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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여성

[일본군 위안부 ② ] 민족담론과 페미니즘담론의 대립과 이들의 연합

지난 5일 윤병세 외교부장관이 유엔 인권이사회의 기조연설에서 일본이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인정과 사과를 해야 한다고 발언한데 대해, 오카다 다카시 주 제네바 일본 차석대사는 6일 같은 장소에서  위안부 문제는 이미 배상을 통해 법적으로 해결됐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굽혀지지 않는 왜곡된 시각은  일본의 공식적인 사과와 배상, 책임자 처벌이라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법의 종착점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위안부 문제에 대하여 우리의 인식의 심화와 이에 바탕을 둔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해결 노력이  요구되고 있다는 각성을 불러일으킨다.

 

우리의 위안부에 대한 내재적 인식의 보유는 실천의 영역에서 흔들림 없고 유효한  문제 해법을 제시해 준다. 특히 인식에 대한  카오스적 혼돈이 소용돌이치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 시급성이 요구되어진다. 

 

한국의 일본군 위안부와 관련한 시각은 통일되지 못하고, 치열하게 사상투쟁처럼 진행되어 왔다.  

 

일본군 위안부  논쟁의 두 기축은  위안부의 존재가 상대주의에 기초한 식민지하의 민족 억압이라는  견해와   보편주의에 근거한 성차별의 여성 억압이라는 관점이다.

 

조시현교수는  이와 같은 민족의 아픔에 의존한 내셔널리즘 담론과 여성의 인권과 평화주의에 기댄 페미니즘 담론의  대립은 과거 80년대 한국운동권의 민족해방(NL)과 민중민주(PD)의  노선투쟁과 흡사하다고 지적한다.

 

각 진영들의 담론은 무엇이며, 이러한 갈등에 대한 대안은 무엇일까?


 

◆ 민족담론

국가적 민족 차원의 접근에 의하면,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폭력은 일본 군국주의의 조선 식민지에 대한 억압구조로 이해한다.  민족중심주의 이론은  여성에 대한 폭력이라는 미시적 접근에 국가정책의 거시적 안목이 중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즉 민족 간의 억압이 성적억압에 어떻게 더해지고 여성에게 작용했는가, 민족 간의 착취가 어떻게 국가기구를 이용하여 행해졌는가라는 민족의 특수성을 전면에 내세운다.

 

이러한 시각에 기초하여 일본이라는 국가의 법적 배상 책임과 사과를 일관되게 주장한다.

 

그러므로 한국정신대대책협의회(정대협)는 국가적 배상이 아닌, 도의적으로 개인별 위로금 전달에 주 목적을 둔 ‘여성을 위한 1995년의 아시아 평화국민기금’은 일본군 위안부 범죄가 국가에 의한 조직적 성범죄라는 것을 은폐하고 국가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일본정부의 술책이라고 말한다.


 

◆가부장적 사회하의 페미니즘 담론

 

보편적 정치를 추구하는 이 담론은 전쟁의 비인간성과 여성착취를 확인함으로써 대중의 평화 의식을 높이는데 목표를 두고 있다. 그들은 일본군 위안부의 범위를 넘어서, 전 세계의 전쟁으로 비롯된 남성의 여성폭력의 총체성에 집중한다.

 

이러한 논리로 페미니스트 담론은 한국인 피해자들을 바라보는 시각은 피해자 개개인을 둘러싼 존엄에 관심을 두고, 일본국가적 차원의 배상대신 개인별 위로에 관심을 둔다. 피해자들의 생활을 지원하고 병을 고치는 인도적 접근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국민기금의 개인별 지원을 적극 수용한다.

 

◆ 민족담론과 여성담론간의 격돌

 

제국주의의 메카니즘 속에서의 민족에 대한 관심과 세계적 페미니즘운동속의 인권에 대한 집중은 서로 상대를 향해 노골적인 비판을 가하게 한다.

 

민족담론은 페미니스트들을 향해, 그들이 모두 전쟁의 피해자라는 인식하에 스스로 평화의 사도로 나섰다고 지적하며, 하지만 이러한 사랑에 찬 반전주의도 실상 철학적 통찰에 의한 결정물이 아닌, 단지 감성적 체험의 산물이라고 저평가한다.

 

또한 일본군국주의에 의해 강요된 조선여성에 대한 착취를 도외시하여, 젠더 담론이라는 그럴듯한 추상의 늪 속에서 빠져, 오히려 자유주의자들의 전위대의 역할을 한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감성에 대한 비판은   페미니즘이 구조에 대한 관심을 도외시한다는  공격으로 연결된다.  페미니즘이 여성의 지위 향상에만 관심을 둘 뿐, 이 틀을 만들어 낸 권력구조에 대한 탐구에는 의도적 회피를 시도하는 것이다. 그 결과 현행 구조를 추인하는 오류를 범한다고 지적한다.

