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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 침묵의 나선 ① ] 노래하지 않는 카나리아: 5배 징벌배상이 만든 '침묵의 나선'

-한국형 Anti-SLAPP의 허와 실
-침묵의 나선 이론으로 본 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의 위험성

부장 데스크 위에서 특종 보도가 폐기되는 데는 5초도 걸리지 않습니다. 합리적 의심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고의로 허위조작정보가 인정되면 손해액의 최대 5배에 달하는 징벌적 손해배상을 감당할 수 없다는 공포 때문입니다.

이는 더불어민주당이 추진 중인 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이라는 거대한 칼날 앞에서 언론사 편집국에 닥칠 가까운 미래입니다.

광부들이 데리고 들어가는 카나리아가 침묵하는 이유는 노래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공기가 독하기 때문입니다. 카나리아의 침묵은 기분이나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독소가 이미 임계점을 넘어섰다는 필사적인 경고입니다.

언론과 비판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본회의 통과를 앞둔 이 법안은 고의성이 입증되면 유튜버부터 대형 언론까지 최대 5배 배상을 부과해, 우리 사회의 공기 자체를 ‘비판하기 위험한 곳’으로 바꾸려 하고 있습니다.

엘리자베트 노엘레-노이만(E. Noelle-Neumann)의 ‘침묵의 나선’ 이론이 오늘날 서늘한 현실로 다가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 감지되는 침묵은 권력 감시 기능의 마비와 민주주의의 구조적 붕괴를 예고하는 위험한 신호입니다.


◆침묵의 나선 (Spiral of Silence)

① 개념: 여론의 사회심리학적 기제
엘리자베트 노엘레-노이만이 제시한 '침묵의 나선'은 여론이 단순한 의견의 총합이 아니라, "지금 말해도 안전한가"라는 사회적 압력에 의해 형성됨을 설명합니다.
인간은 고립에 대한 본능적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의견이 소수라고 판단되면 침묵하게 되고, 이 침묵은 다시 "그 의견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인식을 강화하여 더 깊은 침묵을 낳는 악순환으로 이어집니다.

② 작동 원리: 공포가 만드는 침묵
이 이론은 쉽게 말해 "말하면 손해 본다는 인식이 침묵을 낳고, 그 침묵이 다시 대세가 되는 현상"입니다. 누군가 먼저 입을 닫으면 주변은 “아, 그 얘긴 하면 안 되나 보다”라고 느끼고, 그러면 더 많은 사람이 말하지 않게 됩니다. 시간이 지나면 원래는 꽤 많은 사람이 갖고 있던 생각도 겉으로는 ‘없는 의견’처럼 보이게 됩니다.

③ 전개 과정 (Process)
정리하면, 침묵의 나선의 전개 과정은 이렇습니다.
⒜지배적 분위기 감지: "이런 말을 하면 공격받는 분위기다."
⒝고립·불이익의 공포: "나서서 말하면 표적이 될 수 있다."
⒞자기검열(Self-Censorship): 발언을 축소하거나 회피함.
⒟가시성 편향(Visibility Bias): 침묵하지 않는 쪽의 목소리만 과대 대표됨.
⒠침묵의 확산: 침묵이 학습되고 증폭되며 나선형으로 하강.


◆입법의 영향: 위축효과(Chilling Effect)의 제도화

징벌적 손해배상제(언론중재법 등)의 도입은 모호한 기준과 과도한 배상액을 통해 법적 리스크를 극대화함으로써, 침묵의 나선을 가속하는 기폭제로 작용합니다.

① 비용-편익 분석의 붕괴: 합리적 침묵의 선택

원래 언론과 개인은 의혹 제기에서 공익과 부담을 저울질합니다. 그러나 최대 5배 징벌배상 같은 거대한 추를 비용 쪽에 얹어버리면 계산은 뒤집힙니다.

즉, 이전에는 “의혹 제기 가치가 충분하다. 소송이 와도 감당 가능하다”라고 판단했다면, 이제는 “조금만 틀려도 집 한 채 값 배상을 해야 한다. 굳이 내 인생을 걸 필요가 있나”라고 자문하게 됩니다. 그 결과 합리적 행위자는 침묵을 택하는 것이 이득이 되는 구조에 놓이게 됩니다.

② 기대손실 구조: 의혹 제기의 '도박화’

문제는 “가짜뉴스를 잡겠다”는 명분이 아니라, 처벌 설계가 취재의 리스크 계산을 근본적으로 바꾼다는 점입니다. 탐사·의혹 제기는 처음부터 모든 증거가 완벽히 갖춰진 뒤에 시작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법이 “틀리면 파산급 손해”로 설계되면, 편집국의 비용계산식은 다음처럼 바뀝니다.

