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휴리스틱과 앵커링 효과 ] 행동경제학으로 읽는 트럼프-이재명 회담

  • 등록 2025.08.31 22: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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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 1이 시스템 2를 지배할 때, 이미지 외교가 실질을 가린다

닭내장탕 하나로 30년을 지켜온 노포(老鋪) ‘로사식당’. 주인장 로사의 손맛은 레시피가 아닌 감각에 있습니다. 그녀는 젓가락 끝으로 전해지는 미세한 촉감만으로 내장의 상태를 간파하고, 질기다 싶으면 불을 줄여 오롯이 감(感)에 의지해 더 오래 삶아냅니다. 간도 손대중으로 소금, 된장, 청양고추를 툭툭 던져 넣어 그날의 최상의 맛을 완성합니다.

반면, 다양한 닭 요리를 선보이는 청년 셰프 지미는 마치 엔지니어 같습니다. 그녀는 치킨 스튜를 만들 때, 모든 재료를 레시피에 명시된 크기와 무게대로 정밀하게 손질합니다. 닭고기는 정확한 시간만큼 구워내고, 채소는 정량을 계량해 순서에 맞춰 볶아냅니다. 스튜는 정해진 시간 동안 끓인 뒤, 그램(g) 단위까지 정확히 맞춘 양념으로 마무리합니다. 덕분에 지미의 스튜는 언제나 오차 없는 완벽한 맛을 자랑합니다.

이처럼 두 사람은 판단의 근거, 요리 과정, 그리고 결과의 지향점에 있어 극명한 차이를 드러냅니다.

로사는 경험과 감각으로 요리합니다. ‘젓가락 끝의 촉감’, ‘손대중’ 등 수십 년간 축적된 ‘감’이 그녀의 판단 기준입니다. 그녀는 정량화된 수치가 아닌, 조리하는 음식의 미세한 감각 차이를 읽어내면서 유연하고 효율적인 요리를 지향합니다.

지미는 데이터와 규칙으로 요리합니다. 명확한 규칙과 절차로 정의된 ‘레시피’가 그녀의 판단 기준입니다. 그녀는 모든 과정을 도구를 이용한 정밀한 계측을 통해 완벽하고 오차 없는 맛을 추구합니다.


◆ 휴리스틱 접근법 vs 알고리즘 접근법

두 셰프의 이야기는 경험적 직관에 의존하는 ‘휴리스틱 주방’과 데이터에 기반한 ‘알고리즘 주방’의 차이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로사의 요리 방식이 휴리스틱(Heuristic) 접근법에 해당합니다.

휴리스틱 방식은 오랜 경험과 직관, 어림짐작 등 ‘감(Gut feeling)’으로 문제에 접근합니다. 이 방식의 목표는 효율성, 신속성, 유연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을 계산하고 분석하는 대신, 경험을 통해 형성된 자신만의 노하우나 ‘느낌’을 판단의 근거로 삼습니다. 휴리스틱은 인간의 제한된 인지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도록 돕는 도구이며, 특히 시간과 정보가 부족한 상황에서 매우 유용합니다.

반면 지미의 요리 방식은 알고리즘(Algorithm) 접근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알고리즘 방식은 ‘수학 문제’를 풀 듯, 증명된 규칙과 데이터, 명확한 논리적 절차를 통해 문제에 접근합니다. 이 방식의 목표는 언제나 일관되고 완벽한 결과를 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과정이 복잡하고 때로는 결론에 이르기까지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될 수 있습니다. 알고리즘은 신속함을 일부 희생하는 대신, 정확성, 신뢰성, 그리고 최적의 결과를 보장한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 휴리스틱과 알고리즘, 시스템 1과 2: 완벽한 비유

문제 해결 방식인 ‘휴리스틱과 알고리즘’의 관계는 인간의 사고 체계인 ‘시스템 1과 시스템 2’의 관계와 유사합니다. 둘은 각각 빠르고 직관적인 사고와 느리고 분석적인 사고를 대표합니다. 

① 두 가지 사고 체계: 자동 조종사(시스템1)와 신중한 조종사(시스템2)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이 제시한 것처럼, 우리 안에는 두 명의 조종사가 있습니다.

시스템 1 (빠른 사고)은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는 '자동 조종사'입니다. 감정과 직관에 의존해 정신적 에너지를 거의 소모하지 않고 즉각적인 판단을 내립니다. 예를 들어, 빨간불을 보고 바로 브레이크를 밟는 행동, 슈퍼마켓에서 늘 사던 제품을 고민 없이 집는 것, 감정에 휩쓸려 충동적인 결정을 하는 것 등이 모두 시스템 1의 영역입니다.

