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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Life & Movie] <버닝> 욕구에서 욕망으로의 전환.

-상선약수의 정신으로 조금씩 양보하면 평화를 얻을 수 있어

※ 이 글엔 <버닝>의 결말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칼라하리 사막의 부시맨들은 두 명의 굶주린 자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레이트 헝거 (Great Hunger)와 리틀 헝거 (Little Hunger). 리틀 헝거는 배를 채울 음식을 원하지만 모든 배고픈 자들의 으뜸인 그레이트 헝거는 의미에 굶주려 있다.


궁극적으로 인간을 깊고 극심한 고통에 빠뜨리는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그들에게 의미없는 인생을 맡기는 것이다.」


영화 <버닝>은 리틀 헝거에서 그레이트 헝거로의 전환을 이야기 합니다.


유통회사 알바생 종수(유아인), 종수의 어릴 적 친구인 나레이터 모델 해미(전종서), 그리고 해미가 아프리카 여행에서 만난 강남고급아파트에 거주하며 포르쉐를 모는 벤(스티븐 연). 이렇게 세 청춘은 각자의 방식으로 욕구와 욕망을 채우고자 합니다.



◆ 리틀 헝거 vs 그레이트 헝거, 욕구 vs 욕망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의 차이는 욕구와 욕망의 구분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욕구와 욕망의 공통점은 모두 결핍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욕구는 리틀 헝거에 해당되는 개념으로, 식욕 색욕 명예욕 물욕등 특정 대상에 대한 욕심을 말합니다.


특히 노자는 눈을 즐겁게 하는 욕구를 경계하였습니다. 도덕경에서 爲腹不爲目(배를 채우기 위한 행동은 하지만 눈을 즐겁게 하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이라며 일체의 외적인 감각세계를 상징하는 눈의 욕구를 탐욕이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욕구의 한계는  포만감에서 일단 느슨해지면 다시 갈증을 느낀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이전과 같은 욕구의 양이 채워져야 합니다. 


벤이 노자가 말한 눈과 감각의 욕망에 사로잡힌 인물입니다. 그는 ‘뼈 속 까지 울리는 베이스’를 찾습니다. 그는 주기적으로 눈에 거슬리는 비닐하우스를 태워 감각의 포만감을  유지합니다. 


반면 욕망은 그레이트 헝거에 해당됩니다. 욕망은 자기와 타자와의 운명적인 관계성을 말하는 것으로, 자신의 결핍을 타인과의 접목을 통해 채우고자 합니다.


이는 바람소리가 바람과 사물의 구멍이 마주쳐 발생하는 이치와 같다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존재가 원천적으로 비어있기 때문에 그 결핍을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채우고자 하는 욕망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러한  타자와의 연계성은 곧 이중부정의 無不爲(하지 않는 일이란 없다)와의 연좌를 가져옵니다.


해미는 그레이트 헝거를 꿈꾸는 자입니다. 해질 무렵 노을을 바라보며 옷을 벗은 채 그레이트 헝거의 춤을 추는 해미는 욕구에 굶주린 자에서 욕망에 굶주린 자로의 전환을 갈망합니다.



◆자의식


문제는 어떻게 리틀 헝거에서 그레이트 헝거로 거듭날 수 있는가라는 점입니다. 이에 대한 답은 타자와의 연계성을 막는 장애물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장자의 답은 망각입니다.  자의식에 대한 망각이 타자와의 관계성을 맺는 전제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때문에 자신의 자아가 강하다면, 자신이 타자와 마주쳐 발생하는 울림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고독한 산책자가 새소리와 바람소리를 듣기 위해선 그 고독으로부터 빠져나와야 한다는 지적은 자의식의 유지가 새로운 연계성을 가로막고 있다는 뜻입니다.


해미는 망각이 그레이트 헝거의 요구 조건임을 깨닫습니다. 그녀는 판토마임으로 ‘귤이 없음을 잊는 것’이라 말하며, 집착했던 의식을 잊고자 합니다.



◆죄책감


타자와의 마주침으로 발생하는 울림이 없는 또 다른 이유는 내면의 찌끼, 죄책감이 연계의 흐름을 막기 때문입니다.


죄책감은 작위나 부작위로 손상을 입은 자들에 대해 빚을 지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이러한 부담감은 자신에 대한 비판과 수치심과 연계되어 양심의 가책, 후회, 도리 등의 죄 짐을 가중시킵니다. 


이와 같은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희생이 반드시 요구됩니다. 자신의 죄로 인해 상처 입은 자에게 희생제물을 바침으로, ‘죄인’은  죄에서 해방됩니다. 마침내 죄의 요소는 소탕되어,  그간에 죄에 시달린 자는 깨끗한 근원으로 돌아갑니다. 


종수가 벤을 칼로 찌르고 벤을 태운 포르쉐를 불태운 행위는 사라진 해미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대한 배상이었습니다.  종수의 이러한 제물드림은 자신이 범한 죄의 짐을 내려놓는 신성한 의식이 됩니다.


종수는 죄에 찌든 옷을 함께 불태우고, 벌거벗은 근원의 몸으로 회복됩니다. 종수의 나신은  그레이트 헝거를 추는 해미의 나신을 연상하게 합니다.


종수의 이러한 祭儀는 심청전의 희생제물을 떠올리게 합니다. 심봉사 심현이 눈이 멀게 된 것은 전생의 죄 때문이라고 노승은 말합니다. 그 죄는 사실 딸 청이 세 살 무렵에 부인이 병으로 죽게 되는 것과 관련 있습니다. 심현은 부인의 病死가 자신이 책임을 다하지 못한 탓이라고 여깁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죄책감은 희생제물을 통해 씻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청이 제물로 인당수에 바쳐지자 심현의 죄책감은 사라지고, 심현은 눈을 뜨는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결국 욕구를 잊고 타자와의 연계성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선, 희생제물의 태움을 통한 죄의식의 씻김이 요구됩니다.



◆上善若水


그렇다면 근원으로 돌아간 자는 어떤 모습을 보일까요? 이는  노자의「도덕경」 제8장에 ‘상선약수(上善若水)’의 사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 선 중에서 으뜸된 선은 물과 같다. 물은 모든 것들을 이롭게 해주면서도 다투지 않고, 뭇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있으려 한다. 그러므로 거의 도에 가깝다. ”
(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노자의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라는 사상은 노자「도덕경」 67장에서 三寶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첫째는 불쌍히 여기고, 둘째는 졸라맴 즉 수수하게 함이고, 셋째는 남보다 앞장을 지르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다투지 않고 서로 조금씩 양보하면,  세상은 전쟁 없는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함석헌 선생의 표현처럼 ‘다 굳세기를 원하고, 다 크기를 원한다면’, 세상엔 폭력과 전쟁이 난무하게 됩니다.


결국 ‘상선약수’, ‘삼보’의 정신으로 상대를 대할 때, 결핍은 관계의 마주침으로 채워 질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