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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일반

삼성전자 성과급 합의의 협상이론 [ BATNA와 버티기 비용 ]

-협상력은 어디에서 나오나

협상에서 유리한 결과를 얻는다는 것은 요구 수위를 높이는 문제가 아닙니다. 핵심은 상대방이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을 줄이고, 자신의 요구를 거절했을 때 상대방이 부담해야 할 비용을 높이는 구조를 만드는 데 있습니다. 협상이론은 이를 BATNA, 버티기 비용, 신뢰 가능한 위협, 정보 우위, 제도적 협상력 등의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이번 삼성전자 협상 역시 이 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노조가 성과를 얻은 것은 단순히 강경하게 요구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개정 노조법 이후 달라진 협상 구조의 약점을 정확히 파고들었기 때문입니다. 사측은 당장의 파업 손실과 미래의 반복적 쟁의 리스크 사이에 놓였고, 노조는 바로 그 구조를 협상 지렛대로 활용했습니다.


협상력 어디에서 나오는가


협상력은 분노나 요구의 강도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협상이 결렬됐을 때 누가 더 유리한 대안을 갖고 있는가에서 나옵니다.

이를 설명하는 대표 개념이 BATNA입니다. BATNA는 Best Alternative to a Negotiated Agreement, 즉 협상이 결렬됐을 때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대안을 뜻합니다.

예를 들어 집을 파는 사람이 이미 다른 매수자를 확보해 두었다면 현재 협상 상대에게 크게 끌려갈 이유가 없습니다. 반대로 다른 매수자가 전혀 없다면 가격 인하 요구를 거절하기 어렵습니다. 협상력은 말의 강도가 아니라 협상 결렬 이후 손에 쥔 선택지에서 나옵니다.

노사 협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측의 BATNA는 노조 요구를 거부하고 파업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노조의 BATNA는 협상을 결렬시키고 파업에 들어가거나 파업 압박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양측 모두 파업을 중심에 둔 대안을 갖고 있지만, 핵심은 그 파업의 비용을 누가 더 크게 감당하느냐입니다.


삼성전자 협상에서 사측의 BATNA는 약했습니다

이번 협상에서 사측의 BATNA는 형식적으로는 존재했습니다. 노조 요구를 거부하고 총파업을 감수하는 선택이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 선택의 비용이 너무 컸다는 점입니다. 반도체 공장이 멈추면 단순한 생산 차질에 그치지 않습니다. 글로벌 고객사와의 신뢰가 흔들리고, 공급망 안정성에 의문이 생기며, 주가와 대외 이미지에도 충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특히 AI 반도체 수요가 폭증하는 국면에서 생산 차질은 단기 손실을 넘어 장기적인 경쟁력 훼손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측의 BATNA는 존재했지만 실제 협상력으로 활용하기에는 지나치게 비싼 선택지였습니다. “파업을 감수하고 버틴다”는 선택은 이론적으로 가능했지만, 현실적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카드였습니다.

반면 노조의 BATNA 역시 파업이었습니다. 물론 노조도 파업이 길어지면 무노동 무임금, 조합원 피로도 증가, 여론 악화라는 부담을 안게 됩니다. 그러나 개정 노조법 이후 손해배상 압박이 약화되고, 단체협약 위반이 다시 쟁의의 명분으로 연결될 수 있는 제도적 환경이 만들어지면서 노조의 파업 카드는 과거보다 강해졌습니다.

결국 이번 협상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양측 BATNA의 힘의 균형이 달라졌다는 데 있습니다. 사측의 BATNA는 비용 폭증으로 약해졌고, 노조의 BATNA는 제도적 보호와 결합하면서 상대적으로 강해졌습니다.


버티기 비용이 협상 결과를 바꿨습니다

협상력은 또한 시간 싸움과 관련됩니다. 어느 쪽이 더 오래 버틸 수 있는지가 협상력의 크기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협상이론에서는 이를 버티기 비용, 즉 Delay Cost 또는 Cost of Disagreement라고 부릅니다. 협상 결렬 상태가 길어질수록 발생하는 손실이 큰 쪽, 즉 버티기 비용이 큰 쪽이 먼저 양보할 가능성이 커집니다.