반면 시스템 2 (느린 사고)는 의식적으로 작동하는 ‘신중한 조종사’입니다.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사고를 담당하며, 집중과 노력이 필요해 상당한 정신적 에너지를 요구합니다. 가령, 종합소득세의 이자소득 신고 시 분리과세와 종합과세 중 어느 것이 유리할지 따져보는 것, 미래 진로를 결정하는 것, 주식 포트폴리오를 구성해 위험을 분산시키는 것 등이 시스템 2의 역할입니다.


② 휴리스틱과 알고리즘 : 시스템 1과 2

휴리스틱과 알고리즘은 각각 시스템 1과 시스템 2를 움직이는 핵심 도구(Tool)입니다. 

시스템 1은 휴리스틱이라는 엔진을 사용합니다. 시스템 1이 빠르고 직관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것은 복잡한 정보를 단순화하는 ‘정신적 지름길’, 즉 휴리스틱 덕분입니다. 쉽게 떠오르는 사례를 바탕으로 위험을 평가(가용성 휴리스틱)하는 것처럼, 시스템 1은 휴리스틱을 통해 즉각적인 결론으로 나아갑니다. 휴리스틱 없이는 시스템 1의 신속한 작동을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둘은 밀접합니다.

반면 시스템 2는 알고리즘이라는 나침반을 따릅니다. 느리고 신중한 사고는 명확한 규칙과 논리적 절차를 따르는 알고리즘의 방식과 같습니다. 수학 문제를 풀 때 공식에 따라 단계별로 계산하는 것처럼, 시스템 2는 알고리즘을 통해 정확하고 신뢰도 높은 결론을 도출하여 올바른 방향을 찾아갑니다.


◆ 시스템 1과 휴리스틱의 한계

시스템 1과 휴리스틱은 시간과 정보가 제한된 현실에서  신속하게 판단하고 행동하도록 돕는 유용한 의사결정 방식입니다. 대부분의 일상적인 결정을 복잡한 분석 없이 처리할 수 있는 것은 이 덕분입니다.

하지만 이 방식의 치명적인 약점은 효율성을 위해 정확성을 희생한다는 데 있습니다. 

진짜 문제는 복잡하고 중요한 결정을 마주했을 때 발생합니다. 시스템 1의 빠르고 감정적인 판단이 주도권을 잡으면, 신중하고 논리적인 시스템 2의 작동이 제압되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편향(bias)이 생겨나고, 이는 곧 의사결정의 실패로 이어집니다. 

결국 시스템 1의 가장 큰 한계는, 자신의 감성적 직관적 판단이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고, 감정에 휩싸여 시스템 2를 작동시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합리적 의사결정에 익숙한 전문가들에게도 흔히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 시스템 1과 휴리스틱의 한계 : 중고차 구입 

시스템 1과 휴리스틱의 한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중고차 구입 과정입니다.

딜러가 처음에 ‘2,000만 원은 받아야 합니다’라고 가격을 제시하는 순간, 이 숫자는 구매자의 머릿속에 강력한 기준점(앵커)으로 자리 잡습니다. 구매자는 이제 이 가격을 중심으로 협상을 시작합니다. 설령 1,800만 원에 합의하더라도, 구매자의 시스템 1은 ‘200만 원이나 할인받았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큰 만족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의사결정의 실패가 발생합니다. 

성공적인 의사결정은 ‘이 차의 실제 시장 가치는 얼마인가? 사고 이력이나 상태는 어떤가?’처럼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가치를 탐색하는 시스템 2의 영역입니다. 그러나 앵커에 묶인 구매자는 이성적인 분석 대신, 판매자가 제시한 임의의 숫자인 ‘2,000만 원에서 얼마나 깎았는가?’라는 상대적인 할인 폭에만 집중하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구매자는 ‘협상의 승리’라는 심리적 만족감을 얻었을지 모르지만, ‘최적의 가격’으로 구매하는 ‘거래의 승리’에는 실패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판매자가 던진 앵커가 시스템 2의 합리적 분석을 마비시키고, 시스템 1의 감정적 만족감에 기반한 결정을 내리도록 유도했기 때문입니다.


