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A씨는 마취된 채 수술대에 누워 있습니다.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쥔 의사가 오직 치료만을 위해 칼을 쓸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2. B씨는 운전자가 졸음이나 부주의로 사고를 낼 수 있음에도 조수석에서 잠을 청합니다. 운전자의 안전운전을 믿고 자신의 안전을 운전자에게 온전히 맡긴 것입니다.
이 두 사례는 신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신뢰의 본질은 ‘취약성에 대한 자발적 노출’입니다. 상대가 마음만 먹으면 나를 해칠 수 있는 무방비 상태임에도, 그 위험을 인지한 채 기꺼이 나를 내맡기는 행위가 신뢰입니다.
국민이 국가에 세금을 납부하고 자유와 권리의 일부를 양도하는 행위 또한 이와 같습니다. 즉, 국가에 대한 신뢰란 권력을 위임받은 정치 세력이 공익이 아닌 사익이나 기득권 보호를 위해 그 힘을 남용할 위험이 엄연히 존재함에도, 국가는 나를 보호해 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나의 ‘취약성’을 자발적으로 노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Mayer의 신뢰 정의
조직 신뢰 연구에서 널리 인용되는 Mayer 교수의 연구는 신뢰의 핵심을 “타인의 행동에 대해 취약해질 의지”로 정의합니다.
"Trust is the willingness of a party to be vulnerable to the actions of another party based on the expectation that the other will perform a particular action important to the trustor, irrespective of the ability to monitor or control that other party."
“신뢰란, 상대를 감시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상대가 나에게 중요한 행동을 할 것이라는 기대에 기반하여, 상대의 처분에 나의 취약성(vulnerability)을 기꺼이 노출하려는 심리적 상태입니다.”
이 정의를 풀면 신뢰는 세 가지 요소로 정리됩니다.
•기대(expectation): 상대가 나에게 중요한 ‘특정 행동’을 해줄 것이라는 믿음입니다(약속·역할·규범·의무의 이행).
•취약성(vulnerability): 상대의 선택과 행동에 따라 내가 손해를 볼 수 있는 위치에 스스로 올라서는 것입니다.
•위험(risk): 결과가 불확실하고 손해 가능성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핵심 구문별 의미 분석
① the willingness of a party to be vulnerable to the actions of another party:
다른 당사자의 행동에 자신을 취약한 상태에 두려는 의지를 뜻합니다.
여기서 ‘취약한(vulnerable)’ 상태란 △상대가 나를 해치거나 실망시키거나 배반할 수 있는 위험이 실제로 존재하는 상태 △그럼에도 그 상대에게 나 자신이나 나에게 중요한 것을 맡겨 그 위험에 노출된 위치에 서는 상황 △그러한 노출 상태를 알고도 스스로 받아들이고 감수하겠다는 의지가 있는 상황을 말합니다.
이를 기초로 볼 때 ‘to be vulnerable to the actions of another party’는 ‘다른 당사자의 행동에 따라 상처를 입거나 손해를 볼 수 있는 위치에 자신을 스스로 올려놓는 것’, 또는 ‘다른 당사자의 행동에 자신을 상처 입을 수 있는 채로 노출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이 문장의 핵심은 ‘상대가 나를 망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알면서도, 그 가능성을 감수하고 그 손에 나를 맡긴다는 데’ 있습니다.
② the expectation that the other will perform a particular action important to the trustor:
상대방이 신뢰자에게 중요한 어떤 특정한 행동을 해 줄 것이라고 기대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상대방의 ‘어떤 행동’이란 신뢰자가 바라는 상대방의 ‘약속·규범·역할·의무의 이행’을 가리킵니다. 대표적인 예는 다음과 같습니다.
-상대방이 계약을 이행합니다.
-비밀을 지키고, 허락 없이 정보를 누설하지 않습니다.
-팀에서 맡은 일을 책임감 있게 수행합니다.
-위험이 생겼을 때 도망가지 않고 끝까지 함께 해결하려 합니다.
위 문장을 국민–국가 관계에 적용해 보면, “신뢰자가 중요하게 여기는 상대방의 특정 행동”의 예는 다음에 해당합니다.
-정부와 국가가 자신의 기본권을 보호할 것이라는 기대입니다.
-국가가 헌법에 보장된 생명권, 신체의 자유, 표현의 자유, 재산권 등을 침해하지 않을 뿐 아니라, 위협으로부터 적극적으로 보호해 줄 것이라는 기대입니다.
