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사태의 핵심은 단순히 “국가가 5·18을 보호하려 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경계해야 할 문제는 그 '보호의 방식'입니다. 국가가 역사 기억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자의적인 사회적·경제적 비용을 부과하고, 나아가 시민과 기업의 내심(內心)과 의도까지 심판하기 시작했다는 점에 문제의 본질이 있습니다.
이 현상의 이면을 해부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열쇠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연성독재(Soft Dictatorship)'입니다. 직접 법으로 금지하지 않아도, 감당하기 어려운 비용을 부과해 시민과 기업 스스로 침묵하게 만드는 통치 방식입니다. 다른 하나는 '관심법(觀心法) 통치'입니다. 객관적 행위의 결과를 따지기 전에 “도대체 무슨 마음으로 그랬는가”를 권력자가 먼저 단정하고 심판하는 방식입니다.
이 두 메커니즘은 따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기억이 성역화되면 그 주변에는 비용이 쌓입니다. 비용이 커지면 사람들은 알아서 그 주제를 피합니다. 그리고 판단의 기준이 모호해진 틈을 타, 권력자는 행위자의 내면을 투시하는 심판자처럼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이 과정에서 살아 있는 성찰의 자원이어야 할 기억은 권력의 통치 장치로 변질됩니다.
◆얀 아스만: 살아 있는 기억은 어떻게 성역이 되는가
독일의 문화학자 얀 아스만(Jan Assmann)에 의하면, 살아 있는 질문의 대상이던 기억이 제도 속으로 들어가면 점차 '규범화된 기억'으로 굳어집니다. 이 과정에 적절한 견제 장치가 없으면, 기억은 성찰의 자원이 아니라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금기로 전락합니다. 이 변질은 대체로 세 단계를 거칩니다.
첫째, 성역화: 기억이 특별법, 국가기념일, 공식 교육과정, 국가 의례 속으로 편입됩니다. 5·18 역시 이 과정을 거쳤습니다. 공동체가 역사적 상처를 공적으로 기억하고 다음 세대에 전하는 이 단계 자체는 민주 사회에 꼭 필요한 일입니다.
둘째, 경직화: 제도화된 기억에 '공식 서사'가 생깁니다. 본래 살아 있는 기억은 질문과 논쟁을 허용하지만, 공식 서사가 강해지면 그 바깥의 해석은 부적절하거나 위험한 것으로 취급됩니다. 역사적 논쟁 자체가 정치적 낙인의 위험에 놓이기 시작합니다.
셋째, 출입 제한: 이 단계에 이르면 비판과 재해석은 물론, 단순한 농담이나 마케팅의 부주의, 우연한 연상조차 공동체에 대한 거대한 모독으로 단죄받습니다. 기억은 더 이상 성찰해야 할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접근해서는 안 되는 준종교적 금기가 됩니다.
이때부터 기억은 과거를 보존하는 장치가 아니라, 현재 사회적 행위의 허용 범위를 통제하는 규율 장치가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연성독재가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연성독재: 금지하지 않아도 침묵하게 만드는 권력
연성독재는 과거의 노골적 독재와 다릅니다. 헌법을 멈추거나 대놓고 금지하지 않습니다. 대신 '비용'을 부과합니다. 특정 주제를 건드렸을 때 감당해야 할 사회·경제·정치적 비용을 극단적으로 높여, 법적 금지가 없어도 알아서 입을 닫게 만듭니다.
이번 사태에서 기업과 시민이 직면한 비용의 청구서는 다층적이고 치명적이었습니다.
경제적 비용: 공공기관의 상품권 구매 배제, 정부 부처와의 협력사업 중단 등 권력의 신호는 곧바로 기업의 직접적 손실로 이어집니다.
평판 비용: 법원의 판단이 없더라도 “5·18을 모독한 기업”이라는 낙인이 찍히면 장기적인 브랜드 손상을 감수해야 합니다. SNS와 언론의 십자포화 속에서 평판 훼손은 사법적 징벌보다 빠르고 가혹합니다.
정치·행정적 비용: 대통령의 공개 비판은 행정부 전체에 보내는 묵시적 행동 지침으로 읽힙니다. 타깃이 된 기업은 향후 인허가, 감독, 정부 사업 참여 등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리스크를 계산하게 됩니다.
내부 비용: 위기관리 조직이 마비되고, 내부 책임 추궁이 이어지며, 이 사태와 관련없는 실무 담당자(매장 파트너)에게조차 과도한 비난이 집중될 수 있습니다.
가장 큰 비용, '예측 불가능성': 무엇이 부주의한 실수이고 어디서부터가 악의적 왜곡인지 기준이 흐릿합니다. 기준이 분명하면 사람들은 그 선 안에서 자유롭게 움직이지만, 모호하면 가장 안전한 선택은 단 하나뿐입니다. 아예 관련 주제를 피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연성독재의 핵심입니다. 표현의 자유도, 영업의 자유도 법적으로는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를 실제로 행사하는 비용이 너무 커지는 순간, 자유는 존재하지만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장식품이 됩니다.
