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일본 정부는 군국주의의 “커밍아웃”을 벌이고 있다.일본 정부가 지난달 일본군의 위안부 강제 동원을 인정한 고노(河野)담화에 대해 본격적으로 검증에 나서겠다고 밝혔다.스가 요시히데 관방 장관은 “일본정부의 기본입장은 고노담화를 계승하는 것”이나, “기밀을 유지하는 가운데 검증은 필요하다”며 우회적으로 속내를 드러냈다.전문가들은 고노담화의 검증은 결국 이의 무력화를 위한 포석으로 파악하고 있다.아베정부는 일본군의 위안부에 대한 강제성을 부인하는 와중에, 집단자위권 도입, 최종적으로 일본평화헌법 9조 개정의 수순을 밟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일본전문가들은 일본의 우경화 확산은 경제적 침체와 외교적 지위의 하락 등으로 추락하는 일본의 상황을 반전시키는 전략으로 분석하고 있다. 일본사회가 국가주의 우경화속에서 출구를 찾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대응은 우리나라의 민족의 자존심 문제를 넘어서 여성인권과 인종주의 폭압성에 대한 반격으로 이해되고 있다.일본정부가 부인하고자 하는 고노담화의 핵심인 강제성 문제와 성노예제를 검토해본다. ◆ 강제성일본과 한국등과의 일본군 위안부 논쟁의 핵심은 2차 대전 기간 중의 일본정부와 일본군의 강제성여부이다.
노라노는 1974년에 국내브랜드최초로 뉴욕 메이시스 백화점에 입점하게 된다. 노라노는 옷의 허리에 고무줄을 넣어, 이 옷을 입고 일할 수도 있고, 또한저녁식사도 가능하게 하였다. 옷의 실용성을 강조한 것이다.
노라노는 85세의 나이에도 여전히 의상을 만든다. 60여년동안 가위를 놓지않고 허리를 꼿꼿이한채, 옷을 통해 여성의 자아찾기에지금도 앞장선다.가위질과 바느질로 손마디가 삐뚤어지고 손가락에 굳은 살이 생겼지만, 그녀의 마음은 늘 당당함과 자신감에 차있다.
노라노는 "패션은 예술이 아니고 사람이 예술이다."라고 역설한다. 패션을 장식과 사치가 아닌 자신의 개성과 당당함을 표출하는 수단으로 인식 한 것이다. 그녀는 "옷을 통해 여성의 몸의 움직임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고 자존심을 갖게끔 노력했다."며 옷으로 여성의 자존감을 높이는 노력에 힘썼다. 노라노는 1956년 서울 반도호텔에서 한국최초의 패션쇼를 펼쳤으며, 1966년에 최초의 기성복 패션쇼를 열었다.
노라노는 1950-60년대의 스타배우와 가수들의 의상을 도맡아 만들었다. 최은희, 엄앵란, 최지희,문희, 윤복희,펄시스터즈등이 그녀의 주된 고객이었다.'커피한잔'을 부른 펄시스터즈의 판타롱패션을스타일링한 노라노는 대중의 욕망을 읽어내고,그들과 호흡하고, 당당히 소비하도록 이끈대중들의리더였다. 배우엄앵란은 "감독은 연출하지만, 노라노선생은 영화 전체의상을 연출했다."면서 "그녀는 대중문화의 기수였다."라고 회고했다.
노라노가 미국 유학을 떠날 수 있었던것은 외환은행에서 상사로 모신 미국인 스미스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누인노라노는 1928년 아홉남매 가운데 차녀로 태어났다. 외할아버지는 과거에 합격하여 영친왕의 영어교사였다. 아버지는 한국최초의 방송국인 경성방송국의 개국공신이었고, 어머니는 한국최초의 여성아나운서인 이옥경이다.노라노는 남편이 전장으로 떠난 후, 미군정청의 보건후생부의 여사무원으로 취직한다. 문제는 영문타이핑이었다. 흑인 군인으로부터 타자기를 하루 빌려, 종이 위에 자판을 그리고, 3개월동안 영문 타이핑연습을 한다. 남편과 이혼후 외환은행을 창립하기위해 온 스미스의 비서로 일한다.스미스가 그녀를 디자이너의 꿈을 실현시켜준 장본인이다. 스미스가 주말마다 연 파티에서 노라는 파티준비를 하고 통역을 한다. 그리고 파티에 참가하기 위해 격식에 맞는 옷을 손수 만들어 입는다.파티에 참석한 재무국장의 부인이 그녀가 만든 옷을 칭찬하게 되면서 노라노의 운명이 새롭게 열리게된다. 스미스가 패션디자이너로서 미국유학을떠날 수 있도록 추천서를 받아주고 미국 의류회사에서 일하도록 알선해준다. ㅇ