그런데 개정 노조법은 사측의 버티기 비용을 크게 높였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파업으로 연결될 수 있는 통로가 넓어졌습니다. 과거에는 단체협약의 해석이나 이행 문제를 주로 소송, 즉 권리분쟁으로 해결했습니다. 사측은 법정 다툼을 하며 시간을 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개정 이후에는 명백한 단체협약 위반이 노동쟁의의 명분으로 연결될 수 있는 통로가 넓어졌습니다.

둘째, 손해배상 카드의 억지력이 약화됐습니다. 과거에는 불법 파업에 대해 거액의 손해배상 청구가 가능했고, 이는 노조와 조합원에게 강력한 압박으로 작용했습니다. 파업 참여를 주저하게 만들고, 장기 파업의 내부 균열을 유도하는 제동 장치였습니다. 그러나 개정법은 조합원 개인의 책임을 가담 정도와 손해 기여도에 따라 개별적으로 따지도록 했습니다. 그 결과 사측이 손해배상 카드로 파업을 조기에 압박하는 힘은 약해졌습니다.

이 두 변화가 결합되면서 사측의 버티기 비용은 급증했습니다. 파업 가능성은 커졌고, 파업을 조기에 꺾을 방어 수단은 약해졌습니다.

결국 사측은 끝까지 버티기보다 어떤 형태로든 타협점을 찾는 쪽으로 내몰렸습니다.


신뢰 가능한 위협이 노조의 협상력을 키웠습니다

협상력이 강해지는 또 하나의 요건은 위협의 신뢰 가능성입니다.

협상에서 위협은 말만으로 힘을 갖지 않습니다. 실제로 실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신뢰 가능한 위협, credible threat라고 합니다.

노조가 “파업하겠다”고 말할 때 사측이 이를 단순한 구호로 보면 노조의 협상력은 약합니다. 그러나 사측이 “정말 파업할 수 있고, 그 파업이 법적으로도 일정한 정당성을 가질 수 있다”고 판단하면 노조의 협상력은 커집니다.

개정 노조법은 이 지점을 바꿨습니다. 과거에는 단체협약 체결 이후의 이행 분쟁이 주로 권리분쟁으로 분류됐고, 노조는 법원 소송으로 다투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그러나 개정 이후에는 명백한 단체협약 위반이 다시 노동쟁의의 명분으로 연결될 수 있어, 노조의 파업 위협은 신뢰 가능한 위협이 되었습니다.

물론 이것이 모든 단체협약 위반을 곧바로 합법 파업으로 만든다는 뜻은 아닙니다. 파업의 정당성은 여전히 목적, 절차, 수단의 상당성에 따라 판단됩니다. 그러나 협상에서 중요한 것은 법원의 최종 판단만이 아닙니다. 상대방이 느끼는 법적 불확실성과 비용 부담도 협상력을 만듭니다.

사측 입장에서는 성과급 기준이 문서화된 뒤 이를 지키지 못할 경우, 단순한 소송 리스크를 넘어 다시 쟁의 압박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부담을 실질적으로 안게 된 것입니다. 이 신뢰 가능한 위협으로 인해 사측의 방어력은 약해지고 노조의 협상력은 강화되었습니다.


사측은 두 개의 고비용 선택지 사이에 갇혔습니다

이처럼 사측의 BATNA는 약했고, 버티기 비용은 높아졌으며, 노조의 파업 위협은 더 신뢰 가능한 카드가 됐습니다. 이 조건이 결합하면서 사측은 치명적인 딜레마에 놓였습니다.

사측의 첫 번째 선택지는 노조 요구를 끝까지 거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경우 사측은 당장의 총파업 리스크를 감수해야 했습니다. 반도체 공장이 멈추면 생산 차질, 고객사 신뢰 훼손, 공급망 불안, 주가 충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 선택은 법적으로는 가능했지만 경제적으로는 매우 부담스러웠습니다.

두 번째 선택지는 노조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위험했습니다. 영업이익 연동형 성과급이 장기 제도로 문서화되면, 이후 매년 성과급 지급 시점마다 분쟁이 반복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불황기나 대규모 투자 시기에 사측이 지급률을 낮추거나 유예하려 할 경우, 노조는 이를 단체협약 위반으로 제기하며 다시 쟁의 압박에 나설 수 있습니다.

