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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 & Mind

[ Music & Mind ] 오페라 《투란도트》리뷰 : 힘으로 밀어붙이지 않은 목소리, 더 멀리 갔다

-서선영의 《투란도트》, 작은 체구가 증명한 큰 투사력

2026년 예술의전당 오페라 《투란도트》는  힘보다 유연함이 돋보이는 무대로 다가왔습니다.  이번 공연에서 투란도트 역으로 데뷔한 소프라노 서선영은 누적된 발성의 기술적 훈련과 류 역을 통해 축적해 온 성악적 감각을 바탕으로, 오케스트라를 가르는 압도적인 음압과 인물의 복합적인 내면을 함께 그려내며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류에서 투란도트로


서선영의 이번 투란도트 데뷔가 각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그녀가 과거 희생의 아이콘인 류(Liù) 역을 여러 차례 소화해 왔기 때문입니다. 오페라 《투란도트》에서 류와 투란도트는 억압적 체제 안에서 정반대편에 서 있는 인물입니다. 류는 칼라프를 향한 헌신을 끝내 자결로 완성하며, 끝까지 타인을 지키겠다는 윤리적 일관성을 증명합니다. 서선영이 류를 맡아 이 비극적 희생을 서정적이면서도 극적으로 그려낸 경험은 이후 투란도트 해석에도 깊이를 더했습니다.

희생자의 고통을 오래 체화한 성악가가 이제 억압자의 자리에 선다는 점은 단순한 배역 전환을 넘어서는 의미를 지닙니다. 투란도트가 전반부에는 냉혹한 폭군처럼 서 있다가 후반부에는 사랑과 수용의 언어를 받아들이는 인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서선영이 과거 류를 연기하며 익힌 감각은 분명 중요한 바탕이 되었습니다. 

희생자와 억압자라는 양극단의 위치를 모두 통과해 본 경험은 투란도트의 차가운 권위와 그 이면의 균열을 더욱 입체적으로 드러내는 힘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작은 체구, 큰 투사력

▲ 〈In questa reggia〉


2막 중반, 마침내 서선영이 투란도트로 무대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의외’였습니다. 지금까지 보아 온 서양의 투란도트 가수들은 대개 큰 체격과 압도적인 음량으로 무대를 장악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날 등장한 투란도트는 상대적으로 작은 체구였고, 외형만 보면 강력한 '드라마틱 소프라노'라기보다 오히려 '리릭 소프라노'에 가까운 인상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노래가 시작되자 그런 선입견은 곧 사라졌습니다. 오케스트라가 tutti(총주, 모든 악기가 함께 연주하는 상태)로 밀어붙이는 두꺼운 음향 속에서도 목소리는 전혀 묻히지 않았습니다. 힘으로 소리를 억지로 키우는 느낌이 아니었는데도 음성은 오케스트라의 벽을 뚫고 기자가 앉아 있던 2층 객석까지 또렷하게 날아왔습니다. 작은 체구에서 어떻게 이처럼 강한 투사력과 집중된 음향이 나오는지, 그 점이 이날 가장 궁금한 부분이었습니다.


그 비결은 단순한 성량의 크기에 있지 않았습니다. 성대에서 나온 소리는 배음을 포함하는데, 이 소리가 목과 입 안의 공간을 지나면서 비로소 더 커지고 또렷해집니다. 이렇게 증폭된 주파수 대역을 formant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때 오케스트라의 음향에너지가 약한 지점이 있는데, 이 에너지 대역(3000Hz 부근)이 singer's formant라고 부릅니다.  성악가는 이 부분을 강화하면, 오케스트라 소리를 뚫고 객석 끝까지 목소리가 도달할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흔히 말하는 "성량이 크다" "잘 뻗는다"는 인상은 이 싱어즈 포먼트가 잘 형성되어 있는지에 달린 경우가 많습니다.  즉, 무작정 소리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이 포먼트를  찾아 소리를 실어 보내는 것입니다.


이날의 투란도트가 바로 그런 소리였습니다. 소리는 넓게 퍼지지 않고 중심이 단단했으며, 높은 음에서도 음정과 음색의 윤곽이 흐려지지 않았습니다. 손전등처럼 넓게 퍼지는 빛이 아니라 윤곽이 선명한 빛에 가까웠고, 관현악의 두꺼운 음향 속에서도 고음의 밝기가 유지됐습니다. 그래서 실제 음량 이상으로 가깝고 또렷하게 느껴졌습니다.


이러한 인상은 서선영이 그동안 불러온 배역의 성격에 빚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공식 이력에는 《루살카》, 《카티아 카바노바》, 《가면무도회》, 《오텔로》, 《로엔그린》처럼 서정적인 선율과 극적인 추진력을 함께 요구하는 작품들이 포함돼 있습니다. 따라서 그를 단순히 리릭 소프라노라고 규정하기보다, 서정적인 음의 선명도를 유지하면서 극적 배역으로 영역을 넓혀온 성악가라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혹자는 이를 리릭 스핀토 소프라노로 명명하기도 합니다. 


성악에서 체격은 여러 신체 조건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큰 체격이 반드시 더 큰 목소리나 더 강한 투사력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실제 무대에서 중요한 것은 호흡의 압력과 흐름을 얼마나 안정적으로 조절하는지, 성대 진동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유지하는지, 그리고 음높이에 맞춰 성도의 공명을 어떻게 조율하는지입니다. 


이날의 투란도트는 바로 그 차이를 보여주었습니다. 서선영은 누적된 유연성 훈련의 기반위에서, 물리적인 볼륨을 계속 키우기보다 흔들리지 않는 음의 중심과 선명한 고음을 통해 무대를 장악했습니다. 



