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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치유 ; <굿윌 헌팅> 리뷰 ] I Hug You for nothing

한 남자가 거리에서 팻말을 들고 있습니다. 팻말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I Hug You for nothing,” 공짜로 안아준다고? 저 남자는 왜 안아 준다는 거지?

우리는  친한 친구끼리 통화를 할 때,  보통 첫 마디가 “어디야?”입니다. “안녕한가”라는 물음 대신 ‘지금 네가 있는 곳이 어디냐’며 친구의 소재를 탐문합니다.  

이렇게 장소를 추궁당하면, 친한 친구 사이일지라도 ‘내가 어디에 있든 네가 뭔 상관이야’라고 불쾌감을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정신분석학자들은 이 질문은 종로, 잠실등 구체적인 공간적 장소를 묻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인 장소에 대한 관심이라고 합니다. 어떠한 심리적 현실에 살고 있느냐는 다소 철학적인 안부 인사라는 겁니다.  

당신이 우울, 초조, 열등감, 분노등 심리적 불안에 놓여 있는지, 아니면 위로 평화, 행복등 안정된 공간에 위치에 있는가라는 심리에 대한 관심의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 윌의 반사회적 경향과 부모의 학대

영화의 주인공, 갓 20살의 윌 헌팅턴은 가슴에 불을 묻어 놓고 있습니다.  

윌은 부모에 버림받고, 양부에게 걸핏하면 폭행을 당했습니다. 양부는 ‘늘 탁자에 렌치와 막대기와 혁대를 늘어놓곤 선택하라’고 하면, 윌은 늘 렌치를 택하였습니다.  부모의 학대에  ‘할 때까지 해보란 심정’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그는 부모의 학대로 인해 ‘박탈’당한 심리에 놓여 있습니다. 

박탈은 공격성과 적개심을 품게 합니다. 그로 인해  가슴엔 늘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습니다. 

부모의 아이에 대한 신체적 학대,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행해지는 욕설과 간접학대, 그리고  무관심과 방치등은 아이의 보복 충동을 가져오게 됩니다. 이는 다른 사람에 대한 물리적 공격으로 이어 지기도 합니다.  자신보다 약한 이들에 대한 물리적 폭행과 갈취등으로 그동안 당한 학대를 보상받는다는 겁니다.  

윌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는 폭행과 차량 절도로 재판에 넘겨지는 것이 다반사입니다. 예를 들자면 우연히 만난 유치원 시절의 친구와의 싸움입니다. 유치원 때 자신을 괴롭혔다는 것이 싸움의 이유였습니다. 그는 이 일로 인해 감옥에  갇힙니다. 

이러한 반사회적 경향은 어린 시절 부모의 잘못된 돌봄으로 인해 나타난 것이라고 정신분석학자 도널드 위니캇( Donald Winnicott)은 분석합니다. 

반사회성 성격장애자는 자신이 공격한 타인의 고통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들은 다른 사람에게 상해를 입히면서 잘못을 못 느끼고 폭력성을 합리화합니다. 한마디로 기본적인 인간성을 갖고 있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존감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또한 부모의 물리적, 심리적 학대는 사랑받기 합당한 아이들을 스스로 쓸모없는 존재로 떨어뜨립니다. 박탈이 자존감을 깎아내린다는 겁니다. 

자존감을 떨어뜨리는 힘은 내면의 작은 아이입니다. 정신 분석가들은 이를 내면의 비판자라고도 표현합니다. 작은 아이란 미성숙과 자기비하를 의미합니다. 

내면의 작은 아이는 “바보야. 넌 도대체 제대로 하는 게 뭐야” “넌 아무리 노력해도 안 돼” “난 네가 창피해” 라며 아이의 마음을 공격합니다. 

이 목소리를 들은 아이는 “지긋지긋한 세상, 난 이 세상에 왜 태어났지. 난 정말 멍청해”라며 작은 아이의 목소리를 내면에 강화시키며, 마음을 절벽으로 떨어뜨립니다. 자기에 대한 신뢰와 자존감은 나락으로 떨어진지 오래 입니다. 아이는 자신을 세상에 쓸모없는 무용지물이라 여깁니다. 
 
