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커뮤니티와 미디어에서 회자되고 있는 ‘에겐남·테토녀’ 담론은 겉보기에 기존의 성 역할을 뒤흔드는 해방의 언어처럼 해석되고 있습니다.
남성은 더 이상 강인함에만 갇히지 않고 섬세한 공감 능력을 매력으로 내세우며, 여성 역시 수동적인 돌봄의 틀을 벗어나 주도적인 결단력을 갖춘 존재로 재정의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현상을 한 겹만 벗겨보면 전혀 다른 심리적·사회적 구조가 드러납니다. 이는 성 역할의 진정한 해체가 아니라, 기존의 성별 도식을 오히려 강화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옵니다.
◆ 테토남과 에겐녀
에겐남과 테토녀는 성호르몬(테스토스테론과 에스트로겐)을 기반으로 사람의 성격·행동·연애 스타일을 재미있게 분류하는 개념입니다.
테토는 테스토스테론(testosterone, 남성호르몬)의 준말로, 주도적·직설적·능동적·강한 에너지·리더십 등의 느낌을 말합니다. 이에 반해 에겐은 에스트로겐(estrogen, 여성호르몬)의 준말로, 섬세·감성적·공감·부드러움·조화 등을 중시합니다.
이것들을 성별에 붙여서 다음의 총 4가지 유형으로 나눕니다. △테토남 (테스토스테론형 남자) △에겐남 (에스트로겐형 남자) △테토녀 (테스토스테론형 여자) △에겐녀 (에스트로겐형 여자)
전통적 젠더롤에 부합하는 유형은 테토남과 에겐녀입니다.
테토남 (테스토스테론형 남성)은 전형적인 전통 남성상으로, 리더십 강함, 직설적·단순·운동·도전 좋아함, 논리·행동파, 적극 리드 등의 성향을 보입니다.
에겐녀 (에스트로겐형 여성)는 전형적인 전통 여성상으로, 감성적·예민·섬세·공감 잘함, 분위기 읽기·배려·러블리·아기자기한 것 좋아함, 관계에서 조화와 안정을 중시합니다. 한마디로 “여성스럽다”는 말을 자주 듣는 타입입니다.
◆ 에겐남과 테토녀
이에 반해 전통적 젠더롤에 반대되는 유형이 에겐남과 테토녀입니다.
에겐남은 에스트로겐 성향이 강하게 느껴지는 남성으로, 전통적인 “남자다움”보다는 다정·섬세·공감·예민·감성적인 이미지를 가집니다.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챙김 받는 걸 좋아하고, 리드해주는 상대에게 끌림
•상대 감정을 잘 읽고 공감 잘해줌
•다정하고 세심함, 애교 많음, 공감해주고 부드러움
•갈등 시 직접 부딪히기보다 참거나 우회적으로 표현
•외모·패션·인스타 감성에 신경 많이 씀
테토녀 (테스토스테론형 여성)는 전통 여성성에서 벗어난 타입 (젠더롤 역전의 대표)으로, 솔직·직설·주도적·독립적·커리어 지향, 털털·추진력·외향적, 편한 옷·힙한 스타일, 갈등 시 정면 돌파 등의 성향을 보입니다. 한마디로 “쿨하고 당당한” 이미지를 가지고, 리드하거나 맺고 끊음이 확실합니다.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당당하고 추진력있음.
•솔직하고 직설적, 할 말은 다 함
•리더십 있고 주도적임, 혼자서도 잘함 (혼밥·혼술·혼여행 OK)
•갈등 시 정면 돌파, 뒤끝 거의 없음
•개성 강하고 힙한 스타일 즐김
•연애에서도 주도권 잡는 편, 데이트비용을 반반 부담
◆ 겉보기엔 전복, 실상은 ‘견고하게 유지되는 ‘심리적 기본값’의 함정
이처럼 에겐남·테토녀 담론은 젠더롤 역전의 상징으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담론은 성 역할의 해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본 역할을 고정으로 둔 채 범위를 전략적으로 확장한 결과, 오히려 기존의 전통적인 성역할을 강화하는 기능을 수행합니다.
이 현상의 핵심은 성별에 따른 심리적 ‘기본값(Default)’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이 담론의 논리 구조는 다음과 같이 요약됩니다.
담론의 전제는 남성은 본래 이성적(Logos)이고, 여성은 본래 감성적(Eros)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매력적인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각자가 부족한 ‘반대 원리’를 보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보완의 결과, 감성을 갖춘 남성(에겐남)과 주도성을 갖춘 여성(테토녀)이 등장합니다.