◆폭력의 언어에서 수용으로

2막에서 서선영의 투란도트는 철저히 마키아벨리적 권력관을 청각적으로 구현한 인물처럼 들렸습니다. 

권력을 쟁취하고 유지하기 위해 공포를 앞세우는 논리는 구혼자들에게 세 개의 수수께끼를 내고, 오답자의 목을 가차 없이 베어버리는 방식으로 드러납니다. 

이 세계에서 정치란 타협의 장이 아니라, 권력자의 자의적인 기준에 복종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극단적인 제로섬 게임에 가깝습니다.

전반부의 발성 역시 타인과 대화하기 위한 언어가 아니었습니다. 오케스트라 위로 솟아오르는 찌르는 듯한 고음은 이견을 허용하지 않는 군주의 명령이자, 상대를 굴복시키기 위한 폭력의 도구였습니다. 음성의 단단한 외피는 상처받지 않으려는 방어기제인 동시에 타자와의 소통을 차단하는 철옹성이었습니다.


◆후반부의 변화

그러나 이번 무대에서 서선영의 투란도트는 억압의 한계를 깨닫고 끝내 수용과 온기의 언어를 받아들이는 입체적인 인물임을 증명했습니다. 

투란도트는 극이 끝날 때까지 폭력만을 고집하는 평면적인 폭군이 아닙니다. 칼라프와 류의 비극을 통과하며, 상대를 억누르는 방식만으로는 더 이상 질서를 유지할 수 없음을 자각하고 스스로 변화를 선택합니다.

이러한 변화는 서선영의 음색을 통해 무대 위에 구체적으로 투영되었습니다. 전반부의 투란도트가 날카롭고 금속성 짙은 발성으로 타자를 철저히 밀어냈다면, 후반부에서는 그 단단한 긴장을 조금씩 풀어내며 숨겨둔 인간적 온기를 드러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리릭 소프라노에 뿌리를 둔 서선영의 진가가 발휘됩니다. 끝까지 무겁고 강한 소리로만 밀어붙이는 전통적인 드라마틱 소프라노의 문법 대신, 본연의 서정성을 끌어올려 차가운 강철이 부드럽게 녹아내리는 과정을 자연스럽게 묘사해냈습니다.


◆힘보다 유연함

서선영의 투란도트는 폭력의 언어를 버리고 부드러운 수용을 선택하는 변화를, 시각적 연기뿐 아니라 청각적 질감의 변화로 설득해낸 무대로 각인됩니다. 

이러한 성과는 그녀가 류를 통해 희생의 감정을 체화해 온 경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 결과 억압자와 수용자의 이중성은 한층 더 복합적이고 입체적으로 드러났습니다. 

다시 말해, 이러한 희생의 감정이 선행되지 않았다면, 그녀가 억압자의 얼어붙은 껍질 속에 숨겨진 상처와 온기를 이토록 자연스럽게 끌어내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특히 리릭 소프라노로 알려져 있던 서선영이 드라마틱 소프라노 역할인 투란도트로 배역을 확장한 것은 성악적 통념의 전환을 보여줍니다. 물리적인 덩치나 성량의 팽창만이 오케스트라를 뚫을 수 있다는 낡은 선입견이 보기 좋게 깨진 것입니다. 

거대한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맹목적인 성량보다 정교하게 타점을 맞춘 발성의기술이, 경직된 힘보다 극의 흐름에 따라 억압과 수용을 오가는 목소리의 유연성이, 극을장악하는 데 훨씬 더 결정적일 수 있음을  이 번 공연은 입증해 냈습니다.  

결국 예술이든 삶이든, 정치영역이든, 어떤 분야이든, 힘을 드러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중심을 잃지 않으면서도 흐름에 맞게 조율하는 능력입니다. 그것이 2026년 예술의전당 《투란도트》 공연이 보여준 성과의 하나입니다.

 




기사 요약과 Quiz: '하지 않을 자유'가 없어질 때, 숨이 막힌다 [ 디리지즘과 반도체 클러스터 ] [ 기사 요약 ] 기사 제목 호남 반도체 논쟁의 본질은 ‘하지 않을 자유’입니다 기사 주제 이 글은 정부의 용인·호남 반도체 동시 추진 구상이 단순한 지역 투자 논쟁이 아니라, 기업이 시장 상황을 보고 투자 여부와 시점을 조정할 수 있는 실물옵션, 특히 ‘투자하지 않을 자유’를 제약할 수 있다는 문제를 다룹니다. 핵심 내용 요약 정부의 용인·호남 반도체 동시 추진 구상은 겉으로는 국가 산업전략의 속도전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글은 이 논쟁의 본질이 속도가 아니라 기업의 선택권, 즉 시장이 나쁠 때 투자하지 않을 자유에 있다고 봅니다. 반도체 투자는 전력, 용수, 인허가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하이퍼스케일러의 AI 투자 사이클, 메모리 가격, 고객 주문, 공장 가동률이 맞물려야 수익성이 생깁니다. 이러한 변수들은 정부가 책임지겠다고 해서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글은 이를 실물옵션 이론으로 설명합니다. 실물옵션은 기업이 미래 시장 상황을 보고 투자할지, 미룰지, 포기할지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입니다. 특히 반도체처럼 투자 규모가 크고 변동성이 높은 산업에서는 타이밍 옵션, 즉 나중에 보고 결정할 권리가 중요합니다. 용인을 먼저 추진하고 호남 투자를 나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