③ irrespective of the ability to monitor or control that other party:
그 다른 당사자를 감시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지 여부와는 무관하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감시·통제의 주체는 신뢰하는 쪽(신뢰자)이고, 객체는 신뢰받는 상대방(other party)입니다. 신뢰하는 쪽이 신뢰받는 쪽의 행동과 결정을 직접적으로 관리·감독하거나, 규칙·명령·계약 등을 통해 강제로 조정할 수 있는지와 무관하게, 상대방의 행동에 자신을 맡기려는 의지가 있는가에 신뢰의 본질이 있습니다.
이를 국민–국가 관계에 적용하면 정치적 신뢰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됩니다. 시민은 국가를 완전히 감시·통제할 수 없어도, 국가가 기본권과 안전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권력을 행사할 것이라고 기대하기 때문에, 국가의 결정에 자신의 삶과 권리를 맡기려는 태도를 갖게 됩니다.
◆취약성: 무엇이 위험에 노출되는가
신뢰는 국가의 중요한 특정 행동을 기대하기 때문에 위험을 감수하고 취약성에 자신을 노출하는 상태입니다.
문제는 국가가 기대에 어긋나는 행동을 함으로써, 잠재된 위험이 현실의 고통으로 바뀔 때입니다. 잘못된 경제정책이 나의 자산을 갉아먹고, 국가의 통제가 나의 자유를 옥죄며, 나의 자기결정권이 국가의 판단에 의해 축소되는 현실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위험은 다음과 같이 분류됩니다.
① 결과(Result)의 취약성: 불확실성에 대한 종속
‘결과의 취약성’이란 나의 노력과 무관하게, 국가의 오판이나 실책으로 발생한 피해(재난·경제 위기 등)를 내가 떠안아야 하는 위험입니다. 통제권을 이양한 순간 결과를 스스로 통제하기 어렵게 되고, 내 삶은 타인의 판단력에 종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국가를 믿고 재산과 권리를 맡겼습니다. 하지만 국가가 엉뚱한 경제 정책을 펼치면 내 자산은 휴지 조각이 될 수 있고, 외교 노선을 잘못 타면 안보 위험에 시달려야 하며, 교육 정책이 실패하면 내 아이의 미래가 닫힐 수 있습니다.
이처럼 국가의 의사결정 하나로 내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거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 상태,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신뢰의 대가로 감수하고 있는 ‘결과의 취약성’입니다.
② 권리(Rights)의 취약성: 해석에 의한 지배
‘권리의 취약성’이란 내 헌법적 권리가 국가의 해석과 정책에 의해 언제든 변질되거나 축소될 수 있는 상태입니다. 헌법이 기본권을 보장하더라도, 그 구체적 적용 범위와 한계를 설정하는 권한은 국가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국가가 세법을 개정해 감당하기 힘든 세금을 부과하는 상황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헌법상 재산권이 보장된다 하더라도, 그 권리가 실제 현실에서 어디까지 보호받을지는 전적으로 국가의 정책과 법 해석에 달려 있습니다.
표현의 자유도 다르지 않습니다. 국가가 무엇이 위험하고 무엇이 안전한지에 대한 기준을 폭넓게 적용한다면,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자유의 공간은 쪼그라듭니다. 권리의 실질적 내용이 국가기관의 입맛(해석)에 따라 고무줄처럼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것입니다.
나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믿지만, 실상 그 권리의 크기와 내용을 결정하는 주인은 따로 있는 상황. 이러한 구조적 종속성이야말로 우리가 안고 있는 치명적인 취약성입니다.
③ 자기결정권(Autonomy)의 취약성: 결정권의 비대칭
자기결정권의 취약성이란 나의 자기결정권이 국가의 권력 크기에 반비례하여 취약해지는 역설을 말합니다.
국가에 대한 신뢰는 본질적으로 ‘판단의 위임’입니다. 내가 판단해야 할 몫을 국가가 대신하도록 허용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정책의 수립, 위험에 대한 정의까지 모두 정부와 거대 여당이 독점하게 됩니다.
문제는 이러한 위임이 나의 삶을 지배한다는 점입니다. 내가 주체적으로 내려야 할 삶의 핵심적인 선택들이 국가의 판단에 의해 좌우되는 구조가 형성됩니다.