문제는 “감정은 여성의 영역, 판단은 남성의 영역”이라는 최초의 배치를 그대로 둔 채 그 위에 반대원리를 조금 섞는 방식을 취한다는 점입니다. 이는 해체가 아니라, 오히려 기존의 분리 체계를 다시금 승인하는 꼴이 됩니다.
따라서 에겐남·테토녀라는 명명은 역설적으로 고정관념을 더욱 공고히 하는 효과를 낳습니다.
예컨대 여성을 ‘테토녀’라고 명명하는 순간, 우리는 암묵적으로 “여성은 원래 주도성이 부족하다”는 전제를 다시 호출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남성이 감정을 드러낼 때 그것을 ‘아니마의 발현’으로 설명하는 방식 역시, 감정 자체를 남성 인격의 본래적 요소가 아니라 외부에서 보완된 기능으로 위치시킵니다.
◆ 융의 아니마·아니무스: 대중화된 본질주의의 반복
이러한 구조는 심리학자 Carl Gustav Jung의 아니마·아니무스 이론과 맞닿아 있습니다. 융은 남성의 무의식에는 여성적 원리인 아니마가, 여성의 무의식에는 남성적 원리인 아니무스가 존재한다고 보았습니다.
이 이론의 출발점은 분명합니다.
즉, 인간의 심리에는 성별에 따라 우세한 경향, 다시 말해 일종의 기본값(default)이 존재한다는 가정입니다. 융은 이를 개념적으로 정식화하면서, 남성은 로고스(이성·판단), 여성은 에로스(관계·감정)에 더 가까운 구조를 가진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지점에서 융의 이론과 에겐/테토 밈은 동일한 논리 구조를 공유하게 됩니다.
•전제: 남성은 본래 로고스 중심, 여성은 본래 에로스 중심이다.
•보완: 따라서 성숙이란 자신에게 결여된 반대 원리를 통합하는 과정이다.
•결과: 감성을 수용한 남성(아니마 통합)과, 판단력을 강화한 여성(아니무스 통합)이 이상적인 형태로 제시된다.
문제는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통합’과 ‘확장’을 말하는 이 구조가, 실제로는 성별에 따른 심리적 기본값을 전제한 채 그것을 유지·재생산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구조는 통합을 말하지만, 그 출발점이 되는 ‘성별 본질’을 그대로 고정시킨다는 역설에 도달합니다.
이 점에서 에겐남·테토녀 담론은 융의 아니마·아니무스 이론을 현대적 언어로 번역한 대중적 변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에겐/테토 밈과 융의 이론은 역사적 맥락과 개념 체계가 다르지만, 성별에 따라 심리적 기본값을 설정하고 그 반대 성질의 통합을 성숙의 서사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구조적 유사성을 보입니다.
◆ 미디어의 공모: 변주를 통한 고정관념의 강화
이 담론이 확산되는 데에는 미디어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습니다. 드라마와 예능은 이 캐릭터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대중의 기존 성역할 인식을 고착화하고 있습니다.
드라마는 표면적으로는 ‘부드러운 남성’과 ‘강한 여성’의 조합을 내세워 성 역할의 전복을 시도하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서사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남성은 여전히 갈등을 해결하는 실질적 주체로, 여성은 관계를 안정시키는 감정적 중심으로 배치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과적으로 성별에 따른 기능적 분업 구조는 외형만 변형된 채 여전히 서사의 핵심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예능 프로그램은 ‘에겐남’, ‘테토녀’와 같은 언어를 사용하여 전형적인 성 역할과 어긋나는 듯한 ‘반전 매력’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연출은 대부분의 남성과 여성은 여전히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의 틀 안에서 행동한다는 전제를 역설적으로 강화합니다. 결국 기존의 성별 규범을 가볍게 변주할 뿐, 그 틀 자체는 오히려 더욱 공고해지는 결과를 낳습니다.
연애 예능은 ‘에겐남 × 테토녀’ 같은 공식을 통해 관계를 설명하곤 합니다. 이러한 퍼즐 맞추기식 서사는 인간을 그 자체로 완결된 존재가 아니라, 외부의 누군가와 결합해야만 비로소 의미를 획득하는 불완전한 조각으로 규정하는 셈입니다.
