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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이해

[데이비드 린치와 카프카] 현실과 환상의 모호성, 관계의 단절로 이어져-관계의 회복을 위해 국가에 힘을 실어주어야

-카프카의 <변신>, 현실과 환상의 세계는 관계 이데올로기를 폭로
-린치,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사랑과 소외의 혼돈을 묘사
-관계의 단절은 다시 관계를 소환

‘현실은 꿈이 두려워서 깨어나는 곳’이라고 프로이트는 주장합니다. [1]  


슬라베니아 출신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이를 “우리는 꿈으로부터 도피하여 다시 현실로 돌아간다.”로 해석합니다. 교착상태에 빠진 현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꿈 속으로 도피하지만, 환상의 끔찍함에 다시 현실로 돌아간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지젝은 “꿈은 현실을 충분히 견딜 만큼 강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현실은 그들이 마주치는 꿈을 충분히 다시 견딜 만큼 강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 된다.”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프로이트의 언명의 충실한 수행자는 데이비드 린치 감독입니다. 린치는 그의 영화 속에서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며 현대인들의 혼돈과 불안을 기발한 상상력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카프카의 <변신>, 현실과 환상의 세계는 관계 이데올로기를 폭로





‘영화계의 카프카’라는 수식어를 얻고 있는 린치의 철학은 카프카의 <변신>을 통해 잘 드러나 있습니다. [2]


“어느 날 아침의 일이었다. 뒤숭숭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레고르 잠자’는 잠자리 안에서 한 마리의 큼직한 독벌레로 변한 자신을 깨달았다.”


변신의 시작은  그레고르 잠자라는 인간이 벌레로 변신하는 충격으로 시작합니다. 주인공 그레고르의 모습은 벌레이나, 사고와 행동은 인간인 혼종의 존재입니다.


<변신>에서의 현실과 환상의 세계는 관계 이데올로기를 폭로하고 있습니다.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신하자 가족들도 그를 향해 변신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여동생은 자신의 생존에 떠밀려 그레고르에게 신경쓰지 못하고, 심지어 그를 괴물로 간주합니다.  생존에 얽매인 고단한 삶은 그를 가족의 일원에서 낯선 타자로 추방시킨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레고리의 사망은 고통스러운 가족의 슬픔이 아니라 해방을 가져오고,  가족은 새로운 계획과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이처럼  인간의 이성과 욕망은 뒤범벅되어 나타납니다.  무엇이 현실이며 환상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이성과 욕망이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것입니다.  



◆데이비드 린치, 현실과 환상의 모호성


린치의 영화도 현실과 환상의 모호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인물들의 이성적인 모습과 이면의 욕망이 경계선을 넘나들며, 이성이 현실인지 욕망이 환상인지 혼돈스럽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욕망과 이성은 종이의 앞면과 뒷면처럼 인접해 있음을 린치는 스케치하고 있는 것이지요.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신체의 변신을 보이면서 뒤틀린 욕망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주인공인 리타와 베티간의 (동성간의)사랑의 감정은 이들이 각각 카밀라와 다이안으로 변신하면서 냉랭해집니다. 카밀라는 다른 남자와의 결혼발표로 다이안을 배신하며, 다이안의 눈에서 피눈물이 흐르게 합니다.


이렇게 다이안은 카밀라에게 낯선 타자로 전락합니다. 다이안은  분노에 대한 탈출의 욕망으로  카밀라의 청부살인을 도모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연인간의) 관계는  욕망의 원인과 대상을 찾는 단순 결합에 불과한 것이며,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사랑과 소외의 혼돈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린치는   카프카의 <변신>에 대한 존중처럼 디스토피아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관계의 단절은 다시 관계를 소환


관계는 현실과 환상 속을 오가는 감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전망부재를 린치의 영화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암울함과 허무주의의 극복 대안으로 니체는 자신이 삶의 창조자라는 위버멘쉬로의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3] 위버멘쉬는 자신의 힘에의 의지에 의해 자기극복을 시도하는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위버벤쉬의 길은 낙타의 정신을 극복하여 사자의 정신을 거쳐 어린이의 정신으로 고양될 수 있는 길입니다.


문제는 모든 인간이 위버멘쉬로의 길을 걸을 순 없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삶이 지시하는 짐을 잔뜩 싣고 사막을 횡단하는 낙타의 삶을 사는 것이 더 일반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에 대한 믿음과 이것의 파괴로 인한 관계의 부재는  다시 관계를 소환하는 역설을 가져옵니다. 현실과 환상의 혼종에 대한 대안이 파괴와 향락이 아닌 이상, 단절과 소외는 다시 관계의 회복으로 귀결됩니다. 그리고 이는 관계의 정점인 공동체의 회복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열린 공동체로서의 국가


더 나아가 이와 같은 관계는 욕망에 근거한 지역적인 공동체에서 열린 공동체로의 확장으로 맺어질 수 있습니다.  지역적인 공동체는 관계의 이데올로기에 매몰되어 현실과 꿈을 오가는 폐쇄성을 드러내는 반면, 열린 공동체는 구성원의 책임이 욕망을 압도하여 관계의 단절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보편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관계 이데올로기에 의해 마치 ‘벌레’ 같은 인간으로 취급 된 이들에게  다시 구원의 끈을 던지는 일은 열린 공동체의 책임이며 소명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구원의 로프를 던지는 이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서 부유하는 개인이라기보다  이성과 보편을 판단의 척도로 삼는 국가일 수 있습니다. 더 이상 모호성에 걸터앉아 있는 가족등 지역적 공동체에게 구성원의 절망으로부터의 탈출을 맡길 수 없다는 것이지요.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관계의 회복을 위한 한 해의 정리는 열린 공동체로서의 국가에게 어떠한 힘을 부여해줄 수 있는가에 집중되어야 할 것입니다. 



<참고문헌>
[1] 김시무 (2015), “데이비드 린치 감독 연구”, 아시아영화연구
[2] 박성희 (2002), “카프카적 변신, 데이비드 린치”, 영상예술연구
[3] 이서규 (2014), “카프카의 변신에 나타난 실존개념 연구”, 범한 철학회 논문집


      

 

 




[ 체화와 편향 ] 기술진보의 사분면 : 편향성과 체화성의 이론적 분류와 생산함수 분석 기술 진보는 자본과 노동의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주요 요인입니다. 이러한 기술 진보는 두 가지 축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중립성과 편향성의 축(힉스중립 vs. 편향적 기술진보), 다른 하나는 체화성과 비체화성의 축(체화 vs. 비체화 기술진보)입니다. 그런데 수식의 형태만 보면, 힉스중립 기술진보와 비체화 기술진보는 모두 다음과 같이 동일하게 표현됩니다:   Yₜ = A(t) · F(Kₜ, Lₜ) 이 수식은 기술 수준 A(t)가 생산함수 전체에 외생적으로 곱해진 형태입니다. 하지만 이 수식이 동일하다고 해서, 힉스중립 기술진보와 비체화 기술진보를 동일한 개념으로 간주할 수는 없습니다. A(t)가 생산함수 밖에 위치한다고 해서 곧바로 힉스중립이거나 비체화 기술진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먼저 중립성과 편향성의 관점에서 보면, 기술 진보는 자본과 노동의 생산성을 동일한 비율로 향상시킬 수도 있고, 특정 요소(예: 자본 또는 노동)에 편향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업무 프로세스의 전반적 개선은 자본과 노동 모두의 생산성을 높이는 힉스중립적 기술진보입니다. 반면, AI 도입으로 노동의 생산성만 비약적으로 향상되었다면, 이는 노동 편향적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