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흐마니노프의 <보칼리제>의 선율은 애잔하지만 비탄으로 무너지지 않습니다. 상승과 하강이 반복되며, 어느 한 지점에서 “끝났다”라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라흐마니노프의 〈보칼리제〉는 이렇게 ‘부족함을 포함한 채 유지되는 존엄’을 소리로 보여줍니다.
이는 마치 현명한 여우가 “단지 점프력이 부족할 뿐, 나의 존재가 무능한 것은 아니다”라고 냉철하게 선을 긋는 순간과 같습니다. 그것이 특정 기능의 약함이 존재 전체의 무능으로 번지지 않게 막아서는 지혜입니다. 결핍을 안고도 품위를 지키는 이 단단한 마음가짐이야말로, 비탄에 빠지지 않고 끝없이 이어지는 이 노래처럼 우리 삶을 지속하게 하는 힘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곡에 파국적인 클라이맥스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반드시 도달해서 깃발을 꽂아야 할 정점(Must)이 없고, 그저 지속 가능한 흐름만이 존재합니다.
이는 우리 마음속에서 “오늘·여기·반드시”라는 절대 규칙을 내려놓는 과정과 닮아 있습니다. “되면 좋지만, 안 돼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는 ‘선호(Preference)’의 영역으로 넘어갈 때, 비로소 삶은 강박을 벗고 흐르기 시작합니다. 그렇기에 이 음악은 우리에게 그 무엇도, 심지어 성취조차도 강요하지 않으며 깊은 위로를 건넵니다.
〈보칼리제〉는 격정으로 감정을 소진시키지 않습니다. 곡이 끝나고 나면, 마음은 무너져 내리는 대신 차분하게 정리된 고요함만이 남습니다. 그렇기에 이 음악은 좌절을 낭만적으로 미화하지도, 반대로 슬픔의 무게에 짓눌려 주저앉게 만들지도 않습니다.
좌절은 합리화로 덮어야 할 부끄러움이 아니라, 다음 행동으로 이어지는 선명한 피드백”**이라는 사실을, 이 곡은 말이 아닌 깊은 여운으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 보칼리제와 첼로, 그리고 미샤 마이스키
〈Vocalise〉는 원래 무가사 성악곡으로 작곡되었습니다. 라흐마니노프는 이 곡을 인간의 목소리 그 자체를 하나의 악기처럼 다루며, 언어 의미를 제거한 순수 선율로 정서를 밀어붙였습니다. 그래서 제목도 ‘노래하지만 말하지 않는다’는 뜻의 Vocalise입니다.
이후 이 곡은 첼로 + 피아노, 바이올린 + 피아노, 관현악 편곡등 수많은 편곡(version)을 통해 생명을 확장했습니다.특히 “보칼리제 = 첼로곡”이라는 인상이 굳어진 이유는 첼로의 중저음 음역이 인간의 성대와 가장 가깝고, 애가(哀歌)에 가까운 이 곡의 분위기가 첼로의 밀도와 잘 맞기 때문입니다.
라흐마니노프의 〈Vocalise〉가 첼로곡처럼 널리 인식된 데에는 미샤 마이스키의 연주가 큰 몫을 했습니다. 그의 Bowing (활,Bow을 쓰는 기술)은 음을 단지 “켜는” 기술이 아니라,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듯 선율을 ‘노래하는’ 방식으로 자주 설명됩니다. 그래서 마이스키는 단순한 첼리스트라기보다, 첼로를 인간의 목소리로 바꿔 들리게 만드는 연주자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마이스키의 이러한 성향은, 첼로의 소리가 “울음이 아니라 연설”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공적 언어의 연주자로 자리매김한 스승 로스트로포비치와 뚜렷이 대비됩니다. 마이스키의 강점은 기교를 과시하거나 음정의 무결함을 증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의 핵심은 정서의 진폭입니다. 그는 절제된 균형보다 감정의 밀도와 내면의 떨림을 전면에 내세우고, 바로 그 선택 때문에 더욱 강렬하게 기억되는 첼리스트가 됐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