결과적으로 미디어는 성별 고정관념을 근본적으로 해체하기보다, 대중이 거부감 없이 수용할 수 있는 '세련된 재포장'을 통해 기존의 이분법적 질서를 더욱 견고하게 지속시키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성별 역할 전제의 틀을 해체
이제 우리는 ‘균형’이나 ‘조화’라는 완곡한 표현 뒤에 숨어 있는 성역할 고정관념을 걷어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논의는 대개 남성과 여성에게 각기 다른 심리적 기본값이 존재한다는 전제를 유지한 채, 그 결핍을 서로 보완하는 방향으로 성숙을 설명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성별 구분을 넘어서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더 정교하게 연장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따라서 진정한 대안은 ‘부족한 것을 채우는 보완’이 아니라, 애초에 인간을 해석해 온 성별이라는 틀 자체를 해체하는 데서 출발해야 합니다.
첫째, 가장 먼저 폐기해야 할 것은 기본값의 전제입니다.
“남성은 본래 로고스 중심이고 여성은 본래 에로스 중심이다”라는 구도는 인간의 복합성을 지나치게 단순화합니다.
이에 맞서 필요한 선언은 훨씬 근본적입니다. 곧 모든 인간은 로고스와 에로스를 동시에 지닌 다기능적 존재라는 관점입니다.
이때 성숙은 한쪽이 다른 한쪽을 빌려와 보충하는 과정이 아니라, 처음부터 자기 안에 함께 존재하던 여러 기능을 인식하고 조율하는 과정이 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통합’이 아니라, 인간 이해의 출발점을 바꾸는 패러다임 전환입니다.
둘째, 이러한 전환은 곧 기능의 탈성별화로 이어져야 합니다.
주도성, 공감, 돌봄, 결단력, 분석력 같은 능력은 특정 성별에 본래적으로 귀속된 속성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어떤 기능은 남성적이라 부르고, 다른 기능은 여성적이라 명명하면서 인간의 능력을 성별의 언어로 번역해 왔습니다. 이제는 이 관행 자체를 멈춰야 합니다. 감정은 여성의 것이 아니며, 판단은 남성의 것도 아닙니다. 그것들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인간의 보편적 기능일 뿐입니다.
셋째, 이 변화는 인간관계에 대한 이해 역시 바꾸어 놓습니다.
기존의 보완 모델은 나를 어딘가 결핍된 존재로 설정하고, 상대를 그 빈칸을 메워 줄 존재로 상정합니다.
그러나 이런 관계는 결국 타인을 하나의 기능적 보충물로 축소시킬 위험이 있습니다.
반대로 성별 본질주의를 벗어난 관계는 결핍의 충족이 아니라 인격의 확장을 지향합니다. 나는 애초에 미완의 반쪽이 아니라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존재이며, 타인과의 만남은 부족함을 메우기 위한 거래가 아니라 내 안의 가능성을 더 넓게 열어 가는 과정이 됩니다.
넷째,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융의 개성화 개념 역시 새롭게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개성화를 단순히 ‘남성 안의 여성성’ 혹은 ‘여성 안의 남성성’을 통합하는 과정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성별 이분법의 언어 안에 머물게 됩니다. 오히려 개성화는 성별이라는 해석 틀을 거치지 않고, 자기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심리 기능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발현해 가는 과정으로 재해석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남성적인가 여성적인가가 아니라, 그것이 내 안에서 얼마나 진실하고 통합된 방식으로 살아 움직이느냐입니다.
◆ 철학적 성찰: ‘반쪽’이 아닌 ‘온전한 인간’으로의 초대
우리가 지향해야 할 진정한 성숙은 단순히 ‘남성적인 여성’이나 ‘여성적인 남성’이 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런 표현은 겉보기에 유연해 보일 수 있지만, 여전히 기존의 성별 기준을 전제한 채 그 경계를 조금 완화한 것에 불과합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해방이 아니라, 성별 규범과의 타협에 더 가깝습니다.
핵심은 성별에 부합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별이라는 구분에 앞서, 인간이 본래 지닌 다양한 가능성을 자각하는 데 있습니다.
즉 감정, 판단, 돌봄, 리더십, 결단, 공감 등의 인간의 다양한 가능성은 어느 한 성별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인식이 요구됩니다. 그것들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닐 수 있는 보편적 능력이며, 삶 속에서 서로 다른 비율과 방식으로 발현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더 이상 누군가를 보완하기 위해 태어난 반쪽이 아니라, 이미 각자 안에 다양한 가능성과 기능을 품고 살아가는 하나의 온전한 인간입니다.
진정한 성숙은 반대편의 성질을 덧붙여 균형을 맞추는 데 있지 않고, 성별이라는 오래된 분류를 넘어, 자기 안의 복합성과 가능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펼쳐 나가는 데 있습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인간은 비로소 ‘남성’이나 ‘여성’ 이전의 존재, 곧 ‘온전한 인간’으로 서게 됩니다.
