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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푸코의 자기배려 ① ] 외부세계로부터 자기 내면으로 시선을 이동해야

「알키비아데스는  그리스에서 가장 큰 나라의 가장 잘 나가는 가문 출신에 훌륭한 친구과 친척, 재력과 지위등의 특권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수려한 용모까지 겸비해 “몸을 비롯해 혼에 이르기까지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을 만큼” 모든 것을 지닌 청년이었다.  외모가 출중하여 어릴 때 수 많은 연인들의 흠모를 받았지만, 오만한 성격과 태도로 모두에게 퇴짜를 놓는 사이 나이를 먹게 된다. 그렇게 모두가 떠나버리고 혼자 남게 되었을 때 소크라테스는 그에게 말을 건다. 그가 말을 건 이유는 만약 어떤 신이 “현재 지니고 있는 것들을 유지한 채 살 것인가, 아니면 그 이상을 얻고 싶지만 그럴 가망이 없으면 그 즉시 죽고 싶은가?”라고 알키비아데스에게 묻는다면 그가 “죽음을 택할 것 같아서”였다.」 (「알키비아데스」)

알키비아데스는 “몸을 비롯해 혼에 이르기까지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을 만큼” 모든 것을 지닌 그리스의 청년입니다. 그리스에서 가장 큰 나라의 가장 잘 나가는 가문 출신에 훌륭한 친구과 친척, 재력과 지위등의 특권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수려한 용모까지 겸비했던 겁니다. 

그런데 그는 도시국가를 통치하고자 하는 정치적 야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알키비아데스가 지도자로서 탁월함을 갖추고 있는지는 의문시 되었습니다.  그의 내면에는 그저 권력욕과 허세만 가득 했을 뿐, 통치자로서 경쟁해야 할 적들, 즉 스파르타나 페르시아인들보다 교육면에서 더 나을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소크라테스는 현재의 상태를 뛰어넘어 이상을 얻고자 하는 알키비아데스를 향해 파레시아(진실을 용기있게 표현하는 발언의 실천)를 수행합니다. 
  
즉 ‘먼저 자신을 돌보지 않은 채’ 무언가를 한다면 절대로 그들을 능가할 수 없을 것이라며, 더 나은 상태로 자신을 고양시키는 ‘자기배려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김세희) 

이처럼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에게 직언하며 방향성을 인도해 줄 타자인 파레시아스트로서 그의 삶에 관여합니다.  


◆ 자기배려 vs 자기에 속한 것들의 배려

소크라테스가 알키비아데스에 알린 진실은 ‘자기배려’였습니다.   

자신을 돌보고 자신을 배려하는 활동을 의미하는 자기배려의 그리스어 원어는 epimeleia heautou입니다. epimeleia는 ‘~에 관심을 쏟음’이란 의미이며, 배려· 돌봄· 탐구등의 의미로 확장됩니다.  

따라서 그리스어 epimeleia은 단순히 어떤 것에 관심을 갖는 차원을 넘어, 그 대상을 위해 노력과 에너지를 쏟는 행위를 말합니다. 

또한 heautou는 himself, herself, itself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결국 푸코의 정의에 의하면, epimeleia heautou는 자기 자신을 배려하고 돌보며 자기 자신에 몰두하는 행위를 뜻합니다. 

자기배려가 자기 돌봄, 자기 몰두라는 뜻을 가진다면, 자기몰두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우선 자신을 돌보는 것은  자기에게 속한 것들을 돌보는 것과 구별됩니다. 

후자는 돈벌이, 공명심, 국가에게 생겨나는 다른 관직이나 결사, 파당의 권력등, 이것들의 쟁취를 위해 자기를 몰두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소크라테스의 변명」)  

반면 전자는 자신에게 속한 어떤 것들을 돌보는 일을 앞세우지 않고, 영혼을 부단히 연마하여 덕 있는 사람이 되도록 자기에게 몰두하는 일을 말합니다. 
 
달리말해 자기배려는 시선의 이동을 외부세계로부터 자기자신으로 이동할 것을 요구합니다. 

시선의 전환은 외부에 대한 관심, 즉 외부에 대한 검토와 변화를 자기 자신에 대한 그것들로 대체하는 것을 뜻합니다. 

자신 속에 발생하는 새로운 사건과 기존의 가치와의 충돌 속에서, 이러한 모순의 깨달음에 주의를 기울이며, 그 모순을 변증법적으로 극복하여 새로운 변형을 창조하는 것이 자기에게 속한 것들에 대한 관심, 또는 이들에 대한 갈망의 표현인 외부에 대한 개혁의 의지보다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배려와 자기돌봄은 반성적 성찰을 통해 영혼의 탁월함을 갖춘 존재로  변화시키는데 있습니다. 

예컨대 군주나 수장이 자신의 시민들에게 책임을 지기 위해선, 우선적으로 자기 성찰을 통해 새롭게 변형된 존재로 자신의 덕을 끌어올려야 한다는 겁니다.   

결국,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자신의 내면의 변형에 우선적으로 충실한 이는, 자기자신(국가자체)을 돌보는 일보다 자신(국가)에 속하는 것들을 돌보는 일을 내세우지 말아야합니다. 