즉 사측은 당장의 파업 손실과 미래의 반복 쟁의 리스크 사이에 갇혔습니다. 거부하면 지금의 비용이 너무 컸고, 그대로 수용하면 앞으로의 비용이 너무 컸습니다.

어느 쪽도 쉽게 선택하기 어려운 외통수 구조였습니다.

노조는 사측의 외통수를 알고 있었습니다

게임이론에서 협상은 상대방의 선택지를 읽는 싸움입니다. 상대방이 무엇을 감당할 수 있고, 무엇을 감당할 수 없는지를 아는 쪽이 유리합니다.

이번 협상에서 노조는 사측이 두 가지 어려운 선택지 사이에 놓여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노조 요구를 거부하면 사측은 당장의 총파업 비용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반대로 노조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장기적으로 반복적인 쟁의 리스크를 떠안아야 했습니다.

사측이 어느 쪽도 쉽게 선택할 수 없다는 사실은 노조에게 강한 협상 지렛대가 됐습니다.

그래서 노조는 기존 방식처럼 OPI 일부 조정이나 일회성 특별보상 수준으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 즉 EVA 바깥의 영업성과 연동형 특별성과급 구조를 계속 요구할 수 있었습니다.

노조는 단순히 더 많은 돈을 요구한 것이 아닙니다. 사측이 선택지 결정의 외통수에 걸려 자신들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이 점이 노조의 협상력을 키웠습니다.

제3안은 필연적 타협이었습니다

이 숨 막히는 대치 속에서 제3의 타협안은 자연스럽게 등장했습니다. 사측은 노조 요구를 전면 거부할 수도 없고, 그대로 수용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택한 해법은 구조는 일부 수용하되 조건을 붙이는 방식이었습니다.

노조가 원한 것은 기존 EVA 기반 OPI 바깥에 영업성과 연동형 성과급 통로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최종 합의는 이 방향을 일부 받아들였습니다. DS부문 특별경영성과급이라는 별도 통로가 만들어졌고, 사업성과의 일정 비율을 재원으로 삼는 구조가 도입됐습니다.

사측은 노조의 요구 원안을 일부 완화하여 비율을 낮췄고, 높은 영업이익 조건을 붙였습니다. 지급 방식도 현금이 아니라 자사주로 설계했습니다.

결국 노조는 원래 목적대로 제도화라는 구조를 얻었고, 사측은 그 제도의 발동 조건을 일부 통제했습니다.


협상에서 이기는 쪽은 상대의 선택지를 좁히는 쪽입니다

이번 삼성전자 성과급 합의는 협상에서 승리하기 위한 조건을 잘 보여줍니다.

협상이 결렬됐을 때 더 나은 대안, 즉 BATNA를 가진 쪽이 유리합니다.

상대방의 버티기 비용을 높이는 쪽이 유리합니다.

자신의 위협이 실제로 실행 가능하다고 믿게 만드는 쪽이 유리합니다.

상대방이 무엇을 감당하지 못하는지 파악하는 쪽이 유리합니다.
법과 제도라는 외부 환경을 협상 지렛대로 활용하는 쪽이 유리합니다.

이번 협상에서 노조는 이 조건들을 상당 부분 활용했습니다. 개정 노조법은 사측의 버티기 비용을 높였고, 노조의 파업 위협을 더 신뢰 가능한 카드로 만들었습니다. 노조는 사측이 당장의 파업 손실과 미래의 반복 쟁의 리스크 사이에 끼어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기존 OPI 조정이나 일회성 특별보상 수준에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노조는 자신이 원한 방향, 즉 EVA 바깥의 영업성과 연동형 특별성과급 구조를 얻었습니다. 사측은 그 구조를 완전히 막지 못했고, 대신 발동 조건과 자사주 지급 방식을 붙여 위험을 제한했습니다.

따라서 이번 합의는 단순한 노사 절충이 아닙니다. 개정 노조법이 만든 제도적 협상력의 변화 위에서, 노조가 사측의 선택지를 좁히고 제3안을 끌어낸 사례입니다.

협상에서 승리한다는 것은 상대를 완전히 굴복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의 외통수를 공략해 스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선택지로 움직이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번 삼성전자 성과급 합의는 바로 그 구조의 승리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