◆전략과 실천: ‘기능 중심’의 국방 패러다임과 입법적 구체화
온전한 인간으로 서기 위한 성별 본질주의의 해체는 단순한 인식의 전환에 그치지 않습니다. 즉 개인을 성별이 아니라 역량과 기능의 관점에서 바라보기 위해, 제도의 변화가 요구됩니다.
예컨대 특정 성별에게 병역 부담을 집중시키는 방식에서 벗어나, 개인이 지닌 전투·기술·지원 역량을 기준으로 역할을 재배분하려는 접근은 이러한 전환의 구체적 사례가 될 수 있습니다.
특히 저출산으로 병역 자원이 감소하는 상황에서, 이는 지속 가능한 국방을 모색하기 위한 현실적 대안으로 제기됩니다.
대한민국은 앞으로 병역 자원 감소에 따른 구조적 압박에 직면할 가능성이 큽니다. 따라서 ‘여성 전면 징병’과 같은 이분법적 논쟁에 머물기보다, 병역의 부담과 기여 방식을 기능별로 재구성하고 그 참여 범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에 대한 제도적 검토가 필요합니다.
국민의힘 김미애 의원의 병역법 일부개정법률안도 이러한 논의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개정안의 핵심은 여성에게도 자발적인 현역병 지원 기회를 부여하는 데 있습니다. 현행법상 여성은 장교나 부사관 등 간부로 지원하는 방식만 가능하지만, 개정안은 병무청장 또는 각 군 참모총장이 현역병을 선발할 때 성별과 관계없이 지원자를 모집·선발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는 여성의 군 복무 참여 범위를 간부 중심에서 일반 병사 영역까지 넓히는 제도적 변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이 개정안은 남성에 대한 기존 징집 체계를 유지하면서, 여성의 경우에는 의무 복무가 아니라 본인의 의사에 따른 지원 방식으로 현역병 복무를 가능하게 하는 구조를 전제로 합니다. 다시 말해, 이 법안은 여성에게 병역의무를 새로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선발 절차를 거쳐 현역병으로 복무할 수 있는 법적 통로를 마련하는 데 방점이 있습니다.
아울러 법안에는 여성 현역병 제도의 운영 상황을 점검하기 위한 보고 규정도 포함됩니다. 국방부 장관이 여성 현역병의 복무 실태, 고충, 제도 운영 현황 등을 국회에 정기적으로 보고하도록 함으로써, 제도 시행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점검하고 보완할 수 있도록 하려는 취지입니다.
결국 김미애 의원의 개정안은 군을 성별에 따라 엄격히 구획된 공간으로만 보지 않고, 국가 방위에 참여할 수 있는 인력의 범위를 제도적으로 조정하려는 시도로 읽을 수 있습니다. 또 그것이 곧바로 군의 성격 전체를 바꾸는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병역 자원 감소 시대에 여성의 자발적 참여를 제도권 안으로 편입하려는 입법적 문제 제기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결국 이 법안이 여전히 남녀의 의무 차이를 두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이는 성별이라는 거대한 벽을 허물기 위한 최소한의 입법적 시작점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 성 역할 고정관념의 전제를 버려야 온전한 인간의 서사가 시작
에겐남·테토녀, 아니마·아니무스는 모두 동일한 출발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남성과 여성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낡은 전제가 이들 논리의 공통된 뼈대를 이룹니다. 따라서 어떤 전복이나 통합도 결국 고정관념의 수명을 연장하는 세련된 도구에 그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진정한 변화는 인간을 이해하는 1차적 기준으로 성별을 앞세우는 그 전제 자체를 내려놓는 데서 시작됩니다. 자신을 어느 한쪽에 위치시키고 부족한 점을 보완하려는 ‘균형’의 논리 역시 본질주의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결국 우리가 지향해야 할 성숙과 자유는, 애초에 성별로 분류될 수 없었던 인간의 다층적 잠재력을 ‘남성/여성’이라는 협소한 틀 밖으로 해방시키는 과정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군대는 성별의 구분을 넘어, 개인이 지닌 역량을 기준으로 역할을 수행하는 공간으로 재구성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온전한 한 인간’이 자신의 능력을 실질적으로 발휘하는 장이 될 수 있는지 여부를 가늠하는 하나의 시금석이 됩니다.
정리하면, 인간을 성별에 따른 고정관념으로 평가하는 시선을 거둘 때, 비로소 에겐남도 테토녀도 아닌 ‘온전한 한 인간’의 서사가 시작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