◆ 어떻게 자기를 배려할 수 있나? 자기배려를 돕는 파레시아스트

자기 배려, 자기돌봄이 자기에 속한 것들보다 선행되어야 한다면, 어떻게 자신을 돌보아야 할까요? 

자기돌봄, 자기몰두는 자기수련을 요구합니다. 이를 위해선 진실말하기(파레시아)를 수행하는 자, 곧 ‘파레시아스트’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푸코에 따르면 자기 스스로 뛰어나다고 믿고 자신의 의지로 자기 돌봄에 힘쓰는 이들은 종종 실수를 저지르기 쉽다고 지적합니다. 때문에 옳고 그름을 판별해주며, 나아갈 방향을 이끌어 줄 파레시아스트의 존재는 영혼의 반성과 변형을 위해 필수불가결합니다.  

파레시아스트는 사회의 경계나 밖에 위치하여, 권력, 대중, 여론과 대립하면서 위험을 무릅쓰고 진실을 말합니다. 

예컨대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발언한 것이 파레시아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또한 소크라테스가 알키비아데스에게 행한 자기 돌봄의 직언도 파레시아의 한 실례입니다.  우정을 잃을 것을 감수하면서 알키비아데스에게 진실을 말하고 자기돌봄의 중요성을 강조해서입니다.

결국 자기돌봄과 자기수련은 자신을 조절해 줄 누군가에 의해 완성되어 갑니다.  


◆ 홀로있음과 자기돌봄

그런데 파레시아스트의 질책과 권고만이  자기돌봄의 충분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자기수련의 고양은 자신을 돌보는 환경의 확보에 영향을 받습니다. 즉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의 확보, 홀로있음의 시간의 확보가 자기돌봄의 요소가 됩니다.
  
때문에 번잡함을 피해 내면을 묵상하는 자기성찰의 시간을 하루에 일부라도 떼어주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이러한 홀로 있음의 환경에서 이루어지는 자기성찰의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김민지외)

우선 내안의 나를 찾아 들어갑니다. 에너지를 묵상, 글쓰기등을 통해 내면으로 집중합니다. 이는 전적으로 나와 나 자신(혹은 절대자)과의 소통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외면했던 내 감정을 알아차리고 간과했던 자신과 내 삶을 돌아봅니다. 

이를 통해 나에게 주어진 나의 가치관과 소명을 발견해 나가는 겁니다.  

결국 성찰은 자기 정체성에 대한 질문, 곧 자신이 누구인지, 그러한 나는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등의 물음에 지속적으로 답하는 과정에서,  나를 위한  주체적 삶의 회복 또는  절대자와의 합일로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이후 성찰은 지속됩니다.  

이처럼 자기성찰의 시간을 허락하는  고독의 시간이  자기돌봄과 자기배려를 위한 필수요소로 작용합니다. 


◆포스트 모던적 자기배려 VS 기독교적 영성




자기배려와 돌봄의 과정은 파레시아스트의 직언에 귀를 기울이며 자기 돌봄의  시간을 확보함에 따라 더 나은 상태로 자신의 영혼을 변형해 가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푸코의 포스트 모던적 자기배려와 기독교적 영성은 영혼의 변형의 관점에서 유사점을 보입니다. 하지만 자아를 평가하는 관점에서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이 둘의 차이점은 성적 쾌락의 절제를 통제하는 방법에서 두드러집니다. 

푸코는 성적쾌락을 절제하는 길은 주체인 인간이 자아연마를 통해 성적욕구와 맞서 싸워 지배력을 획득하는 것으로 믿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인간의 주체성은 완성되고 고양됩니다. 

반면 기독교는 성적욕구와의 싸움에서의 성패는 자아포기에 달려있다고 지적합니다. 의지와 자기연마를 창과 방패로 하여 성적욕구와 맞선 싸움들에서 백전백패한 후, 마침내 자신의 한계를 인정한 인간이, 자아를 포기하고 절대자의 인도에 자신을 내맡기게 될 때, 절제는 노력 아닌 선물로 획득될 수 있다는 겁니다. 

달리 말해 포스트모던적 영성은 신적 본질이 내면에 존재하는 인간이 실천의 힘으로 욕망을 억제하여, 자유와 주체성을 획득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를 통해 인간은 규율과 순종에서 해방되는 자율적 존재, 창조적 주체로 거듭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반면 기독교적 영성은 인간의 신의 의지와의 합일(conformity to God’s will)이 싸움을 위한 갑옷과 창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이에 대해 푸코는 자아 포기를 통해 신과의 동행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창조성과 주체성을 상실하는 행위라고 비판합니다. 

결국 자유와 해방을 이끄는 자기배려의 길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푸코의 ‘주체로 형성해 가는 노고’와 기독교의 ‘절대자와의 인격적 만남’ 중, 어떠한  선택을 결정할 것인가의 여부는 위기의 상황에서 결국 판명될 것입니다.  


<참고문헌> 
김세희, “자기 배려로서의 자기 인식과 파레시아: 미셸푸코의 해석을 중심으로”
이정희, 양은아, “홀로있음에서 경험하는 자기성찰과 영성적 실천으로서의 자기배려”
김민지외, “비혼 중년여성의 홀로하기를 통한 자기성찰 경험에 관한 현상학적 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