결국 생명, 재산, 미래 설계와 같은 핵심 결정권을 국가에 많이 넘겨줄수록 치명적인 ‘권력의 비대칭성’이 발생합니다. 개인이 ‘선택할 자유’는 갈수록 위축되는 반면, 국가의 ‘결정할 권한’은 비대해지는 것입니다.
◆국민이 기대한 ‘국가가 해야 하는 특정 행동’ (ABIS 모델)
우리는 결과, 권리, 자기결정권의 위험을 감수하고 국가에 통제권을 위임한다는 것은 국가가 특정 상황에서 반드시 해야 할 행동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기대로 인해 세금·규제 수용·법 준수·개인정보 제공·일부 자유의 제한까지도 감수합니다. 이 기대가 무너질 때 신뢰는 파탄납니다.
그렇다면 국가가 해야 하는 특정행동은 ABIS(Ability, Benevolence, Integrity, Structure)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①선의(Benevolence) 관점의 기대 행동
취약계층을 우선 보호하는 행동입니다. (예: 이전지출은 보편 아닌 선별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정파를 넘어 동등하게 국민을 보호하는 행동입니다.(예: 진영의 요구만에 반응한 결과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감소시키는 ‘부분 최적화’, ‘진영이기주의’는 국민의 기대에 반하는 행동입니다. )
사익이 아니라 장기적 공익을 기준으로 선택하는 행동입니다.(예: 대장동 개발 비리와 관련된 수익 환수 절차(항소)를 국가가 포기하는 행위는 선의에 반하는 행동입니다.)
선의가 확인될 때 시민은 “내 취약성을 악용하지 않을 국가”라고 판단합니다.
②능력(Ability) 관점의 기대 행동
예측 가능한 위험을 선제적으로 예방하는 행동입니다.(예: 환율 방어와 같은 거시적 경제 위기 징후는 놓치면서, 탈모 지원과 같은 지엽적 인기몰이 정책에만 치중하는 태도는 국정 운영 능력에 대한 근본적 의심을 불러일으킵니다. 국민이 국가에 바라는 능력은 단순한 '인기 관리'의 ‘행정’이 아니라, 국가의 생존을 책임지는 '위기 관리'의 ‘정치’ 역량입니다. )
위기 시 지휘·조정 체계를 작동시켜 혼선을 줄이는 행동입니다.
민생·경제 위기에서 갈등을 조정하고 실행 가능한 해법을 도출하는 행동입니다.
능력이 확인될 때 시민은 “국가는 최소한 일을 한다”는 안정감을 갖습니다.
③정직성(Integrity) 관점의 기대 행동
동일 위반에는 동일 수사·동일 처벌이 작동하는 행동입니다.
권력 주변의 비리도 성역 없이 드러내고 제재로 연결하는 행동입니다.
정책·수사·제재가 여론이나 정치가 아니라 법과 절차에 따라 일관되게 집행되는 행동입니다. (예: 일반 국민에게는 가혹하리만치 엄격한 법의 잣대가, 대장동 사건과 같은 거대 이권 세력 앞에서는 항소 포기라는 기이한 ‘관용’으로 돌변했습니다. 이는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다”는 대원칙을 무너뜨리고, “힘 있는 자들에게는 다른 규칙이 적용된다”는 특권의 논리를 국가가 공식화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러한 이중적 태도는 공정한 법 집행을 믿었던 국민의 기대를 저버리는 행위입니다.)
정직성이 유지될 때 시민은 “권력은 내 위에 있어도 규칙은 내 편”이라고 느낍니다.
④구조(Structure) 관점의 기대 행동
사법부 독립을 보장하는 행동입니다. (예: 법왜곡죄 신설, 재판소원제 도입 등 사법부의 판단을 정치적으로 통제하려는 시도는 '사법 독립'이라는 헌법적 가치를 훼손하는 것입니다. 이는 제도가 정치적 외풍에 흔들리지 않고 공정하게 작동하기를 바라는 국민의 기대에 정면으로 반하는 행위입니다.)
언론·표현의 자유가 위축되지 않도록 압력을 자제하는 행동입니다. (예: 허위조작정보 근절법과 같이 표현의 자유를 옥죄는 입법은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입니다. 이는 국가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보호하기보다 통제하려 한다는 점에서 국민의 기대에 정면으로 반하는 행위입니다.)
구조가 작동할 때 시민은 “정부가 틀려도 시스템은 나를 지킨다”고 판단합니다.