◆'관심법(觀心法)' 통치: 권력은 왜 시민의 내심을 심판하려 하는가
비용을 통한 침묵 유도 구조는 다음 단계에서 더 서늘한 통치 방식으로 진화합니다. 권력이 겉으로 드러난 객관적 행위를 따지는 데서 그치지 않고, 행위자의 '마음속 의도'까지 끄집어내어 심판하려 드는 것입니다.
대통령의 발언 중 가장 위험한 대목은 “무슨 억하심정으로 이런 짓을 했느냐”입니다. '억하심정(抑何心情)'은 마음속 깊이 똬리를 튼 원망과 악의를 뜻합니다. 이는 마케팅 과정의 부주의를 질책하는 말이 아닙니다. 상대의 영혼 깊은 곳에 5·18을 고의로 모독하려는 불순한 적의가 있었다고 권력자가 단정해 버리는 선언입니다.
이것이 바로 '관심법(觀心法) 통치'입니다.
이러한 접근은 최근 정치권에서 논란이 된 ‘법왜곡죄’의 논리 구조와 완벽히 일치합니다. 법왜곡죄는 판사의 객관적 판결 결과보다,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법을 왜곡했는가(내심의 고의)를 심판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판사에게 “의도적으로 법을 뒤틀었는가”를 묻는 권력과, 기업에게 “역사적 아픔을 알면서도 악의를 품고 썼는가”를 묻는 권력은 근본적으로 한 몸입니다.
이 구조의 진정한 폭력성은 입증 책임의 전도에 있습니다. 내심은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없습니다. 권력자가 먼저 "악의가 있었다"고 찌르면, 피지목자는 자신에게 악의가 없었음을 권력자 앞에서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불가능한 처지에 놓입니다. 예측 가능한 기준 위에서 작동해야 할 법치주의가, 권력자의 자의적인 '독심술'에 자리를 내어주는 순간입니다.
◆푸코의 경고: 권력은 신체가 아니라 영혼을 겨냥한다
이 지점에서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규율권력에 대한 통찰은 현 사태를 해부하는 날카로운 메스가 됩니다.
푸코는 근대 권력이 감옥이나 처형대처럼 단순히 신체를 억압하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권력은 인간의 습관, 판단 방식, 자기 인식, 심지어 양심까지 길들입니다. 강압적인 금지 명령을 내리는 대신, 사람들이 스스로 위험을 계산하고 특정한 생각을 알아서 회피하도록 환경을 설계합니다.
이른바 “신체가 아니라 영혼을 겨냥한 규율권력”입니다.
이번 사태는 푸코의 경고가 일상적인 위축 효과를 넘어 어떻게 거대한 침묵을 만들어내는지 보여줍니다. 권력은 명시적인 금지선을 긋는 대신, “어떤 마음에서 나온 것인가”를 물으며 내면을 심판했습니다. 이 섬뜩한 선례를 지켜본 시민과 기업은 이제 무엇을 말할 수 있는지뿐만 아니라, “나의 순수한 의도가 저들에게 어떻게 읽힐 것인가”를 먼저 계산해야 합니다.
통제가 행동의 차원을 넘어 사고(思考)의 차원으로 깊숙이 뚫고 들어온 것입니다.
시민은 “이 말을 해도 합법인가?”를 묻는 대신, “이 말이 어떤 불순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될까?”를 두려워합니다.
기업은 “이 마케팅이 규정에 맞는가?”를 따지기 전에, “이 단어가 권력자의 눈에 악의로 읽힐 위험은 없는가?”를 먼저 묻습니다.
이것이 연성독재가 도달하려는 자기검열의 완성입니다. 권력자가 굳이 모든 시민의 입을 일일이 틀어막고 감시할 필요가 없습니다. 시민이 권력자의 의심 어린 시선을 자신의 내면으로 가져와 스스로를 감시하게 만들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영혼을 검열하는 사회는 이미 자유를 잃은 것이다
5·18 민주화운동을 기억하고 존중하는 것은 우리 공동체의 숭고하고 당연한 의무입니다. 그러나 그 기억을 수호하겠다는 명분이 권력자의 '관심법'과 결합하여 시민의 내심을 심판하고, 막대한 비용을 강제하여 사회적 침묵을 유도한다면 우리는 그 방식에 단호히 의문을 제기해야 합니다.
국가권력이 객관적 법률과 행위가 아니라 마음속 의도까지 재단하고 통제하려 들 때, 민주주의는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무너져 내립니다. 권력의 독심술과 모호한 징벌의 공포 앞에서는 그 어떤 살아 있는 역사적 성찰도 피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국가폭력에 피 흘려 저항했던 5·18의 진정한 정신을 계승하는 길은, 역설적으로 그 기억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현재 권력의 통제를 서늘하게 감시하는 데 있습니다. 스스로 자유를 검열하고 권력의 눈치를 보며 내심마저 감추어야 하는 사회라면, 우리가 피투성이로 지켜내려 했던 민주주의의 기억 역시 생명력을 잃은 화석에 불과할 것입니다.
겉으로는 아무런 자유도 잃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이미 자유를 사용하는 능력을 조용히 상실해 가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