기대손실 = (틀릴 확률 p) × (패소 손실 L)
핵심은 p(확률)가 아니라 L(손실)입니다. p는 현실적으로 0이 될 수 없는데, L이 과도하게 커지면 기대손실은 감당 불가능한 수준으로 폭증합니다.

예컨대 틀릴 확률이 5%(p=0.05)이고 패소 손실이 20억 원(L=20억)이라면 기대손실은 1억 원(0.05 × 20억)입니다.

결국 조직은 “맞히면 공익”보다 “틀리면 치명상”을 먼저 보게 되고, 의혹 제기는 용기가 아니라 도박으로 재분류됩니다. 그러면 안전한 기사(발표 받아쓰기·확실한 팩트)만 남고, 공론장에는 “아무도 비판을 안 하네”라는 분위기가 형성되며, 그 분위기가 다시 침묵을 확산시킵니다.

③ '중과실 삭제'의 역설: 미필적 고의라는 우회로

징벌적 손해배상을 골자로 하는 초기 법안에서 요건으로 제시된 ‘중대한 과실’ 문구에 대해 “단순 실수까지 처벌할 수 있다”는 비판이 거셌습니다.

이에 더불어민주당은 해당 문구를 삭제하고 ‘고의’ 요건을 중심에 두는 방향으로 법안을 수정했습니다. 이는 표면적으로 ‘언론 재갈 물리기’라는 프레임을 피하고 “피해자 구제” 명분을 강화하는 타협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미필적 고의’라는 해석의 우회로가 열려 있다는 지적입니다. 한국 법체계에서 ‘고의’는 명시적·직접적 의도에 한정되지 않고, 결과 발생 가능성을 인식하면서도 이를 용인한 미필적 고의까지 포함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조문에서 ‘중과실’이 빠졌더라도, 소송 과정에서 원고가 취재 과정의 미흡함이나 반론권 보장 부족 등을 지적하며 “허위 가능성을 알면서도 눈감았다”는 논리를 제기하면, 이는 법정에서 ‘고의’로 포섭될 여지가 생깁니다. 

우회 메커니즘은 대체로 다음과 같습니다.

•기자(항변): “합리적 의심에 기반한 공익 보도였다.”
•원고(공격): “교차검증 미흡·반론 무시 등 레드플래그가 있었다. 허위 가능성을 알면서도 눈감은 것이다.”
•법원(판단): “정황상 허위 가능성을 인식하고도 보도했으므로 미필적 고의가 인정된다.” (징벌배상 적용)

결국 “실수는 용서한다”는 신호가 외형적으로 전달되더라도, 실제 법정에서는 ‘나쁜 실수’가 ‘고의’로 전환되면서 보도 위축과 소송 리스크가 줄어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확신이 100%가 아니면 입을 다물라”는 압박은 유지되고, 의혹 제기의 싹은 초기에 잘릴 위험이 남습니다.


◆ 침묵의 구조화: SLAPP과 Anti-SLAPP의 비대칭

위축효과로 침묵이 구조화된 환경에서 더 우려되는 지점은, 침묵이 일시적 선택에 그치지 않고 규범으로 굳어버린다는 점입니다. 개인이 “이번 한 번은 조심하자”로 입을 닫는 단계는 아직 회복이 가능하지만, 조직이 “그 주제는 원래 안 건드리는 게 상식”으로 학습하는 순간부터는 얘기가 달라집니다. 침묵은 ‘두려움의 반응’이 아니라 조직의 룰, 나아가 업계의 관행이 됩니다.

이러한 관행은 '공격은 쉽고(SLAPP), 방어는 어려운(Weak Anti-SLAPP)' 비대칭적 구조에서 완성됩니다. 

SLAPP(Strategic Lawsuit Against Public Participation, 전략적 봉쇄소송)은 소송 제기만으로도 상대를 소모시키는 ‘쉬운 위협’이 되고, Anti-SLAPP는 입증 부담과 절차 지연으로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면 방어는 ‘어려운 선택’이 됩니다. 이 비대칭이 누적될 때 침묵은 개인의 조심을 넘어 업계의 상식으로 규범화됩니다.

① 전략적 봉쇄 소송(SLAPP): 과정이 곧 형벌

침묵의 나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군가 먼저 총대를 메는 최초 발화입니다. 그런데 강한 배상 리스크는 바로 그 최초 발화자를 가장 가혹하게 타격합니다. 이때 소송은 사실관계를 가리기 위한 절차라기보다, 입을 막기 위한 경고장으로 기능하기 쉽습니다. 이것이 전략적 봉쇄 소송(SLAPP)의 전형입니다.

이처럼 SLAPP은 권력자·기업이 비판적 목소리를 억누르기 위해 제기하는 보복성 소송입니다. 목적은 승소가 아니라, 소송 과정의 고통(비용·시간·공포)으로 피고를 지치게 만들어 침묵시키는 것입니다. 소송장이 날아오는 순간 언론사는 비용과 인력을 투입해야 하고, “지면 끝장”이라는 공포 속에서 진실보도는 빠르게 위축됩니다.