◆신뢰의 종합 정의: 기대 + 통제권 위임 + 취약성 노출
신뢰는 상대방의 행동에 대한 '기대'에 근거하여 기꺼이 '결과, 권리, 자기 결정권의 위험'을 감수하고, 자신의 '취약성'을 드러내는 자발적 선택입니다.
이를 국가에 적용하면 국가 신뢰는 다음 세 가지의 결합입니다.
•기대: 국가는 우리가 기대하는 중요한 행동을 할 것이라는 기대가 신뢰의 출발점입니다. 이 기대는 ABIS(선의·능력·정직성·구조)로 구체화됩니다.
•통제권 위임: 시민은 보호 기대가 성립할 때 국가에 강제력, 규제, 과세·재정집행, 위기 대응, 정보 처리, 수사·감사 등 핵심 통제권을 위임합니다.
•취약성 노출: 통제권을 위임함으로써 시민은 결과·권리·자기결정권이 침해될 위험, 즉 취약성을 현실적으로 감수하게 됩니다.
◆신뢰 붕괴의 연쇄 작용
기대 + 통제권 위임 + 취약성 노출의 결합인 신뢰는 국가가 전체 공익이 아닌 진영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부분 최적화(Partial Optimization)'를 추구할 때 붕괴의 길로 들어 설 수 있습니다.
그 인과적 흐름은 다음과 같습니다.
신뢰 붕괴의 연쇄 작용은 정치 세력이 공익(전체 최적화) 대신 진영의 이익을 우선하는 ‘정치적 부분 최적화’를 선택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1단계).
이러한 선택은 곧바로 시민이 기대했던 ABIS(선의, 정직성, 구조)의 동시다발적 훼손으로 이어집니다. 대장동 항소 포기와 같이 특정 이권 카르텔을 보호함으로써 ‘선의’가 무너지고, ‘내로남불’식 법 적용으로 ‘정직성’이 파괴되며, 사법 독립 침해로 ‘구조’적 신뢰마저 훼손됩니다(2단계).
이로 인해 시민들의 인지 체계에 근본적인 전환이 발생합니다. 과거에는 국가에 권한을 맡기는 것이 자발적인 선택(취약성 노출)이었다면, 이제는 “국가에 맡긴 권한이 도리어 나를 공격할 수 있다”는 인식이 현실적인 위협으로 다가옵니다.(3단계).
이러한 판단은 곧 “국가는 나를 보호하지 않는다”는 불안과 공포로 확산되어 사회 전반을 지배합니다(4단계).
결국 시민들은 통제권 위임을 거부하고 법치주의에 냉소를 보내며, “내 살 길은 내가 찾아야 한다”는 각자도생(各自圖生)의 길로 내몰리게 됩니다(5단계).
그 끝에는 정치 주도세력에 대한 신뢰 붕괴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6단계)
따라서 정치 주도세력은 정파적 사익이나 기득권 보호에 치우쳐 국가 공동체 전체의 후생을 갉아먹는 ‘부분 최적화’의 행태를 버려야 합니다.
◆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가 헌법적가치를 지켜낼 수 있어
앞선 분석처럼 신뢰란, 국민이 불확실성 속에서도 국가가 자신의 취약성을 보호해 줄 것이라는 기대(ABIS)를 갖고 통제권을 위임하며, 그 위임으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결과·권리·자기결정권의 취약성 노출을 기꺼이 감수하는 상태입니다.
하지만 정치주도세력이 정파적 사익이나 기득권 보호에 치우쳐 국가 공동체 전체의 후생을 갉아먹는 ‘부분 최적화’의 행태를 추구할 때, 이 신뢰는 붕괴하게 됩니다.
이 과정의 배경에는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연성 가드레일인 '상호관용'과 '제도적 자제'의 결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결국 국민이 감수한 자발적 취약성이 ‘불안’과 ‘공포’로 변질되는 것을 막는 관건은, 정치 주도 세력이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라는 민주주의의 연성 가드레일을 굳건히 지키는 데 있습니다. 그 규범이 작동할 때 국민의 국가에 대한 기대가 현실에서 구현되고, 헌법적 가치인 경성 가드레일도 온전히 보전될 수 있을 것입니다.
2026년 새해에는 정부여당이 2차 특검 설치와 사법권을 옥죄는 입법으로 제도를 무기화하는 대신,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로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기를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