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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 슈미트의 예외상태의 조건 ] 예외상태가 기적을 낳기 위해

◆예외상태와 주권자

예외상태란 국가의 존망이 걸린 위기의 상황, 곧 비상사태를 의미합니다. 독일의 법학자인 칼 슈미트는 그의 주요저작들의 하나인 「정치신학」에서 예외상태를 ‘국가의 존재를 위협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합니다. 

슈미트에 의하면, 이러한 위기 상황의 결정과 타개는 주권자의 몫으로 돌아갑니다.  

슈미트는 그의 저서  「정치신학」의 서두에서 ‘주권자란 예외상태를 결정하는 자’로 규정합니다. 

이 문장에서 ‘주권자’란 최종적인 결정을 내리는 자를 말합니다. 또한 ‘예외상태를 결정한다’의 의미는 주권자가 이 상황의 예외상태 여부를 결정한다는 뜻입니다.


◆ 예외상태로 결정할 수 있는 조건 ① : 공공의 안전과 질서 

그렇다면, 주권자가 예외상태로 결정할 수 있는 상태란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일까요? (권경휘) 

슈미트는 예외상태로 결정할 수 있는 조건의 예로서, 다음과 같이 바이마르 헌법 제48조를 제시합니다.  

‘여전히 유효한 1919년의 독일 헌법에서는 제48조에 따라 대통령이 예외상태를 선언할 수 있지만, 의회가 스스로의 통제 하에 언제나 그것의 해제를 요구할 수 있다.’ 

여기에서 그가 언급하는 바이마르 헌법 제48조란 제48조 제2항을 말합니다.   

제48조 ② 라이히 내에 있어서 공공의 안전과 질서에 중대한 장애가 발생한 경우 혹은 그러할 우려가 있는 경우 라이히 대통령은 공공의 안전과 질서를 회복하는 데 필요한 조치를 할 수 있고 필요에 따라 병력을 사용할 수 있다. 

이처럼 제48조에 근거해 볼 때,  주권자의 예외상태 결정의 조건은 국가가 공공의 질서와 안전이 위기에 처했을 때 충족될 수 있습니다.  주권자가 언제나 특정 상황을 예외상태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예외상태로 결정할 수 있는 조건 ② :결단

그런데  ‘주권자란 예외상태를 결정하는 자’라는 문장에서 ‘결정’은 결단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이유는 이렇습니다.

슈미트는 예외상태를 결정할 수 있는 조건으로 ‘현행법질서에 규정되지 않은 사례’라는 항목을 제시합니다. 

여기에서 법질서에 규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어떤 상황이 예외상태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들이 규정되어 있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달리 말하면 주권자의 예외상태를 결정하는 우선적 기준은 주권자가 예외상태로 ‘결단’을 내렸다는 사실 자체입니다. 그 상태가 어떤 상황인지 (예컨대 타국의 공격이 있었는지 내란이 발발했는지) 그리고 어떠한 규범에 적용을 받는지가 예외상태를 결정하는 첫 번째 조건이 아니라는 겁니다. (한상원) 

따라서 예외상태의 결정은 주권자의 고유한 역량으로 남게 됩니다.  

결국 슈미트가 언급하는 주권자란 ‘결단’하는 자를 말합니다, 슈미트의 정치철학이 결단주의 정치철학으로 불리는 이유입니다.   


◆ 규범 vs 결단 

예외상태를 결정하는 것과 관련하여 결단주의와 비교되는 이론은 규범적 절차주의입니다. 

결단주의는 법질서가 규범과 사실을 넘어서서 결단에 의해 성립되는 이론인 데 대해,  규범적 절차주의는 법질서 성립 과정에서 규범과 절차를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이론입니다. 

규범적 절차주의는 ‘어떻게’ 결정하는가라는 물음에 집중합니다. 반면 결단주의는 ‘누가’결정하는가를 중시합니다. 

이처럼 결단은 공동체가 위기상황 곧 예외상태에 직면하였을 때 주권자가 이 상황을 예외상태로 규정하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권력을 행사할 때 발휘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단이 예외상태에서 공동체의 안위를 회복하는 힘이 됩니다. 

슈미트는 정치신학에서 “카오스에 적용될 수 있는 규범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법질서가 의미를 갖기 위해서, 질서는 창출되어야 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외상태의 힘

주권자가 결단을 통해서 예외상태를 규정하고 타개하고자 할 때 구체제의 법질서는 새로운 것으로 대체되어, 공동체는 다시 활력을 되찾습니다. 

구체제는 반복에 의하여 단단한 껍질을 만들고 껍질 속의 체제를 보호합니다. 그런데 위기 상황인 예외상태가 발생하면, 굳어버린 껍데기에는 예외상태의 충격에 의해 균열이 생깁니다. 그리고 균열이 변혁의 계기가 됨을 인식한  주권자가 결단을 통해 그 균열을 쪼개어 구체제의 껍질을 부수게 되면, 구체제는 결국 붕괴되고 그 자리에 새로운 질서가 형성됩니다. 

결국 구체제의 보호막인 껍데기를 부수는 계기는 예외상태입니다. 예외상태가 없는 정상상태는 기존 질서를 유지 보존하는데 기여할 뿐, 파괴적 창조를 낳을 수 없게 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슈미트는 정상상태는 구체제의 질서를 영속시킬 뿐이며, 예외상태만이 구체제를 깨고 새로운 규칙과 질서를 수립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예외상태는 미래의 긍정적인 질서를 가로막는 방해물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디딤돌로 작용합니다. 


◆ 예외상태가 기적을 낳기 위해 

예외상태에 의한 새로운 창조는 신약성경에서의 기적과 유사합니다. 기적이 자연법칙에 따른 질서를 거스르는 것처럼, 예외상태를 통한 창조도 정상상태에 지배되는 질서를 위배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적을 낳는 것은 기적을 받아들이는 자의 겸손함과 믿음의 결과입니
다. 마태복음은 이 점을 강조합니다.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맹인들이 그에게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하니, 이에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마9:28~29) 

이 구절은 자연상태와 어긋나는 기적은 기적을 행하는 예수를 믿는 믿음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지적합니다. 

이와 같은 이치로, 예외상태의 타개의 조건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예외상태를 타개하는 힘은 주권자의 결단과 그의 결단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믿음입니다. 

주권자가 공동체의 안위를 위해 결단을 내려도 그에 대항해 온 세력들이 그의 힘을 거세하고자 하는 의도로 그 결단에 저항한다면, 아무리 예외상태가 기적을 낳는 조건이라 할지라도 그 결단은 실패로 끝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공동체의 대부분의 성원들은 예외의 상태에서 기적을 바랍니다.  

하지만 주권자에 대항하는 정적들과 정상상태를 옹호하는 세력들은, 위기의 상황에서 공동체를 지키겠다는 주권자의 결단의 본질에 접근하기보다, 주권자의 거친 절차만을 지적합니다. 대항세력들의 이러한 전략은 공동체의 안위보다 이들이 힘을 회복하고 사익을 되찾겠다는 욕망의 소산으로 읽혀집니다. 

결국, 기적의 창조는 믿음입니다. 새로운 질서의 창조도 주권자의 결단을 믿는 것입니다. 

결단에 대한 도전의 이면에는  대항자들의 사적 욕망이 웅크리고 있습니다. 반면 주권자의 결단의 본질에는 공동체의 안위가 고려되고 있습니다. 결단에서 발생할 수 있는 거친 절차보다 결단의 본질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참고문헌>
권경휘, “정치신학에 나타난 예외상태에 대한 슈미트의 이해방식”
한상원, “예외상태의 정치적 존재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