② 한국형 Anti-SLAPP의 한계

더불어민주당이 SLAPP의 대안으로 제시한 '한국형 Anti-SLAPP'은 실효성 면에서 심각한 결함을 가집니다.

우선 입증 책임의 전가입니다. 소송이 '부당한 목적'임을 피고(비판자)가 입증해야 합니다. 공격받는 피해자가 방어 논리까지 만들어야 하는 불합리한 구조입니다.

또한 절차적 지연입니다. 미국 등 해외의 강력한 Anti-SLAPP 법제는 소송 제기 즉시 '증거개시(Discovery)' 절차를 자동 정지(Stay)시켜 피고의 비용 부담을 막습니다. 

반면, 한국형 모델은 이러한 자동 정지 장치가 부재하여, 각하 결정이 날 때까지 피고는 소송의 고통을 고스란히 감내해야 합니다.

결과적으로 실효성 없는 Anti-SLAPP은 부당한 소송을 걸러내지 못하고, 오히려 괴롭힘 소송에 "적법한 절차를 거쳤다"는 면죄부만 쥐여줄 위험이 있습니다.

③ 관제 정보의 독점과 나선의 완성

비판적 목소리가 경제적 공포와 소송의 위협으로 제거되면, 공론장에는 정부의 '공식 발표'만이 유일한 팩트로 남게 됩니다. 대중은 비판 부재를 "문제없음"으로 오인하게 되고, 소수의 비판 의견은 더 큰 고립감을 느끼며 침묵하고, 침묵은 다시 강화됩니다. 침묵의 나선이 구조화되는 이유입니다.

④ 봉쇄가 완성되는 과정

정리하면, 침묵의 나선이 구조화되는 과정은 다음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SLAPP(공격): 고액 징벌배상 소송 제기 — 목적은 ‘입틀막’
⒝내재화(타격): 비용·시간·파산 공포가 조직을 보수화
⒞실패(대응): Anti-SLAPP이 약해 조기 차단 실패 (피고 입증 부담)
⒟위장(정당화): 괴롭힘이 ‘정상 절차’로 포장
⒠결과(규범화): “법도 못 지켜준다” 학습 → 산업 전체 침묵


◆ 침묵의 규범화가 초래할 위험

더불어민주당 법안은 가짜뉴스를 막겠다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수단은 실패 시 파산에 이를 수 있는 극약처방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제도 아래에서 용기 있는 의혹 제기는 무모한 도박으로 바뀌고, 도박을 즐기지 않는 사람은 결국 안전한 침묵을 선택하게 됩니다.

이 법안의 심각한 문제점은 '틀릴 권리'를 박탈한다는 점입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국민의 알 권리는 완벽하게 검증된 무결점의 사실만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 의심을 통해 진실에 접근해가는 과정 그 자체에서 보장됩니다.

그런데 틀릴 권리를 박탈하면, 진실을 말할 용기도 함께 사라집니다. 이것이 이 입법이 불러올 침묵의 나선—그리고 침묵의 규범화가 초래할 위험입니다.


■ 미국 vs. 한국 법제와 언론 자유

미국의 '현실적 악의(Actual Malice)' 원칙과 한국의 '미필적 고의' 적용은 입증 책임과 보호 범위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보입니다.

첫째, 핵심 개념의 차이입니다.

미국은 보도 당시 기자가 허위임을 '확실히' 인지했는지를 따지며, 단순한 실수나 확인 소홀은 처벌하지 않습니다. 반면, 한국은 허위일 '가능성'을 알면서도 감수했는지를 따지기 때문에, 취재 과정의 미흡함이 곧 허위를 용인한 '미필적 고의'로 해석될 위험이 큽니다.

둘째, 입증 책임(Burden of Proof)의 소재가 다릅니다.

미국에서는 원고(공격자)가 기자의 명백한 악의를 증거로 입증해야 합니다. 이 장벽이 매우 높기에 권력자가 함부로 소송을 걸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기자(방어자)가 스스로 '진실이라고 믿을 만한 상당한 이유'를 증명해야 면책되는 구조여서, 피고에게 과도한 입증 부담이 지워집니다.

셋째, 법적 효과와 결론적 차이입니다.

미국은 "악의가 입증되지 않으면, 틀려도 보호한다"는 원칙 하에 언론의 숨 쉴 공간을 보장하여 소송 남발을 억제합니다. 이와 달리 한국의 구조는 "진실임이 증명되지 않으면, 틀린 대가를 치른다"는 압박을 주어, 결국 "걸리면 입증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안전한 침묵(자기검열)을 유도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