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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5·18을 보호하는 방식이 5·18을 배신할 때 [ 수행적 자기모순 ]

1980년 5월 광주에서 벌어진 일의 본질은 단순한 유혈 충돌이 아니었습니다. 국가가 자국 시민에게 총을 겨눈 사건이었습니다. 계엄군은 시민을 폭도로 규정했고, 국가권력은 그 규정을 근거로 폭력을 정당화했습니다.

5·18 민주화운동이 한국 민주주의의 도덕적 기원으로 자리 잡은 이유는 단지 희생의 규모 때문만은 아닙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국가도 틀릴 수 있으며, 국가권력은 언제든 자의적으로 변질될 수 있고, 시민은 그 부당한 권력에 저항할 수 있다"는 사실을 피로써 증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2026년 5월, 그 숭고한 기억 앞에 다시 국가권력이 섰습니다.

스타벅스의 ‘탱크데이’ 프로모션이 5·18 기념일과 겹치면서 논란이 일었습니다. 문제의 표현이 단순한 부주의였는지 악의적인 역사 왜곡이었는지는 엄밀한 법적 판단이 필요한 사안입니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법적 판단이 내려지기도 전에 정치적 규탄으로 번졌습니다.

대통령은 이 사안을 두고 “저질 장사치의 비인간적 막장 행태”라며 “법적·정치적 책임”을 거론했습니다. 뒤이어 행정안전부는 정부 행사에서 스타벅스 상품권을 배제하겠다는 입장을 밝혔고, 보훈부의 상품권 사용 중단 지침, 국방부의 협력사업 잠정 중단 등 공공기관의 선제적 거리두기가 줄을 이었습니다.

법적 강제 명령이 내려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로 그 점이 이 사안을 더 서늘하게 만듭니다. 명령 없이도 권력의 신호만으로 행정조직과 시장이 알아서 움직이며 징벌을 집행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 논란의 핵심은 스타벅스의 얄팍한 마케팅이 아닙니다. 더 본질적인 쟁점은 "국가가 특정 역사 기억을 어떤 방식으로 보호하는가", 그리고 "그 보호 과정에서 국가권력의 개입이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가"에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두 가지 근본적인 질문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첫째, 국가폭력에 맞선 시민 저항의 기억인 5·18을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다시 국가권력이 나서서 시민사회와 시장을 압박하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둘째, 무엇이 모독인지 그 기준이 불분명한 상태에서 권력자가 행위자의 내심과 의도를 먼저 단정하고 심판하는 방식은 민주주의에 어떤 위험을 낳는가.

이 질문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거대한 모순, 그 현상의 이면을 들여다보아야 할 때입니다.


◆5·18의 핵심은 ‘국가폭력에 대한 저항’이다

5·18은 국가에 대한 무조건적 신뢰를 요구하는 기억이 아닙니다. 오히려 "국가권력은 언제나 감시받아야 하며, 법률과 절차의 통제를 벗어난 공권력은 시민의 자유를 잔혹하게 침해할 수 있다"는 준엄한 경고입니다.

전두환 신군부는 계엄을 앞세워 시민을 폭도로 규정했고, 그 자의적 규정은 국가폭력을 정당화하는 언어가 됐습니다. 국가가 특정 시민을 적으로 규정하고 공권력을 행사할 때 어떤 비극이 벌어지는지를 5·18은 증명했습니다.

따라서 5·18의 정신은 단순히 “과거를 잊지 말자”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 기억이 품은 더 깊은 명제는 “국가권력은 언제나 절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국가가 아무리 정의와 질서, 공동체의 이름을 내세우더라도 결코 법과 절차를 우회하여 시민의 자유 위에 군림해서는 안 된다는 절대 원칙입니다.


◆ 그 기억 앞에 다시 권력이 등장했다

이번 사태에서 문제는 5·18을 존중하느냐의 여부가 아닙니다. 아픈 역사는 당연히 존중되어야 합니다. 진짜 쟁점은 그 기억을 보호하는 '방식'에 있습니다.

5·18을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대통령은 특정 기업을 공개적으로 규탄했습니다. 이에 호응하여 행정부는 상품권 배제와 협력사업 중단 등 실질적인 징벌 조치에 나섰습니다. 사법부의 판결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입법부의 법적 근거가 마련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최고 권력자의 도덕적 분노가 먼저 등장했고, 행정조직과 시장은 그 분노의 신호에 복종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거대한 구조적 아이러니가 발생합니다.