 

한편 페미니즘의 남성중심 가부장론은 가부장제적 압력으로부터의 여성의 해방을 강조한다.

 

1991년 피해자 김학순씨의 최초 공개증언에 의해  위안부의 폭력성이 국제사회에 알려진데 대해, 일본의 페미니스트 학자인 우에노 치즈코는 한국 남성들의 압력에 의해 50년 동안 침묵을 강요당했다는 점에 충격적이었다고 말한다.

 

피해자 여성이 이처럼 침묵을 지킨 것은 한국사회에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어, ‘민족의 수치를 드러내지 말라’는 가부장제적 압력 때문이라는 것이다. 위안부 여성에 가해진 성폭력을 거론하는 것은 한국 남성의 무능을 드러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가부장적 이론에 대한 페미니즘은 민족주의를 넘어서야 한다는 당위를 강조한다.  민족의 강조가 다른 민족 피해자와 한국 여성 사이의 분단의 벽을 쌓아 올리는 기여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국의 위안부론자들은 위안부 문제는 한국 여성들에게 억압민족에 의한 여성차별이나 민족차별과의 투쟁 뿐만 아니라, 그동안 민족의 이름으로 은폐되고 때로는 정당화되어왔던 자국 내의 가부장적인 체제와도 투쟁할 것을 요구한다.

 

이들은 특히 주관적인 구조적 강제에 매달림은 남성 지배의 가부장적 사회의 여성 수탈이라는 객관적인 사회적 강제에 접근하기 힘들게 한다고 식민론자들을 비판한다. 특히 한국의 해외 아동수출이나.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인종주의적 차별과 무시는 한국 내면에 지배하고 있는 내셔널리즘의 또 다른 폭력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편론자들은 이러한 순혈주의는 한국의 새로운 지평을 넓혀나가기 위한 큰 장애로 파악한다. 결국 내셔널리즘의 방벽을 부수지 않는 한 여성인권과 보편적 평화의 쟁취는 까마득히 먼 날의 일이라고 말한다.


 

◆ 횡단과 정반합

 

민족과 여성은 이처럼 양립할 수 없는 대립항으로만 파악해야할까?

 

조교수는 이에 대해 이 둘의 관계는 택일적인 것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우선 일본군 위안부문제가 일제의 강점기에 발생하고, 식민지배하에 벌어졌으므로, 위안부문제는 반제국주의 반식민지를 의미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일제가 제국주의전쟁에 나섰다는 점에서 파시즘에 대한 거부, 저항을 상징한다. 이는 민족의 엄연한 존재의 인정이다.

 

또한  위안부문제는 여기에 덧붙여 반폭력 운동이고, 여성운동이며 인권운동의 차원이 있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들의 변증법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인식이다. 즉 일본이 일본군 위안부를 동원하는 메커니즘에 있어서, 일본이 서구문명의 계승자를 자처하고 한국을 지배하는 인종주의를 드러냈다.  그리고 이러한 인종주의가 여성의 노동가치의 전면적 수탈과 맞물리는 합주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결국 위안부 문제는 일본 제국주의적 메커니즘 속에서 민족이라는 특수성을 배제 할 수 없게 된다. 동시에 여성인권의 관점을 도외시하는 것은  여성지위 회복이라는 보편성을 무시하게 된다. 게다가  인권이라는 보편성의 부재는  위안부 문제의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해 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식민지 지배라는 트라우마의 치유는 위안부 문제의 해결의 범위를 결정하게 되고, 인권의 회복은 위안부문제의 해결 수단으로 기능하게 된다.

 

이는 일본제국주의의 민족의 관심은  피해자의 배상문제가 자연히 개인별 보상이 아닌 국가라는 기축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한다는 당위와  인권측면에의 집중은 이의 해법으로 피해자중심주의라는 접근에 도달하게 된다는 현실성을 동시에 내포한다.

 

그러므로 여성으로서 ‘나는 조국이 없다’라는 관념과 ‘조국 안에  내가 있다’라는 이론은 이분법적 귀머거리의 대화이다. 이제 상대주의와 보편주의라는 다툼대신 우리가 누구인가라는 관심보다 우리가 함께 성취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가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여기서 ‘뿌리내리기’와 ‘옮기기’가 등장하게 된다. 각 주체들은 자신의 정체성 속에서 ‘뿌리내리기’를 한다. 동시에 자신을 다른 정체성을 지닌 자들과의 교류를 위해 ‘옮기기’를 시도한다. 이들은 서로에게 ‘횡단’하는 것이다.

 

②이러한 ‘횡단’에 의한  연합과 합주를 통해 정반합의 새로운 질서가 이루어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