자신(타인)은 타인(자신)의 감정에 동감하지 않게 됩니다. 

따라서 동감은 연민, 이타주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자신)의 행동과 감정에 자신(타인)이 얼마나 공감할 수 있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작용합니다. 

(동감이 개인의 행위가 용인되는 판단기준이라면, ‘아담스미스의 문제’는 해결될 수 있습니다. ‘아담스미스의 문제’란 <도덕감정론>의 인간본성인 동감의 원리와 <국부론>에서의 인간본성인 이기심이 일관되지 않는다는 지적으로, 인간본성의 충돌문제를 말합니다.      

그런데 동감이 이타심이나 연민의 개념이 아닌, 행위자의 행위의 적정성 판단 기준이라면, <국부론>의 이기심과 <도덕감정론>의 동감이 인간 본성면에서 일관되지 않는다는 아담스미스의 문제는 해결될 수 있습니다. )

결국 과도한 사익추구를 조절하는 통제기제는 타인이 자신의 행위에 얼마나 공감할 수 있는가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행위 당사자가, 자신의 행위에 대해 공평한 관찰자로부터 동감의 승인을 얻기 위해서, 자신의 격정적인 감정을 낮추게 되는 것이 자신의 사익추구를 조절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동감을 얻기 위한 덕목: 신중과 정의 

구체적으로 행위자는 자신의 행위가 타인(공평한 관찰자)의 동감을 얻기 위해 어떠한 덕을 보유하고 있어야 할까요? 

아담스미스는 동감을 얻을 수 있는 덕으로 신중과 정의를 들고 있습니다. 행위자가 정의와 신중의 덕을 갖추고 있을 때, 관찰자는 그 행위에 동감할 수 있다는 겁니다.  

스미스는 이러한 신중과 정의가 개인의 파괴적인 자기애를 제어할 수 있는 원리라고 지적합니다. 

“야심(경제적 이득 획득과 신분상승의 욕구)이 신중과 정의의 범위 내에서 추구될 때 감정은 칭찬받으며 일종의 변칙적인 위대성조차 갖는 것이다.”(도덕감정론)

신중과 정의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①신중 (prudence)
신중이란 이성과 자기 통제를 사용하여 공평한 관찰자의 동감, 곧 사회의 집단적 동감을 받을 수 있도록 신중하게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자기애(self-love)를 추구합니다. 자기보존의 욕구, 생활개선 본능등 중립적인 욕구와 인정욕구, 허영심등 부정적인 욕구등을 좇아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기애의 추구는 타인에게 해를 끼치면서까지 용인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애 추구의 행위가 사회의 집단적 동감을 받을 수 없다면, 이러한 행위는 정당하고 적절한 사익추구로 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사회 구성원들간의 조화를 이루는 선에서, 자기애의 행위는 이루어져 합니다. 

그렇다면 아담스미스가 말하는 신중의 자질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그는 신중의 덕목으로 뛰어난 이성과 자기통제를 들고 있습니다. 

여기서 뛰어난 이성이란 예견력을 말합니다. 그 행위가 초래할 수 있는 미래의 이익과 손실을 예측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또한 자기통제란 절약, 근면, 주의등을 기울이는 것으로, 미래의 즐거움을 얻기 위해 또는 미래의 고통을 절감시키기 위해 현재의 고통을 참아내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아담스미스의 신중에 대한 목소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우선 우리 자신에게 가장 유용한 자질들은 뛰어난 이성과 사고력으로서, 이것들에 의해 우리는 모든 행동이 수반하는 먼 장래의 결과들을 식별할 수 있고 그 결과들로부터 초래될 것 같은 이익이나 손해를 예견할 수 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자기통제로서, 이를 통해 우리는 일정한 미래의 시점에 한층 더 큰 즐거움을 얻거나 한층 더 큰 고통을 회피할 목적으로 현재의 즐거움을 억제하거나 현재의 고통을 감내 할 수 있게 된다. 모든 미덕 가운데 개인에게 가장 유용한 덕목인 신중의 덕은 이 두 가지 자질의 결합 속에 존재한다.”(도덕감정론)

결국 스미스의 관점에서 이성과 자기통제가 결합된 신중이 없다면,  무분별한 이기심이 발현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기심은 반사회적 악으로 규정됩니다. 스미스가 독점기업의 탐욕을 신랄하게 비판한 이유입니다. 

(윤대통령이 카르텔 타파를 주장하고 있는 논리는 스미스가 주장하는 자본주의 번영의 논리와 궤를 같이 하고 있습니다. 윤대통령이 아담 스미스를 제대로 공부한 흔적이 발견됩니다. )


②정의
정의의 개념과 관련하여, 스미스는 적정성의 미덕, 공정성의 미덕을 정의로 이해합니다. 또한 사회의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에 대해 상응한 처벌이 주어져야 한다는 감각도 정의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우선 스미스가 보기에 정의는 대상에 대해 공정한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이러한 적정성의 결여가 정의를 상실한 것이 됩니다.