◆ 이재명 대통령의 트럼프 회담과 앵커링효과

2025년 8월 25일, 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백악관 회담은 표면적으로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러나 행동경제학의 렌즈로 이 만남을 깊숙이 들여다보면,  이번 회담은 중고차 시장에서 벌어지는 ‘앵커링 효과’의 정치적 버전이자, 심리적 만족감이 객관적 실리를 압도한 ‘만족감 편향’의 전형적인 사례로 평가될 수 있습니다. 

모든 협상은 보이지 않는 기준점, 즉 앵커(Anchor)에서 시작되는 것처럼, 이번 회담도 트럼프 대통령의 앵커링 전략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회담 직전 소셜 미디어를 통해 한국 정세를 ‘혁명’과 ‘숙청’이라는 단어로 규정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막말이 아니라, 회담 전체의 의제를 ‘한국의 정치적 불안정성’이라는 프레임에 고정시키려는 강력한 부정적 앵커였습니다.

중고차 딜러가 터무니없는 ‘2,000만 원’을 외쳐 구매자의 판단 범위를 장악하듯, 트럼프의 이 앵커는 한국 측을 방어적 입장으로 몰아넣고 모든 논의를 자신의 의도대로 끌고 가려는 고도의 심리전이었습니다. 이로써 국제 여론의 시선은 복잡한 경제·안보 현안이 아닌, 이 자극적인 앵커에 묶이게 되었습니다. 

이에 이재명 대통령은 프레임 전환(Frame Shift)으로 맞섰습니다. ‘사실과 다르다’며 발언의 진위를 문제 삼았고, 결국 트럼프에게서 ‘가짜뉴스’라는 동의를 끌어냈습니다. 

이 극적인 화해 장면은 이대통령에게 ‘위기를 리더십으로 돌파했다’는 긍정적 이미지를 제공했습니다. 

여기에 이 대통령이 제안한 ‘150억 달러 조선 투자’ 제안은 친화적 분위기를 연출하며 ‘성과 만족 편향(Outcome Satisfaction Bias)’을 극대화했습니다.

이는 시스템 1(빠른 사고)이 시스템 2(느린 사고)를 압도하는 전형적인 과정입니다.

눈앞의 갈등(앵커)이 해소되는 경험은 심리적 만족감을 줍니다. 중고차 구매자가 ‘200만 원을 깎았다’는 사실에 만족하며 차의 실제 가치를 잊어버리듯, ‘트럼프와 화해했다’는 상징적 승리가 ‘실제로 무엇을 얻었는가?’라는 본질적 질문을 덮어버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회담의 객관적인 성과는 무엇인가? 

야당의 지적처럼, 회담의 결과물은 추상적 약속에 그쳤습니다. 트럼프대통령의 김정은위원장 만남 약속은 구체성이 없었고, 150억 달러 투자 제안 역시 한미 무역 불균형 해소나 안보 강화 같은 핵심 국익과 직결된 합의로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국민의힘 송언석 원내대표가 이를 ‘얻은 것 없는 외교 참사’라 규정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말입니다. 앵커링 효과가 설정한 부정적 이미지를 해소하고, ‘친분 쌓기’라는 만족감을 얻는 데 집중한 나머지, 정작 국가의 실익을 챙기는 데는 실패했다는 비판입니다. 

이처럼 이번 회담은 심리적 만족감이 실질적인 성과의 부재를 가린 사례로 평가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복잡하고 어려운 목표(예: 무역 협상, 안보 합의)를 달성하는 것보다, 눈앞의 갈등을 해결하고 긍정적인 결과를 얻는 것에서 훨씬 큰 만족감을 느낍니다. 

이러한 특징이 이번 트럼프회동에서도 드러났다는 지적입니다. 

결국 이 사례는 앵커링 해소 자체가 만족감을 주지만, 실제 전략적 가치는 별개라는 행동경제학적 교훈을 보여줍니다. 

이번 회담은 단기적으로는 트럼프의 부정적 발언이라는 ‘앵커’를 제거하고, 대통령의 위기관리 능력을 부각하는 ‘이미지’를 제공하였습니다.  여론 관리와 지지층 결집이라는 측면에서도  성공적입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외교 실익 측면에서는 실패한 협상으로 평가될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갈등을 해결하고 만족감을 얻는 것과, 보이지 않는 곳에서 국가의 장기적 이익을 확보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앵커를 해제하는 전술적 성공에 취해, 정작 가장 중요한 전략적 목표인 시스템2의 객관적 분석(예: 합의 문서 검토, 장기 영향 평가)을 잊어버리는 것이야말로 외교 무대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의사결정 실패’라는 지적입니다. 



조성규기자 ondolnew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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