박탈이 심해지면  작은 아이의 목소리는 더욱 우렁차집니다. “넌 쓰레기 같은 인간이야.” 이렇게 마음의 작은 아이가 자기 비난의 소리를 쏟아냅니다.  이 마음의 작은 아이가 지시하는 목소리에 마음과 몸이 지배당하게 됩니다. 

비난의 소리가 커지면, 세상에 대한 공격과 복수를 행하거나, 극단적으로 자신을 세상에서 지우고자 합니다. 

이렇게 박탈로 인해 미성숙의 아이가 마음의 운전대를 잡으면서, 아이는 분열로 이어지게 되는 겁니다.  


◆박탈은 마음의 벽을 쌓게 하고  

윌은 박탈로 인한 결핍된 사랑을 보상받기 위해 그의 천재적 능력으로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자 합니다. 

MIT대학의 청소부로 일하는 윌은 청소 도중, 복도 칠판의 수학문제를 몰래 풉니다.  이 문제는 세계에서 몇 명만 풀 수 있는 수학문제 인데요, 수학의 노벨상인 필즈상의 수상자 램보 교수가 학생들에게 과제로 남겨 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의 천재성에 감탄하여 그에게 관심과 사랑을 쏟게 하고자 하는 의도였지요.   

또한 박탈로 인한 자존감의 하락은 마음의 벽을 쌓게 합니다. 윌은 버림받을 수 있다는 불안과 공포가 사람들을 밀어냅니다. 윌은 그를 사랑한 하버드 재학생 스카일라를 이러한 연유로 떠나보냅니다. 

윌은  친구들과 하버드대 근처 클럽에 놀러갑니다. 그곳에서 그는  남부시장 경제혁명에 관한 주제로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던 하버드 남학생의 코를 심화된  지식으로  납작하게 합니다. 이러한 지식 배틀을 지켜본 스카일라는 윌에 관심을 보이고 두 사람은 연인 사이가 됩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진심어린 관계로 발전하지 못합니다. 윌은 버림받은 상처가 낙인이 되어, 다시 다른 사람으로부터 버림받지 않고자 합니다. 버려지지 않기 위해선 먼저 상대를 차버리면 됩니다. 

그렇게 내면에 방어하는 성벽을 높이 쌓아올리면서, 상대에 대한 불신을 더욱 깊게 합니다. 천재인 윌도 이처럼 버림받게 된다는 두려움으로 자존감을 나락으로 떨어뜨립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버림받기전에 그녀를 떠나보내게 합니다. 이는 상처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이렇게 윌은 방어심리를 구축합니다.  윌은 다른 사람이 그의 마음으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치 않고 있습니다.  


◆치유- 관점의 변화 

부모의 학대는 공격의 씨앗이 되어, 파괴로 커져 갑니다. 그렇다면 파괴로부터의 회복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상처 치유의 첫 단계는 내면의 작은 아이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마음을 조정하는 마음의 운전자에게 운전대를 맡기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마음의 작은 아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고개를 돌려 파란 하늘을 올려 다 봅니다. 자신의 상처를 안아주는 누군가를 찾는 것입니다. 자신의 상처를 싸매주는 이를  영혼의 친구 soul mate 합니다. 자신의 의지로 감쌀 수 없는 상처를 영혼의 친구는 어루만져 줍니다. 

이렇게 자신의 슬픔으로 흔들거리는 어깨를 감싸주는 영혼의 친구에게, 자신의 상처를 내려놓습니다. 이는 과거의 상처를 새롭게 바라보는 것으로, 정신분석학자들은  이를 ‘관점의 변화’라 합니다.  

윌은 램보 교수의 소개로 심리치료자인 션 교수를 만나게 됩니다. 윌은 션과의 첫 만남에서 늘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상처를 션 교수에게 퍼붓습니다. 이에 션 교수도 당한 감정을 윌에게 되갚습니다. 전이와 역전이가 나타난 것입니다. 

하지만 션은 그의 상처의 쓴 뿌리를 알고 있기에, 윌의 영혼의 친구로 그의 상처를 감싸줍니다. 

션교수는 되풀이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건 네 잘못이 아니야. It’s not your fault.” 마음의 상처는 너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네가 바보 같아서 그 일이 벌어진 건 아니라는 겁니다. 이러한 상처는 네가 지독한 불운 때문에 나타난 것도 아닙니다. 