“어떤 대상을 공정한 관찰자에게 그것이 받을 만한 것으로 생각되는 또는 그것이 당연히 불러일으키기에 적합한 정도의 존경을 가지고 어느 특정 대상을 평가하지 않거나, 또는 그런 정도의 열의를 가지고 추구하지 않는 경우 우리가 공정하지 목하다고 하는 것이 이러한 의미에서의 정의이다.”(도덕감정론)

예컨대 시나 그림에 대해 공정하게 평가하지 않고 정의이상으로 평가하거나 정의이하로 깎아내리는 것은 부정의한 행위가 됩니다. 

이처럼 스미스는 공정한 평가와 판단을 정의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정의감도 파괴적인 이기심을 제어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정의란 처벌받아 마땅한 행위를 회피해야한다는 관념입니다. 다시 말해 정의감이란  사람들이 피해를 주거나 받아서는 안 된다는 감각이며, 발생한 피해에 대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나 처벌이 주어져야 한다는 감각을 말합니다. 

이러한 정의가 구현되지 않는다면, 사회의 질서는 파괴 된다는 것이 스미스의 판단입니다.  

즉 애덤 스미스는 정의가 모든 건물을 지탱하는 주요 기둥이며, 인간사회를 유지시켜주는 위대한 파수꾼은 정의를 위반했을 때 가해지는 응분의 처벌에 대한 공포라고 지적합니다. 

“정의는 모든 건물을 지탱하는 주요 기둥이다. 만약 그것이 제거되면 거대한 인간사회라는 구조물은 틀림없이 한 순간에 산산이 부서지고 말 것이다. ...조물주는 인간의 가슴 속에 악행에는 악한 응보가 따른다는 인식과 정의를 위반할 때 가해지는 응분의 처벌에 대한 공포를 인간사회의 위대한 파수꾼으로서 심어주셨다.”(도덕감정론)

그런데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데 기여하는 정의가 실현되는 구체적인 방법은 강제력을 동반하는 법을 제정하는 것입니다. (임의영)  

정의 위반 시에 이에 상응하는 엄격한 처벌이 내려진다는 사실이 사람들의 내면에 공포의 관념으로 자리할 때, 이기적 격정들의 파괴력이 법에 의해 제어될 수 있다는 겁니다. 

법의 제정은 사회전체의 공감적 분노에서 비롯될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은 행위가 주는 공포감과 가공할 만한 잔인성, 그런 행위가 적절하게 처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대 느끼는 기쁨, 그 행위가 마땅히 그와 같은 행위를 면했을 때 우리가 느끼는 분노, 요컨대 행위의 약한 응보, 그리고 그와 같은 행위를 한 자에게 해악을 가하여 그를 슬프게 하는 것의 적절성과 적합성에 관한 우리의 모든 감각은 관찰자의 위치에 있는 제3자가 희생자의 상황을 자신이 당하고 있다고 느낄 때마다 자연스럽게 그의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는 공감적 분노에서 나온다”(도덕감정론)

이처럼 사악한 행위에 대한 적절한 응보가 가능한 법이 없다면, 사람들의 가슴 속에는 공감적 분노가 끓어오르게 됩니다. 발생한 피해에 대한 처벌이 가능한 법이 제정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 무상유아교육의 필요성

자본주의의 번영은 감성체계의 구축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기심이 발휘되면 공적이익은 증진될 수 있지만, 이에 반해 과도한 이기심은 공적 이익을 낮추게 됩니다. 따라서 파괴적인 이기심은 신중과 정의에 의해 통제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신중과 공정한 정의의 감각은 어떻게 습득될 수 있을까요? 

자기통제의 능력과 예견능력을 의미하는 이성이 결합된 신중은 교육에 의해 획득되어야 하는 요소입니다.  

이성과 감성을 함께 포함하는 단어가 정서(sentiments)입니다. 아담스미스의 <도덕감정론>의 원제목도 <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입니다.  

정서교육은 상대적으로 유아시절에 쉽게 익혀질 수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연구결과입니다. 

따라서 유아교육이 아무리 강조되어도 지나침이 없을 것입니다. 5~6세 의무무상 교육이 어떤 다른 정책보다 시급히 시행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참고문헌>
김광수, < 애덤 스미스 >
구교준, “행정학자 아담 스미스 구하기”
임의영, “공공성의 도덕철학적 기초:A. Smith의 공감을 중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