국가폭력에 저항했던 시민의 기억이, 역설적이게도 다시 국가권력의 자의적 개입을 정당화하는 무기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기념비적 권위주의’의 위험성

어떤 역사적 사건이 국가의 공식 기억, 즉 '기념비'가 되면 그 기억은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성역이 됩니다. 그리고 그 성역을 수호하겠다고 나선 권력은 막강한 도덕적 권위를 얻습니다. 이후 그 성역 주변에서 맴도는 말, 농담, 부주의한 실수, 심지어 재해석조차 점차 국가의 공적 제재 대상으로 이동합니다.

이러한 현상을 ‘기념비적 권위주의(Monumental Authoritarianism)’라 부를 수 있습니다.

이 권위주의가 섬뜩한 이유는, 억압을 가하는 권력 스스로 자신을 '억압자'가 아닌 '보호자'로 굳게 믿는다는 데 있습니다. 자신들이 피해자를 보호하고, 민주주의를 수호하며, 역사 정의를 바로 세운다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더 위험합니다. 자신이 억압적 강제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권력은 적어도 시민사회의 비판을 의식하고 눈치를 봅니다. 그러나 자신이 '절대적 정의'를 수행한다고 믿는 권력은 브레이크 없이 훨씬 더 폭력적이고 자의적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수행적 자기모순: 보호하려는 내용과 방식의 정면충돌

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이번 사태의 본질은 전형적인 ‘수행적 자기모순(Performative Contradiction)’입니다. 자신이 주장하는 내용과, 그 주장을 실행하는 방식이 정면으로 충돌하여 스스로의 논리를 파괴해 버리는 현상입니다. 마치 “누구도 말할 자유를 가져서는 안 된다”고 광장에서 자유롭게 연설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5·18의 가장 묵직한 교훈은 “국가가 정의와 질서를 내세우더라도 법과 절차를 벗어나 자의적으로 시민을 억압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5·18을 보호하겠다며, 현재의 국가권력이 다시 사법 절차를 우회한 행정적 압박과 징벌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보호하려는 메시지는 “국가권력의 자의성을 경계하라”인데, 그것을 지키는 방식은 “국가권력의 자의적 개입”인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이중잣대가 아닙니다. 민주주의의 기억이 스스로의 존재 원리를 파괴하는 치명적인 모순입니다. 민주주의는 선한 목적만으로 정당화되는 체제가 아닙니다. 아무리 목적이 숭고하더라도, 그것을 실현하는 절차와 수단까지 스스로 엄격하게 제한할 때만 정당성을 얻습니다.

법률상 명확하지 않은 사안을 대통령의 분노와 행정기관의 재량으로 징벌하며 기업과 시민의 자유를 위축시킨다면, 그것은 5·18을 기리면서 동시에 그 정신을 가장 정면으로 거스르는 행위가 됩니다. “국가권력을 경계하라”는 피 묻은 교훈이 “국가권력이 개입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둔갑하는 순간, 기억은 시민 자유를 지키는 방패가 아니라 권력의 칼을 감추는 칼집으로 전락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기억은 현재의 권력도 똑같이 묶어둔다

결국 우리가 던져야 할 핵심 질문은 이것입니다.

“5·18의 정신을 과거의 독재 정권뿐만 아니라 ‘현재의 국가권력’에도 동일하게 들이댈 수 있는가.”

과거의 국가폭력만 규탄하고 지금 현재 권력의 자의적 폭주에는 눈감아 주거나 오히려 정당성을 부여한다면, 그것은 살아 있는 민주주의의 기억이 아니라 권력에 의해 박제된 성역화된 정치 자산일 뿐입니다.

5·18이 남긴 교훈은 특정 기억을 무조건 범접할 수 없는 성역으로 만들라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명분을 내세우든 국가권력은 언제나 절제되어야 하며, 결코 시민의 자유 위에 군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원칙은 과거의 정권뿐만 아니라 지금의 권력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합니다. 민주주의를 지키겠다는 권력조차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권력의 폭주를 막기 위해 희생된 역사를 지킨다면서 다시 국가권력의 힘을 빌려 사람들의 입을 막고 시장을 통제한다면, 그것은 5·18에 대한 가장 뼈아픈 배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