이 일로 자신을 학대하고 내면의 아이에게 자신을 내어놓을 순 없습니다. 그 상처를 나의 영혼의 친구에게 맡깁니다. 

영혼의 친구를 만나 친구가 자신을 안아주는 것은 내면의 작은 아이의 포박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만약 실수나 실패를 하게 되면, 내면의 아이는 “멍청이, 넌 평생 안 돼”라고 말하지만, 영혼의 친구는 “괜찮아. 몸 컨디션이 안 좋았구나. 좀 실수했네, 앞으로 잘 할 수 있을 거야”라고 어깨를 툭툭 치며 상심한 아이를 안아줍니다. 이렇게 작은아이가 아닌 나의 영혼의 친구와의 대화에서  관점이 변화 됩니다. 


◆낫고자 하는 갈망 

이처럼 나락으로 떨어진 자신을 구하는 영혼의 친구는 거저 얻어지지 않습니다. 물가에 드러누워 있다고 물이 자기 입안으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자신을 연못에 던져야 합니다. 자신이 영혼의 친구와의 관계를 맺기 위해, 그를 찾고 두드려야 합니다. 

예컨대 사람들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찾아 나서기도 합니다. 지쳐, 텅빈 공허감이 내면을 공격할 때, 편한 휴식 대신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납니다. 혹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또는 인생의 문제가 무엇인지 몰라 그 문제를 찾기 위해 순례길을 걷기도 합니다. 그곳에서 순례자들은 영혼의 친구를 만나 회복을 얻습니다. 

이렇게 영혼의 친구를 찾아 나선다는 것은 곧 마음의 작은 아이에게서 벗어나겠다는 갈망, 낫고자 하는 소망을 의미합니다.    


◆ 성장과 자유 

영혼의 친구는 나의 짐을 함께 지게 됩니다.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이는 곧 상처의 치유입니다. 

치유 후에도 지속적인 성장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 영혼의 친구와 계속적인 관계성을 강화시켜야  합니다. 미성숙에서 성장으로 향하는 과정에 마음의 비판자는 불쑥 불쑥 고개를 들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작은 아이의 목소리를 제압하기 위해 마음을 강하게 해야 합니다.  심리치료, 독서치료도 이에 대한 하나의 방안입니다. 독서치료는 소설 에세이·심리치료 서적· 종교서적등을 읽어, 인물과 작가와의 동일시· 카타르시스· 통찰등을 얻는 것입니다.  어떠한 치료를 받든, 목적은 관계성을 지속하는 것입니다. 

결국 궁극적인 치유는 관계의 회복입니다. 윌은 좋은 조건의 입사를 포기하고 캘리포니아로 떠난 스카일라를 찾아 떠납니다. 당장의 물질적인 안위보다 영혼의 또 다른 친구를 찾아 나선 겁니다. 이제 그는 밀어내기가 아니라  영혼의 친구를 포용합니다. 

영혼의 친구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상처로 아파할 때 “많이 힘들지”라며 우리의 등을 따뜻이 어루만지며 안아줍니다. 이 때 우리는 ‘이제 난 혼자가 아니야’라는 깨달음에서 자유를 얻습니다. 버림받고 내동댕이쳐진 자신이 사랑받는 존재로 변화됩니다. 

이제 우리는 ‘자유인 freeman’입니다. 

 △영화정보 
 감독; 구스 반 산트, 
 출연; 맷 데이먼, 로빈 윌리암스, 벤 애플렉, 스텔란 스카스가드
 각본: 맷 데이먼, 벤 애플렉 (98년 아카데미 최우수 각본상, 1998년 골든 글로브 최우수 각본상 수상)


<참고 자료>
이무석(2006), 「30년만의 휴식」, 비전과 리더십
이무석(2009), 「자존감」,  비전과 리더십
이무석, 이인수(2013), 「스펙보다 중요한 내아이의 자존감」, 알피코프
롤프 메르클레, 유영미옮김(2014), 「나는 왜 나를 사랑하지 못할까」 
정서희(2009), 「위니캇의 정신분석이론으로 바라 본 반사회적 경향성」 서울여자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신경규(2003), 「내적치유의 목회적 적용」, 고신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데이빗 씨맨즈, 송헌복 옮김 (1995), 「상한 감정의 치유」, 두란노 
영화 <나의 산티아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